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 행복한 상상 (44/110)


44. 행복한 상상
2022.10.30.


16671352485715.jpg

 

16671352485724.jpg

[집 앞이에요. 천천히 나와요. (오후 8:05)]

 
혜윤은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또각. 또각. 힐이 바닥에 닿으며 산뜻한 소리를 냈다. 이 소리가 멈출 때면 눈앞에 지호가 있을 거란 생각만으로도 가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차에 가까워질 무렵, 지호는 창문 너머의 혜윤을 눈으로 어루만졌다. 곱게 찰랑이는 머릿결 아래로 카멜색상의 롱코트와 새하얀 니트, 같은 색의 바지.
 

16671352485724.jpg

‘너무 예쁘게 하고 나왔네.’

 
혜윤의 발소리처럼 지호의 가슴도 잠잠하게 뛰었다.

탁-

차 문을 열자 작은 공간 안에 서로의 체향이 감미롭게 섞여든다.
 

16671352485736.jpg

“……왜요?”

 
혜윤이 자신을 바라보는 지호에게 부끄러운 의문을 던졌다. 짧은 인사도 없이 지긋이도 보는 눈이 온온했다.
 

16671352485724.jpg

“그냥…… 이따가 영화가 눈에 들어오려나 싶어서.”

 
지호가 고개를 돌리며 차를 움직였다. 입가에 번져 있는 미소가 참 근사했다. 그가 운전에 집중하자 이제야 제 차례라는 듯이 혜윤이 그를 감상했다. 지호의 의상은 자신과는 정반대로 하나같이 어둡고 무거운 색이었다.

그렇지만 그래서 더 빛났다. 어둠이 있어야 빛은 더 눈부시니까.

정말이지 멋있는 남자와 함께 있다는 자각이 급작스럽게 그녀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그래서 얼른 시선을 도시락으로 낮췄다. 포크를 쥐는 손끝에도 설렘이 묻어났다.
 

16671352485736.jpg

“노력은 했는데 맛은 잘 모르겠어요.”

16671352485724.jpg

“……오, 맛있겠다.”

 
지호는 잠시 도시락을 힐끔댔다. 두 개의 도시락 안에 스프링롤과 주먹밥이 들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동글동글 귀엽고 작았다. 50개는 먹어야 배가 차려나 싶을 정도로 많이.

주먹밥에 이름을 못 쓰니까 자기처럼 만들었구나.

지호가 슬며시 피어나는 미소를 참지 않았다.
 

16671352485736.jpg

“일 끝나자마자 온 거예요?”

16671352485724.jpg

“네. 그래서 메이크업도 제대로 못 지웠네.”

 
작게 잘라놓은 스프링롤을 포크로 찍어 손에 쥐여주려다 주춤. 혜윤은 그의 입가로 얌전히 가져가 봤다. 입만 살짝 벌리길래 쏙 넣어주자 맛있게 꼭꼭 씹는 것 같아서 흐뭇했다.
 

16671352485736.jpg

“전에도 느꼈는데요. 지호 씨는 꾸민 모습이랑 안 꾸민 모습이랑 느낌이 엄청 달라요.”

16671352485724.jpg

“진짜? 촬영장에서는 너무 후줄근했나?”

 
작디작은 음식을 꿀꺽 삼키며 지호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16671352485736.jpg

“아니요. 안 꾸민 모습은 정말 정말 멋있거든요? 그런데 꾸미면, 음…….”

16671352485724.jpg

“아, 반대예요? 손대면 이상한가 보다.”

16671352485736.jpg

“아니요. 꾸미면 뭐랄까…… 진짜 진짜 멋있는 것 같아요.”

 
차이가 없는 것 같은 표현에 지호가 피식 웃었다. 운전하느라 조금 아쉬웠다. 그게 아니었다면 저 말을 할 때 혜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분명히 말로 설명 못 하는 것들을 표정으로 뿜어냈을 텐데.
 

16671352485724.jpg

“그게 무슨 차이지?”

