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누나 이거 꿈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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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누나 이거 꿈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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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누나 이거 꿈 아니죠?
2022.10.02.
“부산 촬영 일정이 조금 바뀌었어요. 나는 일주일 늦게 내려가는 걸로.”
긴 다리로 가볍게 세트장에 들어선 모습과 달리 지호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하기 싫은 말을 겨우 들어 올린 것 같았다.
혜윤은 오전 촬영 틈틈이 지호와 봉기, 민우가 모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표정들이 사뭇 진지해 보여서 무슨 일인지 묻진 않았다.
“아…… 저보다요?”
“네. 조금 전에 확정됐어요.”
셋이 모여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지호는 세트장 안에서 대본에 집중한 혜윤을 바라봤었다. 촬영이 시작된 후로 만날 땐 거의 온종일을 붙어 있고, 안 보는 날도 길어봤자 이틀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대본을 읽는 혜윤을 보며 걱정스러움이 밀려왔다. 걱정의 대상이 둘 중 누구인지는 헷갈렸지만.
“영화 홍보 일정이 겹쳐서. 최대한 당긴다고 했는데도 이러네.”
“음…….”
벌써 생긴 섭섭함에 혜윤의 고개도 무겁게 움직였다. 지호가 늘 잘하는 ‘그렇구나.’라든가, ‘그래요.’ 같은 담백한 대답을 하고 싶었는데 역시나 무리였다.
좀 많이 섭섭해야 말이지.
끄덕이는 고개가 고장이 난 것 같았다. 두어 번을 한참 넘겼음에도 여전히 느릿하게 움직여댔다.
“그렇게 아쉬운 티 낼 거예요?”
“네…….”
그윽함으로 가득한 눈이 장난 섞인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오히려 위로를 받는 건 지호였다. 저렇게 솔직함을 앞세우면 마음의 동요는 더욱 커진다. 더군다나 이럴 때일수록 더 또렷하게 저를 보는 눈까지 더해진다면.
이제서야 확실해진다. 못 보는 일주일이 걱정스러운 건 자기 자신이라고.
“어차피 지호 씨한테는 다 들키니까 연기 안 하려고요.”
“큭큭. 예뻐 죽겠네.”
어색한 고갯짓이 지호의 짧은 말 한마디에 뚝 끊겨버렸다. 혜윤이 훅 올라오는 감정에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까. 상대는 저리 덤덤한데 자신만 심장이 콩닥대기 시작하니 조금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거 아닌데.”
“네?”
잠시 돌아선 고개가 헷갈리는 말에 다시 그를 향했다. 다정한 빛이 여울치는 눈매가 살짝 휘는 게 참 멋져 보였다.
“이쪽도 어렵게 꺼낸 말이라고요.”
“…….”
“수십 번은 참다가 하는 말이라고.”
“으아…….”
완벽히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지호 때문에 바보 같은 감탄이 새어 나갔다. 얼마 전 민우의 메시지를 보던 지호의 눈빛, 그 글자로 읽히던 감정선. 정말 늘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걸까 싶었다.
혜윤이 근처에 놓인 손거울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마를 뚫어지게 보다가, 눈동자로 내려와 턱까지 쭉. 이 중에 하나겠지 싶으니까 하나씩 확인을 해보는 수밖에.
“지호 씨.”
“응?”
거울을 내려놓은 손이 이마를 가렸다. 자신을 부르는 작고 귀여운 목소리에, 그도 그녀의 독특한 행동을 유심히 봤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단어 한번 맞춰볼래요?”
그 황당한 해법에 지호가 조금은 크게 웃었다.
***
[얘들아, 오빠가 부산 데려다줄게. 3일 일정 빼뒀다. (오후 1:25)]
점심 도시락을 먹던 혜윤과 민주의 핸드폰에 같은 메시지가 떴다. 혜윤이 답장을 하려 젓가락을 놓자 민주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쥐여 준다.
“얘는 일을 안 해? 사장이 이렇게 며칠씩 비워도 되나?”
민주는 다시 한입을 오물거리는 혜윤을 보며 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우준의 메시지를 퉁명스럽게 훑으며 표정과 어울리는 말이 툭 나왔다. 그러자 곧장 음식을 꿀꺽 넘긴 혜윤이 반박했다.
“아니야. 그래도 우준이 엄청 인기 많아. 카페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말해 줬어. 6층 피트니스 회원이 많아져서 카페 손님이 늘어난 거라고.”
