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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결국 원하는 것 하나 (45/110)


45. 결국 원하는 것 하나
2022.11.02.


혜윤이 눈망울을 또록또록 굴렸다. 그러자 지호가 깍지 낀 손에 꾹. 꾹. 두 번 힘을 줘 다시 한번 그녀를 졸랐다. 더 말하라고.
 


“……이게 다예요.”

“진짜?”

 
그녀가 입술을 맞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내려간 시선이 지호에게 꽉 잡힌 제 손에 닿았다. 그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호가 천천히 그녀의 호기심을 깨웠다.

상상력 대장인 것 치고는 너무 소박했으니까.
 


“보통 이 정도는 상상하지 않나?”

“네?”

 
그의 짓궂은 목소리에 혜윤이 고개를 올렸을 땐 지호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온 뒤였다. 제 손을 잡아주던 그의 손이 빠져나간 허전함도 잠시였다. 그 손은 어느 틈에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너무 놀라 입이 살짝 벌어지려던 때, 지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
 


“……너무 잘 어울려서 지워지면 아깝긴 한데.”

 
엷은 미소와 작은 읊조림. 그리고 곧바로 입술이 맞물린다. 혜윤은 그와 닿는 순간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딱 그때뿐이었다. 지호가 매우 느긋하게 움직였기에.
 

 
촉촉하고 말랑한 혜윤의 입술을 푸딩 깨물듯 살짝 베어 물자 그녀가 부드러움에 취해 자연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그 틈새로 밀고 들어온 그에게 조금 전 마신 콜라의 시원함이 느껴졌다. 촬영장에서 했던 키스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땐 느끼지 못했던 달콤함이 그녀의 여린 점막을 느릿느릿 훑어나가고 있었다.

눅진하게 이어지는 긴 입맞춤. 그녀는 그 감미로움에 몽롱하기까지 했다. 뭐라도 잡아야겠는 마음에 작은 손이 지호의 티셔츠를 꼭 쥐었다. 그게 그를 잡아당기는 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이성도, 감성도, 녹아내린 상태였다.

순간 허리를 가볍게 감싸던 지호의 손에 힘이 훅 들어갔다. 두 몸이 틈 없이 밀착되는 것도, 행위의 농도가 짙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단숨에 깊숙이 밀고 들어온 그가 집요하게 헤집기 시작했다. 노련한 움직임이 저돌적이었다.

또한 허리를 감싼 손이 옷 속을 파고들자 맨살에 닿는 차가운 공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허물어질 듯한 입술. 질척대는 소리. 그의 손이 닿은 살결. 온몸을 지배한 야릇한 감각.
 


“하아…….”

 
혜윤이 더는 참지 못하고 지호를 살짝 밀어냈다. 이상하고 짜릿한 쾌감이 무서울 정도로 휘몰아쳐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허벅지까지 바짝 쪼여지며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된 상태였다.

그녀의 힘없는 손짓에도 지호는 가볍게 물러났다. 입술만 떨어진 코앞의 거리에서 그는 여전히 혜윤을 보았다. 열에 달뜬 눈으로 가쁜 호흡을 새근새근하다 천천히 그를 바라볼 때까지.

서로의 눈동자 속엔 오직 자기 자신뿐인 순간. 지호가 눈을 살짝 접으며 마음 같은 말을 전했다.
 


“……감정이 있을 땐 이렇게 해요. 그러니까 서운해하지 말라고.”

 
오늘따라 자신처럼 그의 눈도 촉촉해 보였다. 대답을 해 주고 싶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아 어떻게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을 다정히 보던 지호가 혜윤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훑으며 둘만의 흔적을 지워냈다.

다시 제자리에 올바른 자세로 앉은 지호는 시선을 스크린으로 돌렸다. 그사이 혜윤은 헝클어진 머리와 구겨진 옷을 정리할 수 있었다. 콜라 한 모금을 마시며 그녀도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그런 장면은 안 나오니까 마음 놓고 봐요.”

“……네.”

 
작게 대답을 하며 볼에 빵빵하게 공기를 불어 넣고 있을 무렵. 그녀의 옆으로 지호가 불쑥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 큰 손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지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팝콘은 하나씩 따로 받았으니까. 그거 대신.”

