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 진심 (41/110)


41. 진심
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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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그러운 척해서 점수 좀 따려 했는데…….”

 
지호는 손을 시작으로 온몸이 꽁꽁 얼어버린 혜윤을 알아채지 못했다. 4개의 문장에 꽂혀 자신이 어떤 말을, 어떤 진심을 입 밖에 내보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기에. 그러는 사이 혜윤은 서서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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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겠다. 그날 둘이 무슨 얘기 했어요?”

 
그의 눈가에 서려 있는 겸연쩍은 웃음기. 혜윤은 짧지만 그 눈을 찌르듯이 바라봤다. 그러자 가슴속에 짓궂은 기쁨이 피어나는 건 참 쉬웠다.

질투로부터 자라난 호기심.

그녀가 언젠가 전지나라는 이름 앞에서 느꼈던 감정이 지호에게도 비쳤다. 그 속내가 정확히 파악되자 지호보다 조금 더 씨익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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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길게 늘어난 말꼬리 뒤로 살그머니 올라선 입꼬리. 그 뒤를 장난기가 쫄래쫄래 따라붙는, 감정의 기차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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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혜윤의 무구한 표정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대뜸 제 다리 위에 있는 이불을 지호에게 건넸다.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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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불 덮고 누워요. 눈 감으면 말해 줄게요.”

 
항상 눈치 싸움의 패자는 더 아쉬운 사람인 법이니까, 지금 이 순간의 승자는 당연히 혜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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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잠 다 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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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요.”

 
화가 잠시 잠을 이긴 것일 뿐, 금세 피곤이 몰려올 게 뻔하다. 그래서 혜윤은 조금 더 세게 제 허벅지를 탕탕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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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얼른.”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호의 눈가가 자연스럽게 접혔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을 덮고 혜윤의 다리에 머리를 댔다. 그러자 혜윤이 준비해둔 손수건을 그의 눈가에 올린다.

그의 도움 없이 그녀가 줄 수 있는 한낮의 밤이 완성되었다.

혜윤은 완전한 암흑을 위해 그 손수건 위에 손을 얹으려다 멈칫했다. 그날, 똑같이 자신의 단잠을 바라며 했을 그의 손짓이 떠올랐기에. 지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바람처럼 쓰다듬어준 기억.

그 꿈으로 빨려들 것 같은 기분.

눈가를 덮으려던 작은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살금살금 빗겼다. 손끝에 아롱아롱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하나의 손으로 어루만지는 혜윤이 저런 감정을 느꼈으니, 수만 개의 머리카락으로 받아내는 지호는 오죽했을까.

지호의 입가에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행복 같은 게 번져갔다. 그 미소를 보던 혜윤도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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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이야기한 거 없어요. 작품이 좋았다고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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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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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 씨가 선배라고도 말해 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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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리고?”

 
느릿한 손가락을 따라 하는지 혜윤의 말이 느리게 멈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락처를 물은 것도 말을 해야 하나 싶어서.

안 좋아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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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지 말고 말해요. 괜찮으니까.”

 
그 조용한 고민을 지호는 보지 않고도 다독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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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번호를 물어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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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알려줬고?”

 
물론 그 다독임이 오래가진 못했다. 잘근 씹어버리고는 빠르게 놓아줬지만 여전히 어색하게 벌어진 두 입술. 혜윤은 모난 감정을 억누르려는 그의 단정한 입매를 자세히 바라봤다.

아, 예뻐라.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대로 얌전히 있는 모습까지 착해 보였다. 그래서 조금 장난을 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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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한 글자짜리 대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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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낮잠 다 잤네.”

 
제 감정을 누르느라 늘 읽기 쉬웠던 혜윤의 농담을 놓쳐버린 그였다. 긴 탄식 끝에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그를 감정 끝으로 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 혜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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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큭. 장난이에요. 연락은 불편하다고 거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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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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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 씨가 전에 싫어했잖아요. 지호 씨 싫은 거면 나도 별로니까.”