16671352485736.jpg

“응? 모르겠어요?”

 
그래, 그랬을 것이다. 확신에 찬 말투를 보니 다음에 꼭 한번 다시 물어봐야지 싶었다.
 

16671352485724.jpg

“작가님은 똑같아요. 꾸미나 안 꾸미나.”

16671352485736.jpg

“정말요? 아쉽다…… 도시락 얼른 만들고 잔뜩 꾸민 건데.”

 
말이 끝난 혜윤이 제 입에도 스프링롤 하나를 쏙 넣었다. 생각보다 지호가 잘 먹는 것도 있었고 워낙 음식의 크기가 작아서 도시락 하나가 거의 다 비워져 가고 있었다.
 

16671352485724.jpg

“아니. 둘 다 정말 정말 진짜 진짜 예쁘다고.”

16671352485736.jpg

“…….”

 
지호는 둘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혜윤이 정성껏 해 준 칭찬이었으니 그대로 돌려주었다. 당황한 혜윤의 볼이 씹지 못한 스프링롤 덕분에 볼록 솟아 있었다.
 

16671352485724.jpg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르긴 하다.”

 
진심이 더해져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
 

16671352485736.jpg

“으으, 놀리지 말고요. 맛은 괜찮아요? 제가 조금 싱겁게 먹는 편이라서.”

 
그의 입에 주먹밥을 넣어주며 눈을 살펴보았다. 괜히 억지로 먹는 건 아닌가 싶어서.
 

16671352485724.jpg

“네. 정말 맛있어요. 간도 딱 맞고.”

16671352485736.jpg

“……다행이다.”

 
선의의 거짓도 보이지 않는 눈을 보며 혜윤은 안도를 느꼈다. 음식을 찍는 포크에 기분 좋은 힘이 실린다. 마지막 하나를 끝으로 도시락 한 개가 텅 비워졌다.
 

16671352485724.jpg

“그런데 손이 작아서 그런가, 정말 아기자기하다. 주먹밥 크기가 아기들도 한 입 거리 같은데?”

16671352485736.jpg

“아, 차에서 먹기 좋으라고. 대신 콩알만 하게 백 개 만들어왔어요.”

16671352485724.jpg

“응?”

 
혜윤이 주섬주섬 가방 안에서 또 다른 도시락 2개를 더 꺼내 보였다.
 

16671352485736.jpg

“여기 이만큼.”

 
요즘 종종 그녀가 강조하는 ‘누나’ 같은 표정을 보였다. 배부르게 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16671352485724.jpg

“큭큭. 미치겠네.”

 
새 도시락 뚜껑을 열자 다른 속이 들어 있는 꼬마 주먹밥들이 가득했다. 영화관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함께 음식을 먹고, 장난을 치고, 하루를 공유했다. 보통의 연인들이 그러하듯.
 

16671352524936.jpg

‘진짜 둘이 사귀는 게 맞냐고 물어봤어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16671352485724.jpg

‘……그러셨구나.’

16671352524936.jpg

‘그런데 대답을 못 하고 가만히 계시더라고요? 이상하게.’

 
그리고 보통의 연인이 그러하듯, 하루의 전부를 공유하지는 않았다. 무대인사 내내 그의 집중을 흐트러뜨린 문장들.

지호는 고민 끝에 혜윤에게 묻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신중히 고른 선택이 자신에게 전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 주고 싶어서. 혼자 씩씩하게 해결해보고 싶어 하는 마음인 것 같아 놔두기로 했다.

첫 심부름을 하는 아이를 보는 심정이었다. 가게 밖에서 잘하고 있는지 몰래 지켜보는 아빠의 애틋함. 조금이라도 버거워 보이면 언제든 나서려는 발의 머뭇거림. 지금 지호가 그랬다.

어느새 영화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지호가 시동을 껐다. 이미 무대인사로 여러 번 이곳에 와봤기에 어느 동선이 제일 빠르고, 제일 사람이 없는지 잘 알고 있었다.
 