 


‘여자들 다 그렇잖아요. 옆에 앉으면 두근거리겠다든가, 팝콘 먹다가 손이 스칠 수도 있겠다든가…….’

 
혜윤은 전부터 느꼈지만 지호가 생각보다 훨씬 섬세한 것 같았다. 징징거리는 사소한 것마저 어떻게든 전부 보상해 줬으니 말이다. 그가 큰 손을 활짝 펼쳤다. 재촉하듯이.

그래서 고마운 재촉에 못 이기는 척하며 손을 얹어주었다. 작은 손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비집고 들어오는 긴 손가락의 온기, 적당히 기분 좋은 힘. 꼭 잡은 두 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이후로 한 시간 넘게 이어진 영화는 끝까지 박진감이 넘쳤다. 평소 액션 영화를 안 보는 혜윤마저 마지막까지 눈을 떼지 못했으니 말이다.

간혹 무서운 장면으로 맞잡은 손에 힘이 꾹 들어갈 때면, 지호는 엄지손가락으로 혜윤의 손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녀는 이 영화관에 들어온 이후로 어떤 식으로든 심장이 몇 배는 빨리 뛴 것 같았다.

영화도 현실도 다 한 사람이 주인공이라 가능했지만.
 


“어때요?”

“진짜 재밌었어요! 아니, 무서웠어요! 와…… 지호 씨, 다른 사람 같아요.”

“큭큭. 다행이네.”

 
스크린 화면이 꺼지고 은은한 영화관 조명이 켜지자 조금 더 서로의 얼굴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지호가 옆자리에 둔 코트를 잡고 일어서려는 순간, 혜윤이 불쑥 일어나 그의 옆에 섰다. 아름아름 망설이는 몸짓에 부끄러움이 보였다.
 


“응?”

“여기 조금…… 묻어 있어서.”

 
자신의 립스틱 자국이 옅게 남은 지호의 입술. 그녀가 그의 얼굴 쪽으로 살짝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스치며 지호의 입술 위를 살살 문질렀다. 아기의 속눈썹을 어루만지듯이 손끝이 한없이 조심스럽고 가녀렸다.

지호는 제 입술에 시선과 손길을 쏟는 혜윤을 올려봤다. 그 모든 아름다움이 부력이 되었나 보다. 가슴 속 밑바닥까지 가라앉혀둔 마음이 입 안으로 붕 떠올라 버렸으니까.
 


“……됐다.”

 
혜윤이 몸을 세우며 수줍게 그의 얼굴을 점검하듯 봤다.
 


“작가님.”

“네?”

 
그런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던 지호의 얼굴은 그새 많이 다른 분위기였다. 분위기만큼 목소리도 심각해져 있었다.
 


“……나랑 놀이 하나 할래요?”

 
진중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입은 옅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진심이 아니란 것쯤은 그녀도 알 수 있었다.
 


“……무슨 놀이요?”

“지금 원하는 거…… 하나씩 들어주기 놀이.”

“…….”

“대신 거절 할 수 있게 내가 먼저 말할게요.”

 
지호답지 않게 말 사이사이에 공백이 많았다. 망설이고 누르려다가 내보이는 진심인 것 같아 혜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우리 집으로 갈래요?”

 
지호의 검은 두 눈이 밤의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 젖은 밤에 오직 자신만 고여 있자 혜윤의 심장도 다시 쿵. 쿵. 뛰기 시작했다.

***

한산한 도로만큼이나 차 안도 조용하다. 지호는 운전을 하며 가끔 옆자리를 곁눈질했다. 혜윤은 정면을 보다가 잠시 창밖을 보기도 했고, 또 살짝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한결같은 건 허벅지를 괴롭히고 있는 손이었다.

손톱으로 허벅지를 쓱쓱 할퀴다가 가끔씩은 꼭꼭 찌르다가. 태연한 척은 손가락까지는 무리였나보다.

그가 다시 정면을 보며 조금 전 영화관의 대화를 떠올렸다.
 


‘지금…… 우리 집으로 갈래요?’


‘…….’


‘강요하는 거 아니니까 거절해도 돼요.’


‘……네.’


‘아…… 거절이구나. 알았어요.’


‘……아니요. 갈게요.’

 
역시 너무 서둘렀나 싶어 자책 같은 씁쓸함이 밀려올 때,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아주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대범한 대답을 던져놓고는 휘리릭 코트를 입고 문 앞에 서 있던 뒷모습.

