소설리스트

34. 연기 너머에 (34/110)


34. 연기 너머에
2022.09.25.



“쿠키 잘 먹었어요. 그런데 난 줄 게 없어서.”

 
차에 도착한 지호가 샌드위치와 함께 민트색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어젯밤 혜윤이 쿠키를 넣어 건넸던 그 봉투였다. 그 속엔 쿠키가 아닌 다른 게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으으, 이런 거 안 줘도 돼요.”

 
무를 생각이 없는지 곧게 뻗은 손을 바라보던 혜윤이 겸연쩍은 얼굴로 봉투를 받았다. 지호의 손에 있을 땐 작아 보이던 봉투가 그녀의 두 손엔 적당히 어울릴 만큼 넉넉해 보인다.


“별건 아니고 컵이에요. 화보 찍으러 해외 나갔을 때 산 건데, 사실 난 쓸 일도 없고.”

“응? 쓰지도 않을 거면서 왜 샀어요? 기념으로?”

“그냥 뭐, 아빠가 어디 멀리 다녀오면 선물 사 오는 느낌으로? 언젠가는 누구 주게 되겠지 했는데 그게 오늘이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여러 스태프들이 둘을 힐끔거렸지만 지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혜윤은 아이처럼 봉투 속의 내용물을 궁금해하느라 바빴다.

커피를 받은 뒤엔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벤치로 향했다. 그리고 앉자마자 봉투부터 열어보는 혜윤이다. 조심스러운 손이 상자 속 컵을 꺼내더니만 반짝이는 표정으로 눈앞까지 번쩍 들어 올렸다.


“와아…… 너무 예쁘다!”

 
커피를 입에 가져가던 지호의 눈은 여전히 혜윤을 향해 있었다. 아빠들이 왜 선물을 사 오는지 알 것 같았다. 저런 표정이 보고 싶어서겠지.


“2개니까 카페에서 써요.”

“에이, 집에서 저만 쓸 건데요?”

“큭큭. 그래도 좋고.”

 
지호의 손이 샌드위치를 먹기 좋게 건넸다. 계속 두면 아무것도 안 먹고 컵만 바라볼 것 같아서.

두 손에 쥔 컵을 보다가, 다시 제게 온 샌드위치를 보다가. 그래도 컵을 놓기 싫은지 받아들지를 않자 지호가 컵을 잠시 뺏어 벤치 위에 올렸다. 뺏기는 순간에도 아쉬운 시선이 컵을 따라 쭉 내려왔다.


“그리고 컵 안에 조그만 카드 하나 있을 거예요.”

“네. 이건 뭐예요?”

 
이제야 샌드위치를 받아 든 혜윤이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아까 컵을 들 때부터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으니 모르지 않았다.


“그건 우리 집 출입 카드.”

“…….”

 
샌드위치를 먹으려 벌린 입이 끝내 물지를 못하고 굳어버린다.


“주소랑 현관 비밀번호는 메시지로 보내줄게요.”

 
여전히 빵 한 입도 깨물지 못하고 동그랗게 멈춰버린 입.

지호가 혜윤의 턱을 살짝 올려줬다. 겨우 꾸역꾸역 씹길래 ‘옳지.’라고 장난을 쳤는데 들리지도 않는 눈치라 더 귀여웠다. 뭐든 당황하면 온몸으로 표현을 해 주니. 그렇게 안 해도 충분히 눈이 가는 걸 막을 수 없는데도.

가만히 놔두면 또 상상 공장이 문을 활짝 열 게 뻔해 보였다.


“저층 뷰도 정원처럼 좋을 거 아는데, 고층 뷰는 또 색다르니까.”

“…….”

“집에서 작업하는 거면 놀러 와서 글 쓰고 해요.”

 
지호는 커피를 머금으며 그날을 떠올렸다. 제집에서 혜윤이 자고 일어난 그날. 다이닝룸에서 자신이 봤던 그녀의 표정. 강물이 튕겨낸 무수한 빛의 조각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얼굴.

누가 더 눈부셨는지 본인은 모르겠지만.


“어차피 난 새벽에 들어가서 몇 시간 자고 나오는 게 다니까.”

“음…….”

“굳이 얼굴 보고 가고 싶으면 기다려도 좋고?”

“우와! 아직 간다고도 안 했는데요?”

“큭큭. 그날…… 창밖 보면서 좋아하길래.”

