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우리 집 구경하러 갈래요?
(47/110)
47. 우리 집 구경하러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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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우리 집 구경하러 갈래요?
2022.11.09.
[미안해요. 나가는 것도 몰랐어요. (오전 10:41)]
혜윤은 30분 전에 보낸 메시지를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아직 그에게 닿지 않은 아침 인사. 기분 좋게 샤워를 끝낸 몸이 천천히 주방으로 향했다.
탁-
냉장고 문을 열자 똑같은 모양의 작은 반찬통들이 쪼르르 탑처럼 쌓여 있었다. 통마다 적혀 있는 크고 어른스러운 글씨체들.
‘소고기 장조림. 시금치나물. 열무김치. 고추 장아찌.’
“오…… 엄마가 해 주시나 보다.”
지호가 혼자 사는 것 치고는 잘 챙겨 먹는 것 같아서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그래도 당부하고 간 사람의 마음을 알기에 반찬통을 꺼내 접시 하나에 조금씩 덜었다.
해동한 밥 한 공기와 두 젓가락씩 옮겨 담은 4가지 반찬. ‘잘 먹겠습니다.’라는 듣는이 없는 혼잣말을 했지만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그리고 기분 좋게 밥 한 숟가락과 장조림을 입에 넣은 순간.
“으아…….”
두 번을 채 씹지 못하고 입이 떡 벌어졌다. 생각보다 너무 자극적인 맛이었다. 장조림이라서 그런가 싶어 시금치로 젓가락을 옮겼지만 조금 덜 자극적일 뿐, 소금기가 매우 짙었다. 겨우겨우 씹어 넘긴 뒤 물을 두 모금 마셨다.
“어제 내 도시락 진짜 맛없었겠는데…….”
혜윤은 어제저녁에 본 지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기분 좋은 얼굴에 거짓은 전혀 없었으니 분명 맛있게 먹은 거라 믿었었는데. 이런 음식을 평소에 먹었다면 분명 싱겁게 만든 자신의 주먹밥은 무미였을 게 틀림없다.
Rrrr- Rrrr-
때마침 지호의 이름과 함께 움직이는 핸드폰. 작은 고민이라도 어쩜 이렇게 빨리 해결해 주려 들까. 그 이름을 보자 입 안에 짠맛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 조금 전에 일어났어요.”
-응. 잘 잤어요?
귀에 익은 다정한 목소리. 사실 어제도 아닌 오늘의 기억들이었다. 그 생각에 혜윤의 얼굴 위로 붉은빛이 번진다. 부끄러운 손이 괜히 젓가락으로 밥알을 톡톡 때렸다.
“네…… 너무 내 집처럼 푹.”
-그럼 더 좋지. 밥은 먹었어요?
“이제 먹으려고요. 그런데 지호 씨.”
-네.
“……어제 내가 싸 온 도시락 진짜 괜찮았어요?”
그러다 젓가락이 다른 반찬들을 때리자 조금 전 소금기가 입 안에 올라왔다.
억지로 그걸 다 먹은 거라면 너무 미안한데. 대답을 기다리는 마음이 잠시 무거웠지만 정말 잠시였다. 수화기 너머로 지호의 콧바람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 간이 센 거예요. 내 입에도 세니까 그런 걱정 말고. 정말 맛있었어요.
“와…… 진짜 여기 CCTV 있어요?”
-큭큭. 작은 거 하나만 맞춰도 이러네.
지호는 배우라 그런 걸까. 질문을 하면 문장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다. 질문하는 사람의 상황을.
자신은 타인의 생각을 글자로 읽어내려 애쓰는 반면, 그는 항상 장면을 찾아내려고 하는 게 조금은 재밌는 차이 같았다. 작가와 배우라 이건가.
-반찬이 많이 짜다는 걸 깜빡했다.
“그럼 지호 씨는 이 음식들 어떻게 먹어요? 그냥…… 참으면서?”
혜윤은 대답을 기다리는 잠깐 동안 언젠가의 오후를 떠올렸다. 그날의 마지막 촬영 장면. 퇴근도 잊게 만들던 종수의 애절함.
‘……누나. ……엄마라고 부르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아니, 끝내 알아내고야 만 지호의 애절함. 그랬기에 진짜 하고 싶은 질문은 다시 꿀꺽 삼켜버려야 했다. ‘왜 엄마한테 짜다고 말하지 않아요?’ 같은.
-참는 건 아니고 조금씩 먹으면 되니까. 물 마셔도 되고.