그 뒤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도로를 달리는 지금까지도 혜윤은 말이 없었다. 아이처럼 한 가지만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은 생각이 많을 것이고.

지호가 신호에 걸린 차를 부드럽게 세웠다. 그리고 낯설고 묵직한 세계를 만들고 있을 저 작은 머릿속의 아이를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아이에겐 그런 세계가 어울리지 않으니까.
 


“원하는 거 하나씩 들어주기로 했잖아요.”

“……네?”

 
갑작스럽게 뚝 솟아난 이야기에 혜윤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아직까지는 제대로 마주하는 게 부끄러웠기에 고개를 약간만 돌렸다.
 


“나는 아까 말했고. 작가님은 뭐예요?”

“아…… 지금 당장 생각이 안 나는데…….”

 
그녀는 마음처럼 말끝도 무거운지 질질 끌고 다녔다. 지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금방 말 하나를 더한다.
 


“다음에 말해도 될까요?”

 
그 한마디에 얼핏 느껴진 순진함. 마음은 무거워도 뺏기는 건 싫었던 거지. 무려 소원이라는데.

지호의 입가에 스멀스멀 미소가 올라왔다.
 


“지금 원하는 거 하나씩 들어주기 놀이 아니었나? 그럼 안 될 것 같은데. 그건 지금이 아니잖아.”

 
바뀐 신호에 정면을 보며 발에 힘을 줬다. 웃음이 훅 쏟아져 하마터면 액셀에 힘이 잔뜩 실릴 뻔했다. 지호는 혜윤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러다 아차 싶기도 했다. 괜히 장난쳤나 싶어서. 그런 식이면 자기도 같이 안 가겠다고 무르려나.
 


“……제발요. 한 번만.”

“큭큭. 진짜 못 살겠네.”

 
간절한 아이는 그런 비겁한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거운 생각이 다 날아갔는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이 그렁그렁했다.
 


“알았어요. 그럼 다음에 말해요.”

“아, 좋아라. 고마워요.”

 
혜윤이 넉넉한 만족감에 생글거렸다. 아쉽게도 그 생글거림은 오래 가진 못했지만.

차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서자 혜윤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까지 오르는 동안에도 내내 조용하더니 대뜸 예쁜 입이 꽃봉오리처럼 열렸다.
 


“……저기요, 지호 씨.”

“네.”

“제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잠깐 어색해서 그런 거니까요. 괜히 걱정하지 말라고요.”

“……네.”

 
그래서 향기로운 말이 퍼져 나오기도 했다.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거예요.”

 
그녀답게 마지막 한마디는 꼭 지호의 눈을 바라보며 했다. 눈이 마주치자 몇 초 못 버티고 금세 피해버렸지만 진심이 오고 가기엔 넉넉한 시간이었다.

현관 신발장까지 들어서자 두 사람의 뒤로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지호의 손짓에 먼저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서면서도 그녀의 귀엔 여전히 도어락 닫히는 소리가 웅웅거리는 듯했다.

지호는 현관에 놓인 그녀의 작은 신발을 바라봤다.
 


‘종수는…… 희수가 집에 온 첫날부터 사랑했을 거예요. 현관에 놓인 희수의 230mm 운동화를 본 그 첫날, 첫 순간부터.’

 
그리고 언젠가 <23센티미터>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사랑했을 거예요.’가 아니라 ‘사랑했어요.’라고 강하게 확신했을 텐데.

슥- 슥-

슬리퍼를 끌고 천천히 걸어 들어가자 혜윤이 달빛이 내린 한강을 눈에 담고 있었다. 발소리에 뒤돌아보는 그녀의 몸짓이 긴장으로 빳빳해 보였다. 지호가 나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샤워 좀 해도 되죠?”

“아…….”

“작가님은 침실 쪽 샤워실 써요. 어차피 오늘은 여기서 잘 거니까.”

 
끄덕끄덕. 어색하고 느릿한 고갯짓에서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마음을 놓게 해 주고 싶기도 한데, 또 저런 모습도 제 취향이라. 지호는 두 개의 진심을 엇비슷하게 섞어서 내놓았다.
 


“긴장 풀고 편하게 있어요. ……예고 없이 잡아먹진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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