 
혜윤은 예쁜 컵 안에 들어 있는 금속의 작은 카드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 역시 지호의 집을 회상했다. 구름 위에서 내려보는 것 같던 서울의 아침, 정말 구름 위가 맞지 싶을 정도로 아늑했던 이 남자의 향.


“……와요. 고민하지 말고.”

 
이미 흔들렸는데 저 목소리까지 더해지면 답은 나온 것이었다.


“생각…… 해볼게요.”

“그래요.”

 
수줍은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지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씬 40. 종수의 방.

종수. 책장 속에 작은 액자를 보는. 어린 종수를 안고 웃고 있는 아빠와 엄마의 사진.

종수 : (사진 바라보는.) 누나. (망설이며.) 엄마라고 부르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희수 : (사진 바라보는.) 따뜻한 기분이야. ‘엄마’ 했을 때 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종수 : 그렇죠? (웃으며.) 역시 그럴 것 같았어요. 평생 모르겠구나 싶었는데 누나 때문에 알게 됐다. (희수 바라보는.) 아무한테도 못 물어볼 줄 알았거든요.

희수 : (종수 바라보는. 웃으며.) 다행이네.

종수 : (N) 난 이날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오래 기다린 답을 듣던 날. 그 순간. 그 목소리. 그 얼굴.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서는 헷갈리기도 했다. 내가 오랫동안 기다린 게 정말 그 대답이었는지. 어쩌면 누나였던 건 아닐까 하고.>

야간 촬영이 남은 지호와 일부 스태프들을 제외하고는, 오후 마지막 촬영 장면을 앞두고 대부분 어수선했다. 퇴근을 앞둔 들뜬 마음들이 꼼꼼하지 못한 손놀림으로 여기저기 소음을 만들었다.


 


“……작가님.”

“네?”

 
그리고 그들이 버리고 간 침묵을 잔뜩 주웠는지, 지호만 침잠의 세계에 빠진 듯 조용히 대본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낮은 목소리가 혜윤을 불렀다.


“어떤 생각으로 이 글을 썼어요?”

“왜요? 이상한 부분이 있어요?”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가 너무 진중하게 느껴졌다. 혜윤은 여전히 대본을 보고 있는 지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초점을 잃은 눈이 글자를 보는 것 같진 않았다.


“아니 그냥……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종수 마음을.”

 
그답지 않게 떠듬떠듬 이어지는 말.


“아, 그럼 다행이고요.”

 
혜윤은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싶어 가볍게 대답했지만, 실은 마음마저 가벼운 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말이 아니라 말 사이의 공백을 들어야 하는데, 지호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자, 씬 40 들어갈게요! 레디, 액션!”

 
그리고 이때부터였다. 혜윤의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한 건. 카메라가 돌기 시작한 순간, 아직 지호가 채 대사를 뱉기도 전.


“……누나.”

 
2초 정도 망설임 끝에 나온 누나라는 말. 그 2초의 망설임.

어떤 2초는 눈 한번 깜빡이면 지나갈 만큼 의미가 없지만, 지금 희수를 부르기 전 2초는 너무 크게 다가왔다. 뭘까. 왜 먹먹할까. 이유 모를 감정의 동요를 누르며 혜윤은 희수 역할에 집중하려 애썼다.


“……엄마라고 부르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그리고 생각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엉엉 우는 아이의 시뻘건 눈, 그 처절한 절규. 그것보다는.


“따뜻한 기분이야. ‘엄마’ 했을 때 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엄마와 함께 있는 친구를 말없이 바라보는 눈빛, 그 고요한 절망. 그녀는 후자가 더 마음이 쓰일 것 같다고 느꼈다. 바로 지금처럼.

정말 이상했다. 이렇게 슬픈 감성으로 쓴 글이 아닌데, 왜 자꾸 코끝이 따끔거리는지.


“그렇죠? 역시 그럴 것 같았어요. ……평생 모르겠구나 싶었는데 누나 때문에 알게 됐다.”

“…….”

 
그리고 그 감정은 지호가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이 오자 더 선명해졌다.


“아무한테도 못 물어볼 줄 알았거든요.”

 
눈이 마주친 그는 분명 웃고는 있는데 눈가가 촉촉했다. 저런 지문이 없었는데도.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니 울컥하는 감정이 점점 휘몰아쳤다.


“……다행이네.”

 
더 지체하면 안 된다. 지금이 마지노선 같았다. 그나마 슬픔을 억누르고 웃어줄 수 있는. 그래서 혜윤은 어렵게 입을 떼며 미소 지었다.