 
작은 속삭임에 웃음을 보태며 그녀의 손이 여전히 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런데 곧잘 대답하던 지호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느 틈에 닫힌 건지, 꾹 다물린 그의 입술도 단단히 굳어 보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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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답이 없지? ……혹시 화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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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 친구는 오늘까지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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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장난친 건데. 미안해요.”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없이 진지했다. 혜윤은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 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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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제 머리를 건드리지 않는 손을 모를 수가 없었다. 지호가 그녀의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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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 씨가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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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짜 인내심이 바닥이라. 둘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리고, 날것 같은 진심을 그대로 입 밖에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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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같이 자고 싶다는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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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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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난 장난이 아니라.”

 
깃털을 다루듯 얌전히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과 나긋한 속삭임. 순진한 장난기가 가득 배인 작은 웃음소리. 코앞에서 훅훅 파도처럼 너울거리며 제 안으로 들어오는 혜윤의 향기.

여러모로 한계치였다.

지금껏 스스로가 이런 충동을 갖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더는 모른 척할 수 없는 욕망과 안 봐도 훤히 알 것 같은 그녀의 표정이 겹쳐지며 씁쓸한 감정이 그의 입꼬리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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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늘까지는 낮잠 친구니까. 하던 거 계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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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를 했었더라. 내,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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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큭. 머리 쓰다듬어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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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혜윤이 다시 어색하게 손을 움직였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그리고 지호의 얼굴을 내려봤다.

어리지도 않으니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은 모르기 싫기도 했고.

그의 눈을 가려둔 게 정말 다행이지 싶었다. 지금 이 부끄러움을 감추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 더욱이 이 순간, 가슴 한가운데 자리한 남자를 시선 한가운데에도 놓을 수 있다는 것. 제법 오랫동안.

제 얼굴 위로 켜켜이 쌓여가는 마음을 알 리 없는 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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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고마워요. 그 와중에 내 생각까지 해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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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그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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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없어요? 저게 다인가.”

 
지호는 꾸밈없는 본심을 내뱉은 뒤에도 자연스럽게 이전의 대화를 이었다. 그래서 혜윤도 어색함 없이 그를 따라갔다. 하지만 서로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주고받은 낯선 진심 같은 것을.

그는 정확히 건넸고, 그녀는 말없이 받았으니까.

혜윤이 다시 도혁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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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부산에 올 거라고 했어요. 그때 다시 보자고…….”

 
그리고 말끝을 채 맺기도 전에 지호의 손이 손수건을 빠르게 걷어버린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빛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혜윤은 그의 행동에 놀라 서둘러 제 손으로 작은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조금 전 대화 탓인지 신경질적으로 사납게 구겨진 미간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 이상야릇한 기분에 혜윤이 눈을 살짝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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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온다는데?”

 
또한 감정의 온도만큼 땅 밑으로 깊게 잠긴 목소리까지 더해지자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남자의 향이 농후했다. 애써 이상한 마음을 누른 혜윤이 차분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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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언제 오든 잠깐 왔다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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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에 나 없잖아.”

 
이미 빛에 적응한 눈이었지만 그의 미간은 여전히 거친 기운을 내보이고 있었다. 혜윤은 그 얼굴을 보다가 계속 두면 안 되겠지 싶었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생각에 날이 바짝 선 것 같았다.

잠을 재우려고 했는데, 잔뜩 깨워놓기만 한 것 같아 조금 아쉽기도 했고. 혜윤이 양손으로 그의 눈가를 살포시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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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요. 지호 씨 없을 때 와도 혼자 잘 대처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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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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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차도혁 씨도…… 잘은 모르지만 좋은 사람 같았어요.”

 
고운 말들이 그의 눈가에 내려앉자 지호의 손이 손수건처럼 그녀의 손 또한 걷어낸다. 걷어낸다기보다는 옆에 모셔두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지만 이어지는 말투는 조금 냉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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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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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지호가 혜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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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눈으로 온 세상을 보는데 내가 걱정이 안 되겠어요?”