며칠 전에는 죽일 거라더니 이럴 땐 또 남동생 자랑하듯 뿌듯함이 가득한 혜윤이었다. 여전히 민주는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너희 커피 맛있다고 소문나서 그런 건 아니고? 진짜 좋은 원두만 쓰잖아. 사장이 돈 벌 생각 없어서.”
“큭큭. 그것도 맞아. 내가 먹고 싶어서.”
“어쨌든 장거리 운전해 준다니까. 상냥한 답장을 해 줘야겠군.”
민주가 안 보일 만큼 빠른 손놀림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표정은 탐탁스럽지 않았지만 우준이 제 얼굴은 볼 수 없으니 괜찮았다.
[오빠, 감사합니다. 정말 멋있으세요. (오후 1:35)]
그리고 우준 역시 쉬는 시간인지 곧장 답장을 붙였다.
[그래. 둘이 서로 나 갖겠다고 싸우지 말고. 오빠 그 꼴 못 본다. (오후 1:36)]
혜윤은 지호가 제 감정을 이마로 읽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민주의 이마에 ‘빠직’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보였으니까. 욕을 참으려는 입이 씰룩쌜룩인 게 혜윤의 웃음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냥 내가 해? 운전?”
마음에도 없는 칭찬은 하루 한 번만 가능한 건지, 민주는 결단을 내릴 모양새였다.
“응. 나도 할 수 있어. 교대로 하자.”
혜윤 역시 하루에 두 번은 과하다는 입장이었다.
***
<씬 16. 종수의 방.
희수. 책상에 엎드려 자는 종수 머리를 쓰다듬는.
종수. 천천히 고개 드는.
희수 : (따뜻하게 보는.) 난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인 줄 알았는데.
종수 : (희수를 보는. 희수가 참 예쁘단 생각이 드는. 손 잡아당기며.)
종수. 희수. 입맞춤.
희수 : (입술을 떼며. 작게 웃으며.) 이게 네 진심인 거잖아. (종수를 조금 놀리듯.) 그렇지?
종수 : (떨리는. 수줍게 보는.) 누나 이거 꿈 아니죠?
종수. 꿈에서 깨는.>
“손잡아 당기면서 둘이 포개져야 하니까 몸에 너무 힘주고 있지 마요.”
“……네.”
의자에 앉은 지호가 혜윤을 올려봤다. 대답만 잘하지 벌써 온몸에 힘을 주고 있는 게 귀여웠다. 그러고는 카메라 밖 세트장을 눈으로 쭉 둘러봤다.
모두가 정신없이 분주한 모습들. 사실 이 장면은 극에서 중요한 장면이 아니다. 하지만 모두 생각했을 것이다. 극 내부는 몰라도 외부에서 불러들일 파장 같은 것을.
뭐 하나 알려진 것 없는 유명 배우의 공개 연애, 그 연인과 함께 출연하는 드라마, 그리고 키스신. 드라마가 흥행에 실패한다 해도 이 장면은 영원히 이곳저곳을 떠돌며 재생되겠지.
다시 혜윤을 보자 대사를 외우는 입술이 작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짝 긴장한 몸을 잠시 지켜보다가 저대로 계속 두면 입술도 끝내 굳어버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더 하고 싶다고 NG 내면 안 돼요.”
“우와아아! 진짜!”
장난이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혜윤이 곧장 발끈했다. 잠시 떨림을 내려놓고 지호를 크게 노려보는 눈이 오늘따라 더 촉촉했다.
“자, 여러 말 안 할게요. 알아서 잘해 주세요!”
세트장 안의 분위기는 민우의 목청으로 한껏 달아올랐다. 모두가 말은 못 해도 오늘 출근길부터 이 장면만 고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손 당기면 다가가서 입 맞추고, 이게 네 진심인 거잖아. 그렇지? 까지.’
몇백 번을 외웠는지 모르겠다. 혜윤은 자다가도 툭 치면 ‘이게 네 진심인 거잖아. 그렇지?’가 나올 수준이었다. 이전 입맞춤 장면에서의 실수가 있으니 이번만큼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레디, 액션!”
민우의 목소리를 끝으로 세트장엔 적막만이 가득했다. 수십 개의 바늘 같은 시선이 두 사람을 찔러댔다.
혜윤은 대본대로 움직였다. 엎드려 있는 지호의 머리를 쓰다듬자 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난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인 줄 알았는데.”
