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건
(38/110)
38.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건
(38/110)
38.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건
2022.10.09.
혜윤은 얼마 전 지호와 함께 앉았던 벤치에 다시 앉았다. 향수 냄새만큼이나 모든 게 또렷해 보이는 낯선 남자와.
“실물이 훨씬 예쁘시네요.”
좋게 말하면 시원한데 조금 밉게 말하면 거친 목소리였다. 망설임이 없어서 시원했고, 배려가 옅어서 거칠었다고 할까.
“제 얼굴을 알고 계셨어요?
“요즘 작가님 얼굴 모르는 한국인도 없지 싶은데.”
“아…….”
한두 달 가지고 잊힐 만한 열애설이 아니라는 거구나. 잠시 기억 속에 예쁘게 모셔둔 지호와의 가을밤 사진이 떠올라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가 아랫입술을 가만가만 깨무는 혜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작품에 교복 입는 장면이 많아서 오늘 그 모습일 줄 알았는데. 그건 어제까지였다고 하더라고요.”
“으으, 다행이네요. 더 창피할 뻔했다.”
“설마. 되게 잘 어울렸을 것 같은데요.”
청바지 위에 연보라색 스웨트셔츠, 느슨하게 묶은 갈색 머리는 그녀를 더 유약해 보이게 했다. 그는 분명 혜윤이 자신과 동갑이라고 전해 들었음에도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교복이 정말 잘 어울렸겠구나.
“오늘 지호 선배님은 안 계시나 봐요.”
“네. 지호 씨는 촬영 없는 날.”
지호의 이름에 천진한 미소가 떠오르는 옆모습. 조금 더 지켜보다가 눈을 돌렸다.
사실 둘 사이에 꼭 나눠야 할 이야기란 건 없다. 그냥 글이 좋아서 만나고 싶었는데 좀처럼 닿을 수 없다는 것에 오기가 생겼다고 할까. 더군다나 그녀의 옆에는 늘 의식했던 지호가 있다고 하니 더더욱.
“지호 씨가 선배인가 봐요.”
“네. 제가 나이 많은 후배죠. 저 같은 후배들 많을 거예요. 데뷔가 빠른 편이시니까.”
“…….”
“데뷔도 빠르고, 단번에 정상에 올랐고. 이젠 하늘이 뭐예요, 우주도 뚫을 것 같고…… 뭐든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 같아요. 거기에 운까지 완벽하시니.”
도혁의 마음 어딘가에 쓴맛이 퍼졌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맛. 그 속이 보일 만큼 쌉싸래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혜윤을 자각했다. 서둘러 입매를 고치고 옆을 보자 그녀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건방졌네요.”
“……아니에요.”
당황스러움에 몸을 움찔거리며 예의를 갖추려는데 조금 이상했다. 실은 하나씩 따지고 들면 다 이상한 것 같았다. 곧 울 건가 싶을 정도로 물기가 촉촉한 갈색 눈동자도, 제 무례함을 가만히 지켜보며 짓는 미소도.
다른 주제로 돌리지 않으면 계속 쳐다볼까 싶어 그는 서둘러 생각나는 말을 던졌다.
“사실 김 PD님께서 저한테 제일 먼저 시나리오를 주셨다는데 늦게 읽어버렸어요. 그래서 너무 아쉽더라고요.”
“그렇구나…….”
혜윤은 작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움직였다. 여전히 시선은 도혁을 향해 있었다.
“제가 조금 빨리 봤다면 결과가 달라졌으려나 싶기도 한데. 뭐, 또 상대가 지호 선배님이면 달라지지 않았겠지 싶기도 하고…….”
“음…….”
여전히 그녀는 같은 반응이었다. 부드럽지만 멈춤 없이 그의 옆얼굴을 훑었고 귀 기울여 듣고 있다는 듯한 끄덕임. 제 온몸으로 쏟아지는 몰입. 도혁은 슬슬 당황스러웠다.
“혹시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그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 혜윤을 쳐다봤다. 연기가 직업인데도 덤덤한 척하는 게 힘들었다.
“음, 아니요.”
