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온종일 함께한 하루
(39/110)
39. 온종일 함께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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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온종일 함께한 하루
2022.10.12.
[집 비밀번호는 전에 나 줬던 젤리값. (오전 1:27)]
며칠 전 그가 준 힌트대로 혜윤이 도어락 비밀번호를 가볍게 눌렀다. 여러 번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올라온 최종 목적지치고는 참 귀여운 비밀번호. ‘0100’ 네 자리 뒤에 별을 누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의 성벽이 열린다.
오라고는 했지만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서려니 발걸음만큼 마음도 머뭇거렸다. 제일 높은 층에 자리한 집답게 현관부터 꽤나 넓은 지호의 집. 다시 잠기는 문소리를 뒤로하고 느린 걸음을 걷던 혜윤이 신발을 벗으려던 때였다.
“응?”
현관 중문, 제 눈높이와 얼추 비슷한 곳에 종이 한 장이 눈에 띄게 붙어 있었다. 어설프게 다 벗지 못한 운동화를 꾸겨 신고 문에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번져가는 것도 금방이었다.
집 구조를 간단하게 그려둔 약도.
[입구(지금 여기). 거실. 다이닝룸. 주방. 서재. 침실. 옷방1. 옷방2. 빈방. 화장실1. 화장실2.]
어린아이가 봐도 알 법한 간단한 단어들이 그의 외모처럼 단정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특히 별표가 쳐진 다이닝룸과 서재는 약도 밑에 짧은 메모도 함께였다.
[다이닝룸에 음식 꼭 챙겨 먹어요. 책, 대본 같은 볼거리는 서재에.]
“누가 보면 아이 놀러 온 줄 알겠네.”
종이를 떼는 작은 손끝에도 행복이 물든 듯 붉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었기에 혜윤은 굳이 웃음을 참지 않고 중문을 열었다.
그러자 현관에서 나던 은은한 향기가 온몸으로 더 깊게 쏟아졌다. 단 한 사람을 떠올리게 만드는 향. 이름을 부르면 꼭 그가 나올 것 같았다.
“와…… 여전히 멋지다.”
복도를 쭉 따라간 끝에 보이는 거실. 그날 아침에 보았던 눈부시고 황홀한 절경은 여전했다. 단지 뒤를 돌았을 때 지호가 없다는 게 많이 아쉬웠지만.
혜윤은 한참 동안 서서 창밖을 봤다. 그러다 한 손에 쥐어진 약도를 따라 뒤편에 자리한 다이닝룸으로 걸어갔다.
넓은 식탁 위에 몇 개의 빵과 과자들이 놓여 있었다. 크림치즈가 먹음직스럽게 발린 베이글과 싱싱한 야채의 색이 선명한 크루아상 샌드위치, 먹기 좋게 잘라둔 호밀빵과 무화과잼. 아침에 사 온 것이 틀림없었다.
‘잠잘 시간도 부족할 텐데…….’
하지만 고마움과 미안함이 커질 무렵, 식탁에 붙여진 작은 포스트잇은 그 마음을 뚝 잘라버린다. 그런 감정을 느끼라고 준 게 아니라는 듯이.
[주스, 우유는 냉장고에. 커피머신은 왼쪽.]
“으으, 내가 누나거든요? 진짜 아기인 줄 아나.”
결국 그 작은 포스트잇으로 그가 전해 준 제일 큰 감정은, 역시나 행복이었다. 칭얼거리는 말투였지만 짧은 글을 바라보는 혜윤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잠시 약도와 가방을 식탁에 올려두고 핸드폰을 쥐었다.
[지호 씨, 지금 집에 왔어요. 그런데 저 아기 아니에요. 이렇게 챙겨주지 않아도 돼요. (오후 3:30)]
그 뒤 입고 온 코트를 식탁 의자에 걸어뒀다. 그가 정성껏 준비해 준 베이글을 일단 한입 베어먹고 냉장고와 주방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커피머신 쪽으로 걸어갔다.
“음…… 우리 집 기계랑 조금 다르구나.”
여러 종류의 캡슐이 바로 옆에 놓여 있었기에 그중 하나를 고르기는 했지만 사용하던 것과는 다른 것 같아 요리조리 둘러보았다. 그래봤자 가정용 기계였으니 10분만 있어도 사용법은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하지만 핸드폰 알림 소리는 그런 고민 근처에도 못 가게 했고.