16671352485736.jpg

“저기…… 지호 씨.”

16671352485724.jpg

“응?”

 
그런데 차 문을 열려는 그와 달리 혜윤은 행동을 주저주저했다. 목소리에도 그 감정이 여실히 보였다.
 

16671352485736.jpg

“음…… 그러고 올라가게요?”

16671352485724.jpg

“네. 왜요?”

16671352485736.jpg

“모자라도 써야 할 것 같은데.”

 
가려도 영 가려지지 않는 외모를 저렇게나 훤히 드러내고 나간다고 해서 그랬던 것이다.
 

16671352485724.jpg

“굳이 뭘.”

 
별일도 별일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그는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본인이 그러겠다기에 혜윤도 별수 없이 차 문을 열려던 참이다.
 

16671352485724.jpg

“사실 뒤에 모자 하나 있어서 작가님 좀 가려줄까 했었거든요.”

16671352485736.jpg

“아…….”

16671352485724.jpg

“그런데 가리기엔 너무…….”

 
지호는 말끝을 흐리며 혜윤의 보이는 모든 곳을 훑었다.

부드럽게. 샅샅이. 음미하듯이.
 

16671352485724.jpg

“……아까워서.”

 
떨리는 말도 떨리는 말이 아닌 것처럼 하는 건 언제쯤 익숙해질 수 있을까. 혜윤은 예쁜 색이 입혀진 입술을 빠르게 괴롭혔다.
 

16671352485736.jpg

“그, 그럼 내립시다!”

16671352485724.jpg

“큭큭. 네.”

 
서둘러 문을 여는 뒷모습을 달게 보던 그도 차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에도, 탈 때도, 다행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영화관 층에 도착했을 때는 몇몇 직원과 관객들의 관심을 받아내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혜윤이 당황스러움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지호는 혜윤의 어깨를 감싸며 외부의 시선을 막아주었고.
 

16671352563659.jpg

 

16671352485724.jpg

“금방이에요.”

16671352485736.jpg

“……네.”

16671352485724.jpg

“옳지, 잘 걷네.”

16671352485736.jpg

“씨이…….”

 
내부의 불안 또한 막아주었다.

물론 그가 막지 못한 것도 있었다. 품에 안기듯 걷는 통에 그의 움직임을 따라 짙게 터져 나오는 체향, 귀에 닿은 것처럼 가깝게 들리는 목소리와 제 삐죽거림을 보며 흘리는 희미한 웃음소리.

그가 작은 불안을 막아주는 사이 큰 설렘이 거세게 들이쳤다.
 

16671352485736.jpg

“와, 이런 데가 있구나.”

16671352485724.jpg

“응. 크진 않아도 둘이 보기엔 괜찮을 거예요.”

16671352485736.jpg

“엄청 좋아요.”

 
라운지에서 받은 팝콘과 콜라를 들고 두 사람이 프라이빗 관에 들어섰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스크린 뒤로 8개의 넓은 리클라이닝 의자가 둘씩 짝을 지어 배치된 곳.

각자 코트를 벗어 옆 의자에 놓고 다시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혜윤은 열심히 이곳을 두리번거렸다.
 

16671352485724.jpg

“초반 20분 안에 나오려나.”

 
아직 영상을 틀지 않은 영화관은 너무 고요해서 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도 선명히 들렸다. 더군다나 참 가깝기도 했고.
 

16671352485736.jpg

“뭐가요?”

16671352485724.jpg

“예고편에 나온 장면이요. 서운하다고 펑펑 울려고 했던.”

16671352485736.jpg

“우와아아! 내가 언제 울려고 했다고!”

16671352485724.jpg

“큭큭. 아무튼 미리 말해 주는 거예요. 감정 없이 일한 거라고.”

 
지호가 그녀의 표정 변화를 훗훗하게 보았다. 어두운 조명이 내린 영화관 안에서도 참 밝아 보였다.

곧 온 세상에 눈이 내릴 텐데 여전히 혼자만 봄이지.
 