그리고 자신은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덤덤함을 혜윤은 깔고 앉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거기에 싱긋 웃기까지. 그 웃음에 어이없게도 심박이 빨라졌다면 착각이겠지.
도혁이 먼저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자 혜윤도 이제야 비슷하게 움직인다. 입가에는 여전히 옅은 웃음이 남아 있었다. 사실 혜윤이 도혁을 보며 웃은 이유는 하나였다.
너무 쉽게 잘 읽혀서.
‘동경 가득, 질투 한 줌, 시기 다섯 톨?’
상대가 지호일 때에만 꽤 많이 어려웠던 거지, 본래 혜윤도 타인의 마음 읽기엔 능했다. 요즘은 거의 지호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기에 늘 부끄러운 미로 속에 갇혀 있던 터.
이렇게 탁 트인 운동장 같은 속내라니. 반가웠다. 그리고 잘 보이는 마음 중에는 자신의 글이 좋았다는 게 진심으로 읽혀서 고맙기도 했고.
“맞다,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제가 다음 작품 계획이 없어서 그랬어요.”
도혁의 속내 파악이 완벽히 끝나자 혜윤이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와줬는데 그가 바라는 대답을 못 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었다.
“대충 듣기는 했어요. 그렇지만 꼭 작가로는 아니더라도 배우로 만날 수도 있겠죠.”
“에이, 그건 정말 전혀요. 이게 끝이라.”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건데.”
말로는 부족한지 혜윤이 고개를 좌우로 휘휘 저었다. 그리고 도혁은 그 움직임이 우연히 자신의 시선과 겹쳐지길 바랐다. 그대로 되자 완벽히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고.
“번호 물어보면 실례인가요?”
그가 오늘 온 목적 중에 제일 큰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엔 눈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혜윤이 이렇게 쉽게 피해버릴 줄 몰랐지만.
빤히 볼 땐 언제고, 제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빈말만큼 빈 마음이나 행동도 안 보이겠다 이건가.
살면서 처음 보는 유형의 여자 같았다.
“예의상 교환하고 연락 무시해도 될 텐데.”
“……그게 더 예의 없는 것 같아서요.”
“아…….”
거침없이 말을 잇던 그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나왔다. 기묘한 경이로움에 좁혀드는 미간 역시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촉촉한 눈이 엄청 어리고 여려 보이는데 그 눈으로 사람을 놀랍도록 잘 쳐다본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데 그 말이 톡 쏘기는커녕 부들부들하다. 무슨 말만 하면 깊이 보고, 깊게 듣고, 살며시 웃어준다.
신기해서 그런가, 진짜 더 알고 싶어졌다.
“혹시…… 어차피 건방진 모습 보인 거…… 그냥 궁금한 거 하나 더 물어봐도 돼요?”
계속 시원하게 말하던 그가 처음으로 더딘 말을 붙였다.
“네. 괜찮아요.”
혜윤이 도혁을 바라봤다.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질문에 대한 대답 정도가 전부일 것 같았다. 오늘도, 앞으로도.
“진짜 지호 선배님이랑 사귀는 거 맞아요?”
“네?”
그리고 공격이란 건 항상 상대를 다 파악했다고 방심한 순간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놀라서 커진 눈이 그를 바라보는데 그는 말을 하기 바쁜지 땅을 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사실 여기 사정이야 다 아니까요. 열애설이 터진 것도 아니고 아예 인정하면서 시작한 걸 보면 사전에 조율을 했다는 거고.”
“…….”
“그리고…… 김 PD님이 그러셨잖아요. 시나리오는 나한테 먼저 줬었다고. 그거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연인이라고 기사가 난 것도…….”
입속에서 말끝을 굴리던 그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만 혜윤의 눈은 이미 원래의 크기로 돌아와 있었고 조금 진지하게 그를 보는 중이었다.
“너무 빠르죠.”
둘의 시선이 서로에게 꽂혔다.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진 건 도혁이었으니 그걸 받아들일 눈은 혜윤이건만.
“와…… 너무 낯선 눈빛이라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의외로 도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렇게 집중해서 쳐다보는데 안 흔들릴 남자가 있을까. 자신이 질문을 해놓고 도리어 대답을 하는 그는, 스스로가 황당했고.