그리고 그 대답을 듣자 의미 없는 젓가락 장난이 뚝 멈춰버렸다.
“……그게 참는 거예요.”
-큭큭. 그런가? 아무튼 반은 비우려고 해요. 2주마다 보내주시는 거라서.
언제나처럼 그 말투가 너무 따뜻해서 그녀는 속상했다. 대체 뭐 이렇게 작은 불평 하나 없는지. 더군다나 역시 지호답다는 생각이 들자 더 마음이 무거웠다.
벌써 제 머릿속에도 지호는 그런 사람으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가슴에 넓은 바다를 품은 사람. 모든 걸 다 안고, 참고, 묵묵히 가는 사람.
어젯밤에 여러 번 깨문 아랫입술을 물자 피가 스몄다.
-너무 짜다 싶으면 먹지 말고 과일이랑 토스트라도 먹어요.
“……아니에요. 맛있게 잘 먹을게요. 지호 씨는 아침 먹었어요?”
-네. 간단히 샌드위치 먹었는데 점심은…….
이어지는 5분 남짓의 통화로 두 사람은 잠깐의 일상을 공유했다. 지호는 짧은 통화가 애틋했고 혜윤은 이 순간 그의 모든 게 애틋했다.
그리고 통화를 끝낸 뒤 그녀는 덜어놓은 반찬과 밥 한 공기를 끝까지 꼭꼭 씹어 먹었다.
***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훅훅 스쳐 갔다. 이미 어둠이 내린 지 오랜 시간. 지호는 잠시 핸드폰 속 메시지를 들여다봤다.
[지호 씨, 오늘은 집에 도착하면 몇 시예요? (오후 5:48)]
[별일 없으면 10시? (오후 7:20)]
오늘 혜윤과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그 이후로 답은 없었다. 여러 번 전화를 해볼까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면 깨우기 싫기도 했고, 그곳이 자신의 집이라면 더 그랬기에.
‘아직 집이에요?’라는 글자를 두드려보긴 했지만 결국 화면을 꺼버린다. 이미 그녀의 집에 도착해서 이런 메시지를 본다면 또 마음 쓰겠지 싶었다.
“수고했어. 내일은 8시쯤 데리러 올게”
“형이 더 피곤하겠다. 빨리 가서 쉬어.”
“어…… 그리고 지호야.”
문을 열려던 손을 봉기의 목소리가 잡았다. 움직임을 멈춘 지호가 봉기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을 이어가라는 듯이.
“그…… 조심하라고. 데이트를 한 건지 그냥 같이 영화 한 편 본 건지는 몰라도. 뭐, 사람 없는 데로 잘 다녀서 큰 말이야 안 났다만.”
“응.”
어제저녁 영화관의 일들이 봉기에게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망설임이 조금도 없는 지호의 대답에 봉기가 그를 진득하게 쳐다봤다.
“그래…… 어련히 잘할까. 내가 널 모르냐.”
“다 형한테 배운 거니까 잘하는 거지.”
“와…….”
“큭큭. 감동받으라고 한 소리야. 간다.”
지긋이 보는 눈에 9년의 세월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호 역시 낯간지러운 진심을 던져두고 차에서 내렸다. 봉기는 가슴에 퍼지는 묵직한 감동을 가만히 느꼈다.
그가 5분간 멍하니 누린 여운을 싣고 차를 움직일 때쯤, 지호는 제집 앞에서 우습지만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삐. 삐. 삐. 삐. 철커덕-
“아…….”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몇 시간 동안 소리 없이 쌓였을 어둠이 처연하게 쏟아졌다. 중문 유리창 너머로 불 꺼진 집과 깨끗한 현관.
역시 돌아갔구나.
오늘따라 무거운 슬리퍼는 침실까지 가는 내내 지저분하고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방문을 열자 현관 신발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깨끗하게 텅 비어버린. 조금 쓸쓸했다.
지호가 잠시 방을 훑더니 입고 있던 재킷을 침대에 툭 벗어놓는다. 뻑뻑해진 것 같은 목을 꾹꾹 누르다 윗도리를 벗으며 샤워실로 향했다.
Rrrr- Rrrr-
손과 발이 멈춘 것도 그때였다. 재킷 주머니 속 핸드폰에 뜬 귀여운 이름. 조금 전의 아쉬움이 싹 사라진 것 같았지만.
“……집에 잘 갔어요?”
받자마자 그 마음을 돌려 말하기도 했다.