16671352485736.jpg

“그럼요, 연기일 뿐이잖아요. 저 마음 되게 넓어요.”

 
자신감에 끄덕이는 고개를 따라 혜윤의 머릿결과 잔잔한 미소가 파도를 쳤다. 지호는 그녀의 말을, 소리 없이 뿜어져 나오는 모든 것들을 느끼며 살짝 웃었다.
 

16671352485724.jpg

“그래요. 어디 한번 볼게요.”

 
탁-

영화관 안의 모든 불이 꺼지면서 스크린 속 세상이 시작될 준비를 한다. 몇 초 동안 잠시 암전 상태에 놓이자 혜윤은 청각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옆자리에서 들리는 콜라의 얼음 소리, 목 넘기는 소리가 유독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곧 영화는 시작됐다.

그렇게 10분 뒤.
 

16671352485724.jpg

‘아까 그 꼬마 주먹밥이 3개는 들어가려나?’

 
지호가 스크린과 혜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재미있는 상상과 함께.

입이 떡 벌어진다는 표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얼굴이었다. 편안하게 기울여진 등받이의 각도는 무시한 지 오래였다. 앞으로 당겨 앉은 상체가 조금 더 기다리면 스크린 안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허벅지 위에 놓인 두 주먹은 어찌나 꼭 쥐었는지 마디가 볼록볼록 일어나 있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슥슥 문지르던 지호가 입을 연다. 여러 번 문질러도 입가에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16671352485724.jpg

“화난 건 아니죠? 마음이 되게 넓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아닌 척을 하려나 싶었지만 혜윤은 곧장 온 힘을 다해 그를 째려봤다. 그리고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다시 스크린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다른 세상 속 지호는 집무실 책상 근처에서 농염한 여자와 불이 튀고 있었다. 슈트의 재킷을 정신없이 벗으며 빠른 속도로 넥타이를 거칠게 내리고, 단추를 풀고. 틈틈이 그녀를 입으로, 손으로 만져가면서.

예고편은 짧기라도 했지.
 

16671352485736.jpg

“아니, 어떤 여자가…… 관심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랑 저렇게 책상 다 때려 부수는 걸 보고 싶어 해요!”

 
지호가 한껏 휘어진 눈을 하며 크게 웃었다. 저렇게 온몸으로 온 감정을 쏟아내면 참기 힘들었다. 입술을 오물조물거리는 혜윤을 보니 잠시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옆자리에 놓인 콜라를 두 모금 마시는데 옆얼굴로 혜윤의 목소리가 닿았다. 억울함에 풀이 죽은 목소리는 귀로 흘러들어 가슴 어딘가를 간지럽혔다.
 

16671352485736.jpg

“이건 아무리 우주만 한 마음을 가진 여자였어도 삐쳤을 거예요. 다들 영화 보러 올 땐 행복한 상상만 하고 오는 건데…….”

 
혜윤은 말을 하면서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1층에서 집무실로 향하는 임원진들의 모습과 후끈한 열기의 공간이 교차하며 박진감 있게 연출된 장면들.
 

16671352485724.jpg

“행복한 상상? 어떤?”

 
되묻는 목소리에 혜윤이 다시 그를 째려봤다.
 

16671352485724.jpg

“아, 무서워라.”

16671352485736.jpg

“여자들 다 그렇잖아요. 옆에 앉으면 두근거리겠다든가, 팝콘 먹다가 손이 스칠 수도 있겠다든가…….”

16671352485724.jpg

“아, 그런?”

 
뾰로통한 목소리에 담긴 귀여운 진심. 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곧장 작게 주먹 쥔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혜윤이 깜짝 놀라 겹쳐진 손을 내려봤다. 지호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주먹 아래로 손바닥을 내리고, 주먹 쥔 손에 힘을 풀어주고, 깍지를 끼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킨 혜윤이 그를 봤다. 지호는 얄궂은 표정으로 질문 같은 재촉을 하고 있었다.
 

16671352485724.jpg

“그리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