[커피 캡슐은 포터필터 빼서 정방향으로 넣어요. 이걸 빼먹었네. (오후 3:35)]
“으앗!”
메시지를 읽자마자 혜윤이 한껏 놀란 소리를 냈다. 답장을 보내는 손가락과 함께 두 눈은 집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지호 씨 향이 엄청 진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나와요. 여기 있는 거 다 아니까. (오후 3:38)]
‘CCTV가 있나?’
천장도 한 번씩 훑어보는데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다시 촬영 시작. 편하게 쉬어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오후 3:39)]
역시나 바쁘구나.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장을 대신했다.
혜윤이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식탁 위에 동화책을 꺼냈다. 어제 출간한 <선인장과 친구들>은 베스트셀러에 씩씩하게 올라 있으니 서점에서 찾기 어렵지 않았다.
[지호 씨가 지켜준 아이들. 고마워요. 장혜윤 드림.]
깨끗한 첫 장에 진심을 꾹꾹 눌러 적었다. 제 이름을 적어서 주는 책 선물은 그녀에게도 처음인 일이었다.
‘어디에 놔두는 게 좋을까?’
거실 테이블, 식탁, 서재 책상. 가장 적합한 후보군은 이 세 가지였지만 그녀는 망설이다가 조금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침실에 놔주기로. 행복한 엔딩이 있는 이야기였으니 잠들기 전에 봤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달칵-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큰 결심으로 돌리자, 그의 향이 어마어마했다. 진짜 여기 숨어 있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기억엔 거의 없지만 언젠가 혜윤도 하룻밤을 쉬어갔던 곳.
그리고 침대로 시선을 옮긴 혜윤은 놀라움에 입이 벌어졌다.
“이게 어떻게…….”
침대 위에 이미 놓여 있는 <선인장과 친구들>.
그녀는 홀린 사람처럼 다가갔다. 여기저기 보아도 자신의 책이 맞았다. 어제 출간했고 오늘 새벽부터 일하러 나갔을 테니까, 출간 당일에 산 게 분명했다.
세상에. 선물하고 싶어서 꼭꼭 숨기고 있었는데.
혜윤은 손에 쥔 새 책을 내려놓고 침대 위에 올려진 지호의 책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놀라움 같은 행복만 주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부분부분 모서리를 접어둔 페이지가 두 장. 그 두 장에 적힌 문장들은 모두 혜윤이 이 책에서 가장 흡족한 마음으로 써 내려간 것들이었다.
손끝으로 접힌 책장을 소중하게 만져보았다. 어떤 마음으로 이 종이의 끝을 접었을까. 그의 마음을 만져보고 싶다는 듯이.
선물을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받을 줄이야. 부끄럽지만 울컥했다. 혜윤이 첫 장에 적어둔 메모 밑에 짧은 첨언을 적었다.
[추신. 지호 씨가 산 책은 제 선물로 가져갈게요. 감동받았어요.]
더 있다간 한없이 있을 것 같아서 그녀는 방을 나왔다.
“볼일은 이제 끝났고. 음…….”
벌써 집으로 돌아가자니 많이 아쉬웠다. 혜윤은 다시 식탁으로 돌아가 그가 그려준 약도를 쥐고 나머지 별표 하나가 그려진 곳으로 향했다. 본 김에 크루아상 샌드위치 반 개도 입에 문 채로.
그의 작업실 겸 서재.
문을 열자 한쪽 벽면은 온통 책장이고 반대편은 트로피가 잔뜩 놓인 수납장이었다.
책장에는 주로 대본과 시나리오가 빼곡했다. 간간이 놓인 소설책들과 원서, 구석에 졸업앨범.
“어? 대박.”
시간은 많고 눈치 볼 사람은 없고. 혜윤은 바닥에 앉아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사진 속 한명 한명을 세세히 가렸다. 그렇게 40분이 지나자.
“진짜…… 대박이다…….”
찾아내서 놀란 게 아니라 그 사진 속 외모에 놀라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앳되고 맑은 지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문득 촬영 첫날 보았던 그의 교복 입은 모습이 떠올랐다.
‘지호 씨는 정말…… 고등학생 같지 않은데요.’
‘진짜? 나 예전에 교복 모델도 했었는데. 그렇게 별로인가?’
‘……이렇게 잘생긴 고등학생이 어디 있어요. 말도 안 돼.’