“저도 그래서 보는 거예요. 너무 낯선 질문이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흔들리는 눈빛까지 모두 지켜본 혜윤이 그를 달래는 우스운 상황이었다.
“도혁아!”
그때 멀리 차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도혁을 부르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시간을 자꾸 강조하는 게 어서 대화를 끝내라는 눈치였다.
“아, 너무 아쉽네. 그래도 금방 또 보면 되니까.”
“저를요?”
“네. 부산 촬영 있는 거 들었거든요. 저희도 부산 무대인사가 있으니까. 그날도…… 지호 선배님 없었으면 좋겠다.”
그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몸을 무겁게 일으켰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오늘 처음 본 혜윤처럼 진심만 말해봤다. 그를 따라 혜윤도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세웠다.
바지를 툭툭 터는 그녀를 보다가 도혁이 말을 한마디 더 보탠다. 뭐든 깊이 살펴보는 눈이었으니, 이 마음도 좀 알아봐달라고.
“그냥 우연인 척 갈까 하다가 말한 거예요. 이렇게 알려드리면 그사이에 제 생각 한 번은 할 것 같아서.”
그의 말에 혜윤이 얼굴에 힘을 줬다. 콧등에도 작은 주름이 잡히는 게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한 번이라니. 저런 질문을 놓고 가면서.
“아마 여러 번 할 것 같은데요.”
“그럼 너무 좋고요. 그래도 번호 안 알려주실 거잖아요.”
“네.”
“우와, 진짜 단호하시다.”
도혁이 따끔거리는 마음을 숨기려 괜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혜윤도 비슷하게 그 표정을 흉내 냈다. 먼발치에서 그를 향한 손짓이 더 빨라지고 있었다.
“그럼 아까 질문한 건 부산에서 들을게요. 그땐 시간 많을 거예요.”
“……네.”
“사실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별 상관없었는데. 지금은 제가 생각하는 답이 맞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함께 차 앞까지 걸음을 옮기고 가벼운 인사로 둘의 첫 만남은 끝났다. 차가 움직이자 혜윤은 금세 뒤돌았지만, 사이드미러 속 그녀의 모습이 먼지만 한 점이 될 때까지 도혁은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보니까 속이 좀 시원해?”
그의 차 안. 매니저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를 훑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냐고 들들 볶아서 겨우 데리고 왔건만. 올 때는 들떠 있던 표정이 돌아가는 차 안에선 흔적도 없다.
“아니…… 오히려 답답해.”
건조해 보이는 턱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는 그의 눈동자가 탁했다. 멍해 보이기도 하고.
“거봐. 별거 없지? 안지호 후광인 거지 그냥 신인 작가일 뿐이라니까. 이상한 거에 꽂혀서는. 필력 센 기성 작가들 널렸어.”
매니저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빈정거리는 입꼬리가 한쪽만 쑥 올라갔다.
“그게 아니라 너무…… 기대 이상이라.”
“뭐?”
매니저가 룸미러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기대 이상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표정은 단단히 만족스럽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번호 안 알려주실 거잖아요.’
‘네.’
뭐 그렇게 단칼에. 마냥 여려 보이는 데도 아닌 건 절대 아닌 거라 이거지. 조금의 여지도 주기 싫다는 거고. 참 나.
“형, 나 오늘 좀…… 못생겼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도혁은 기억을 더듬어봤다. 자신도 나름 외모로 알려진 배우였으니 어디를 가도 제일 먼저 듣는 소리는 단연 ‘잘생겼어요.’였다. 그런데 오늘 혜윤은 그런 인사치레는커녕, 듣기 좋은 말 한마디를 해 준 적이 없으니.
아, 하다못해 이름도 불러준 적이 없구나.
이것도 빈말, 빈 마음은 안 보이겠다는 연장선인가.
“……승부욕 건드리네.”
툭. 툭. 그의 손가락이 옆자리에 놓인 <23센티미터> 시나리오를 건드렸다. 정확히는 표지 위에 새겨진 혜윤의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