“컷! 좋아요! 와, 진짜 너무 좋다 두 사람. 지호 씨만 다른 각도로 한 번 더 갈게요!”

 
민우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가득 들어찬 만족스러움을 알렸다. 컷 소리와 함께 지호는 원래의 다정한 표정으로 혜윤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조금 힘들었다. 숨을 쭉 내쉬는데 한 번씩 가슴이 들썩거려 턱턱 걸리는 것 같았다.

꾸욱-

그리고 지호가 한 손으론 혜윤의 뒤통수를 살짝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뜨거워진 눈두덩이를 가볍게 눌렀다.


“오늘 피곤했을 텐데 고생했어요. 빨리 가서 푹 쉬어요.”

“……네.”

 
지호가 만들어준 시원한 어둠 속으로 늘 혜윤을 안심시키는 목소리가 들렸다. 더 그러고 있자니 이어지는 촬영을 기다리는 눈들이 많아, 그는 얼마 있지 않아 손을 내렸다.


“지호 씨! 다시 한번 더 갈게요!”

“네.”

 
혜윤은 지호와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세트장 밖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결국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저를 쳐다보는 민주를 먼저 차에 보낸 뒤 혼자 재촬영을 이어가는 지호를 봤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이 감정이 뭔지, 그 답이 여기에 있을 것 같아서.


“레디, 액션!”

 
민우의 옆에 선 혜윤은 모니터를 쳐다봤다. 조금 전 그 장면을 지호만 따로 잡아서 찍는 것 같았다. 그의 작은 움직임과 말투, 그리고 눈빛에 집중했다. 그러다가 어떤 확신이 든 순간부터는 모니터 밖에 서 있는 지호를 바라봤다.

멀어서 선명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게 진짜니까.


“지호 씨 연기 굉장하지? 와, 나 조금 전에 소름 끼쳤다.”

“…….”

 
혜윤은 민우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저건 연기가 아니다. 진짜인 거지.


‘예쁘긴 한데 닮진 않았어요.’


‘아, 분위기가 조금 달라요?’


‘네. ……아버지가 달라서 그런가.’

 
언젠가 지호가 해 준 이야기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저 말을 할 때도 언제나처럼 차분했었지. 하긴, 늘 평온을 안고 사는 사람이니까. 그러기 위해 그가 어떤 마음을 비워내야 했을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컷! 좋아요. 와, 빈말이 아니라 진짜 좋다! 다음 씬 넘어갈게요!”

 
다른 각도에서 두 번의 촬영이 더 이어졌고 비로소 이 장면은 끝이 났다. 민우의 알림에 스태프들도 다시 새로운 촬영을 준비했고 지호도 대본을 보며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호 씨.”

“아직 안 갔어요?”

 
지호가 조금 놀란 눈으로 혜윤을 바라봤다. 옷도 안 갈아입은 걸 보니 나갔다 온 게 아니라 쭉 여기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제 가려고요. 그런데 우리요…….”

“네. 말해요.”

 
하고 싶은 말이 하기 쉬운 말은 아닌 건가 보다. 그녀는 말을 흐렸다. 그것과 달리 눈엔 확신 같은 게 반짝였고. 지호가 따뜻한 눈으로 혜윤의 머뭇거림을 응원했다.


“우리 더 많이…… 친해졌으면 좋겠어요.”

“응?”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의문 같은 웃음이 그의 입꼬리를 당겼다.


“그래서 언젠가는…… 머리를 꼭 한번 쓰다듬어주고 싶어요.”

“큭큭. 갑자기?”

“네. 지호 정말 멋지게 잘 컸구나 하면서.”

 
혜윤은 늘 진심을 전할 때만큼은 절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진심이 클수록, 보이기 부끄러운 마음일수록 더더욱. 지호 역시 이 순간 그녀의 눈에 집중했다.

뭔가 읽었다는 거구나. 연기 같지 않았다는 거지.

호기심 많은 여자가 이럴 땐 또 묻지 않는다. 그냥 옆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것처럼. 정말이지 갖고 싶다는 욕심이란 건 늘 예상보다 너무 크고, 빠르게 자라난다.


“……그래요. 아직 시간 많으니까.”

 
지호가 쏟아지려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입술을 혀로 훑었다. 그리고 까딱까딱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혜윤을 보며 그 긍정을 흉내 냈다.

정신없는 사람들 틈에서 두 사람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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