상체를 세운 지호가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눈빛에 잔잔한 파도가 친다. 그리고 제 손목을 당겼다. 거기까지는 혜윤도 예상할 수 있었다.
예상 못한 건 지금부터였다. 지호가 생각보다 조금 더 세게 당기자 몸이 끌려가다시피 지호 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그게 의도된 행동이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연스럽게 혜윤을 다리에 앉혔으니까.
정말 순간적이었다. 허벅지에 앉히고, 책상 쪽으로 각도를 틀어 그녀를 몰고, 입술이 맞붙고.
그는 시작과 함께 혜윤의 입술을 거칠게 삼켰다. 놀라서 살짝 벌어진 입술 틈으로 지호의 뜨겁고 끈적한 욕망이 깊게 들어왔다.
그 생경한 자극에 혜윤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무르려 했지만, 이미 얼굴을 감싸고 있는 큰 손이 있었으니 둘 사이엔 어떤 틈도 생길 수 없었다.
질척한 소리가 진동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 가장 여리고 뜨거운 점막이 스쳐 가며 서로의 달달한 타액이 오가는 소리.
모든 것들이 너무 적나라했다.
“감독님…… 이거 못 써요.”
모두가 경악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조연출이 민우에게 속삭였다. 민우의 얼굴에도 당황스러움이 보였다.
알아서 하랬지, 잡아먹으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런데 또 애틋함이 보이니까 작품 해석과는 맞아떨어지고. 민우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선뜻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눈은 여전히 카메라 모니터에 꽂혀 있었다.
스치듯 본 스태프들은 주먹만큼 입이 벌어진 사람이 반, 그 입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사람이 반이었다.
“가뜩이나 교복까지 입고…… 수위 걸려요.”
“……응. 너무…… 굉장하네.”
안 끝날 것 같던 긴 시간은 두 사람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져 나가면서 막을 내렸다. 찐득하게 붙어 있던 두 입술이 탱글거리며 탄성 있게 떨어져 나가자 혜윤의 작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구의 타액인지도 모를 것들로 서로의 입술이 야릇하게 번들거렸다.
‘이게 네 진심인 거잖아. 그렇지? 이게 네 진심인 거잖아. 그렇지?’
아득한 정신이지만 혜윤은 악착같이 한 문장을 외우고 있었다. 이 촬영을 두 번은 할 수 없었다. 지금도 셔츠의 들썩임이 보일 정도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으니까.
“이게 네 진심인 거잖아…… 그렇지?”
그리고 제 몫을 모두 해냈다. 이제 딱 한 마디만 와주면 이 장면은 끝.
“……아, 대사를 까먹었어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믿기지 않게도 지호가 NG를 냈다. 곧장 말을 안 한다 싶더니만 그녀의 입장에서 결국 우려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지호의 말이 끝나자 숨죽였던 모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민우는 조연출과 모니터를 보고 대화했고, 스태프들은 말은 아끼려 들었지만 그들끼리 눈이 마주치면 황홀한 표정으로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
혜윤은 달뜬 호흡을 열심히 감추며, 저 멀리 이곳을 향해 오는 민주를 바라봤다. 한 손에 쥔 립밤과 브러쉬, 그 위로 먼 걸음을 단숨에 뛰어넘는 생동감. 꿈틀꿈틀, 하고 싶은 말을 꿀꺽꿀꺽 삼키는 민주의 입꼬리가 너무나 잘 보였다.
함께 걸어오는 지호의 스타일리스트도 비슷해 보였기에, 억울한 눈이 자연스럽게 지호를 향했다.
“나한테는 NG 내지 말라고 하더니…… 빨리…… 대본 봐요.”
하지만 원망 섞인 시선 위에 그의 눈길이 겹치려 들자 결국엔 고개가 폭 숙여졌다. 원망도 모두 부끄러움으로부터 나온 것이었기에.
“……누나 이거 꿈 아니죠?”
그 순간, 그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대사.
깜짝 놀란 혜윤이 파뜩 얼굴을 들었다. 지호는 민주와 스타일리스트가 가까이 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직 몇 걸음쯤은 더 와야 한다는 걸 확인한 그가, 그제야 혜윤에게 눈을 내렸다.
“설마 열 글자도 안 되는 걸 까먹었을까.”
지호가 엄지손가락으로 젖은 혜윤의 입술을 훑어주며 짓궂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