 
날카로운 감정은 제 몫이고, 그녀에게 건네는 시선은 언제나처럼 다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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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또 동화 작가라고 놀리는 거예요?”

 
그가 익숙한 다정함을 보이자 혜윤도 긴장이 풀린 듯 아이 같은 얼굴빛을 보였다. 하지만 해맑은 감정이 유지되는 건 그리 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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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리는 게 아니라…… 내 눈에만 예쁘겠냐고. 사람 보는 눈 다 거기서 거긴데.”

 
말을 하면서도 그 장면을 상상하는지 지호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 혜윤은 점점 달아오르는 얼굴 때문에 이젠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밤을 만들어줘야만 했다.

지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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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냥 눈 감아요! 진짜 낮잠 친구 오늘까지만 해야겠네!”

 
재빠르게 그의 손에 쥐어진 손수건을 뺏고는 지호의 눈을 가려버렸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이 얼마나 오랫동안 붉었는지 그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손수건 밖에 있는 지호의 입가는 여전히 언짢다는 듯 굳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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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티켓 오픈한다고 하지 않았어?”

 
다음 인터뷰를 위해 이동 중인 도혁은 문득 중요한 기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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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쉽지만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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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차라리 쭉 잊고 있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작이 자신의 영화까지 3개였지만 누구의 영화가 1위를 했을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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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태어난 거 빼고는 뭐 하나 앞설 수 없다는 건가.’

 
도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본인도 넘치도록 가진 삶이라는 것을. 하지만 유독 한 사람을 상대로 오랫동안, 지겹도록 자주 비교된다면 모두 나 같지 않겠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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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진짜 그 역할 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누가 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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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호.’

 
그리고 그 한 사람과의 경쟁에서 매번 밀려난다면. 어디서든, 언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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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광고 재계약 안 하는 거야 할 수 없지. 누구로 바뀌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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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호로 간다나 봐. 그런데 본전 뽑을 수 있겠어? 그렇게 세게 부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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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얼마길래. 우리랑 많이 차이 나? 배로 차이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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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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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난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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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의 배 수준이지.’

 
어디에서도 드러낸 적 없었다. 늘 당당한 척, 아쉬운 것 없는 척. 그게 있어 보이니까. 하지만 낮 동안 부풀렸던 몸집을 침대에 누일 때면, 항상 머리를 짓누르는 생각은 단 하나로 좁혀졌다.

내가 그렇게 별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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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까봐야 아는 거 알지? 사전 예매는 신경 쓰지 마.”

 
그의 매니저가 룸미러를 힐끔거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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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뒷심이 중요한 거다. 시작보단 마지막에 누가 이기느냐.”

 
도혁은 입 안에 진동하는 비린 맛을 훔쳐내 보려 혀로 치아를 쭉 훑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핸드폰 속 새 메시지에 꽂힌다. 지금 막 민우에게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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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혁 씨, 오늘 간식 도시락 고마워요. 참, 장 작가도 고맙게 잘 먹었다고 꼭 전해달래요. 그럼 또 연락합시다. 영화 개봉하면 보러 갈게요. (오후 6:35)]

 
메시지를 보고 있으니 물 흐르듯 혜윤이 떠올랐다.

참 깊게도 자신을 들여다보던 갈색 눈동자가 창가에 어른거린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제게 쏟아지던 그녀의 집중, 그 끝에 미소. 꾀죄죄하고 쪽팔리는 본심마저도 별것 아니라는 듯이.

두근거렸던 것도 착각이고, 내 마음을 다 알아줄 것 같다는 것도 착각이라면. 아니, 착각이라도.

그의 손이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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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PD님, 메시지 보고 연락드려요. 그런데 부산 촬영 때 지호 선배님은 항상 있나요? 그쪽도 홍보하느라 바쁠 텐데.”

 
꼭 한번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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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음 주는 촬영을 빼셨구나.”

 
내가 그렇게 별로인가?

나를 그렇게나 깊게 들여다보던 당신 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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