아니구나. 진짜 있었구나.
눈을 감아도 그려질 만큼 지긋이 보던 혜윤은 기분 좋게 졸업앨범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맞은편 수납장에 가득 자리한 트로피들을 가볍게 훑었다.
그 가벼운 마음은 금빛과 크리스털의 휘황찬란함 사이에 놓인 빛바랜 액자를 볼 때야 비로소 무거워질 수 있었다.
“아빠 많이 닮았구나…….”
작은 사진 속엔 그의 아버지가 이제 막 초등학생티가 날 법한 어린 지호를 안고 있었다. 둘이 누가 더 행복한지 겨루기라도 하는 것처럼 활짝 웃은 채로.
“너무 예쁘네.”
엄지손가락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살짝 문질러봤다. 애틋함이 손끝에 옮아 붙은 듯이 마음이 일렁였다.
이 방도 한쪽 벽면은 온통 유리창이었다. 서재에서만 잠깐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느덧 강 위로 붉게 석양이 내리는 게 보였다. 이 집에서 처음 보는 빛의 색깔. 아쉬움을 알리는 색.
혜윤은 어쩐지 슬픈 아이의 눈두덩이를 떠올렸다. 그 붉은 한강과 겹쳐지는 조금 전 어린 지호의 해맑은 얼굴.
조금 더 강물을 보다가 서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집을 나오기 전, 제일 마지막으로 한 건 숨을 가득 들이쉬는 것이었다. 지호의 향. 때론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게 더 선명한 법이니까.
그래서 오늘 온종일 함께 있었다고 믿기로 했다.
***
집에 도착한 뒤에도 그녀는 바빴다. 새로 나온 책의 반응과 나란히 자리한 이웃 동화책들을 읽다 보니 시간이 빨랐다. 틈틈이 생각나는 아이디어까지 더해지자 벌써 자정이 넘어버린 시간.
띠리링-
옆에 놓인 핸드폰 알림 소리에 화면을 만졌다. 도착한 건 익숙하고 생뚱맞은 <선인장과 친구들> 속 토끼 그림. 반가운 이름으로부터.
[누구 닮은 것 같아서. (오전 12:32)]
그리고 작은 행복을 누릴 틈도 없이 빠르게 메시지가 하나 더 따라붙는다.
[선물 고마워요. 나도 감동. (오전 12:32)]
조금 더 큰 행복을 안겨주려는 그의 진심. 혜윤도 팔을 쭉 뻗어 동화책을 쥐었다. 사각. 사각. 손끝까지 자르르 번진 설렘 때문인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마저 나비의 날갯짓처럼 보드라웠다.
찰칵-
[그렇죠? 누구 닮았어요. 듬직하고. (오전 12:35)]
화면 제일 아래에 점잖게 등장한 동화책 속 늑대 그림. 혜윤은 배시시 웃음이 났다. 겨울이 코앞인 한 밤인데도 춥지 않은 것 같았다.
꼭 이 방에 혼자 있는 게 아닌 것도 같았고. 또 답장이 오려나 싶은 순간에, 그는 항상 그랬듯이 기대보다 많은 걸 준다.
Rrrr- Rrrr-
수신화면에 뜬 지호의 이름. 조금 뜸을 들이다 받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서.
“……네.”
-안 잤나 보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조금 더 그를 그립게 했다.
“이제 집에 왔어요? 피곤하겠다.”
-괜찮아요. 집 구경은 잘했어요? 왔다 간 흔적도 없던데.
“네. 한강도 보고…… 지호 씨 졸업앨범도 보고?”
혜윤은 말을 하지 말까 하다가 그냥 솔직해지기로 했다. 당사자를 상대로 이런 말 하는 게 재밌지만, 부푼 마음을 자랑하고 싶었다.
-아, 진짜? 사진이 잘 나왔었나…… 기억도 안 난다.
“네! 엄청! 그렇게 잘생긴 고등학생 처음 봤어요!”
-큭큭. 그 정도였을 리가.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주는 웃음은 듣기 좋았다.
-……다음에는 나 있을 때도 와요. 오늘 못 챙겨준 것까지 잘해 줄 테니까.
그리고 몰래 바라기도 부끄러웠던 마음을 당연하다는 듯이 보태주는 건 더욱.
그렇게 30분 정도의 통화는 서로에게 밤도, 피로도 잊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