-네. 그런데요. 지호 씨, 어제 그거 있잖아요. 원하는 거 하나씩 들어주기.
“응?”
자세히 들었다면 혜윤이 자신의 감정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잔뜩 신이 난 목소리였다. 그러니 알아챌 리가 있나. 지호가 그 명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음에 쓰라고 했잖아요. 그거 지금 쓰고 싶은데.
“큭큭. 뭐길래 이렇게 들떴을까. 말해요.”
그리고 제 아쉬움을 알아주지 않아도 좋았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쉽게 풀어줬으니까. 지호가 웃으며 혜윤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게…… 우리 집 뷰도 나름 괜찮거든요? 2층이라 진짜 창밖을 보면 정원 같아요.
“……무슨 말이지?”
쉽게 알아듣기 힘든 말을 신나서 하는 게 귀여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쉽게 알아들었지만 조금 놀라웠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집 구경하러 갈래요? 그게 내가 원하는 거.
“…….”
-내려와요. 집 앞이니까.
***
벗어둔 옷을 다시 챙겨입은 지호가 집을 나섰다. 서운함이 반가움으로, 또 황당함으로 바뀌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조금 정신이 없었다.
비상등을 켜둔 차의 조수석 문을 열자 혜윤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봤다. 황당함이 행복으로 바뀌는 속도 또한 순식간이었다.
“음…… 대체 뭐지? 감도 안 잡히는데.”
“준비물은 챙겼죠?”
잠옷이 든 가방을 살짝 들어 보이자 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혜윤은 지호가 헷갈린다는 듯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게 좋았다.
“왜요?”
“그냥……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작은 계획을 발표할 기회를 주는 것도 너무 좋았고.
“사실 집 구경은 핑계고요. 내일 아침밥 차려주고 싶어서요.”
“…….”
“오늘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지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남은 한 달의 촬영은 모두 부산에서 진행되기에, 당분간 서울에서 볼 일은 없다.
“부산 다녀와서는 나 안 볼 거예요? 아…… 어제 별로였나보다.”
“으앗! 절대 그런 거 아니고요! 그럼 너무 늦어지니까 그런 거예요. 빨리해 주고 싶어서…….”
“그렇구나.”
혜윤이 한껏 당황했는지 운전대를 팡팡 치며 흥분을 뱉었다. 지호는 여전히 그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장난으로 한 말인데 오히려 제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도 했다.
무조건 엮여야 할 날도 얼마 안 남았구나.
“진짜예요…….”
“그래요.”
하지만 지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혜윤은 진심을 내보일 수가 없어 답답하기도 했다. 어젯밤 생각만 해도 달궈진 커피포트처럼 소리를 내며 김이 날 것 같은데 심지어 정말 행복했다고 말이라도 한다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부끄러움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살살 괴롭혔다.
“운전 내가 할 걸 그랬다.”
“에이, 저 운전 꽤 해요. 사고 난 적도 없고, 교통 법규도 잘 지키고.”
“응. 알았으니까 브레이크.”
“엄마야…….”
끼익-
지호의 침착한 목소리와는 달리 하마터면 신호를 어길 뻔한 상황이었다. 겨우 멈춘 차가 정지선을 조금 넘는다.
“……평소엔 안 이래요.”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려 억울함을 전했다. 이상하게 지호만 옆에 있으면 실수를 하는 게 답답했다.
“알아요. 술도 잘 마시고 운전도 잘하고.”
그걸 아는 건지 지호의 눈엔 장난과 애정이 가득했다.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키자 혜윤이 다시 속도를 냈다.
“우와! 나 완전 거짓말쟁이 된 거예요, 지금?”
“큭큭. 티가 났어요?”
그녀가 늘 하는 말을 그는 종종 이런 식으로 돌려주었다. 어두운 밤과는 달리 차 안은 혜윤으로 인해 한낮처럼 밝았다. 잠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지호가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한낮의 분위기를 원래의 시간으로 돌리려는 것처럼.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응? 뭘요?”
“여자가 밤 10시 넘어서 남자를 집으로 초대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죠?”
“……네?!”
단번에 배로 커진 눈이 지호를 재빠르게 곁눈질했다.
“나 엄청 기대 중이라고.”
장난이 한 스푼 섞인 눈인데 밤을 흡수한 건지 꽤나 그윽해 보였다. 목소리는 더 짙었고.
“그런 게 아닌…….”
“브레이크.”
“으앗!”
차 안에 지호의 낮은 웃음소리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