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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참지 말고 (48/110)


48. 참지 말고
2022.11.13.



“와…… 이건 좀…….”

 
지호는 혜윤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숨길 겨를도 없이 감탄이 숨처럼 빠져나갔다. 신발을 벗으려던 혜윤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네? 왜요?”

“눈 감아도 누구 집인지 알 것 같아서요.”

 
지호가 놀란 건 이 집의 향 때문이었다. 혜윤의 향이 이곳에 배인 게 아니라 공간 자체가 이 사람인 것 같았다. 집에 들어온 게 아니라 그녀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어떤 장소에서도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느껴본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제일 외곽인 현관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으로.
 


“아, 아마 집에서 피우는 향초랑 제가 쓰는 바디로션, 향수…… 다 같은 향이라 그럴 거예요.”

 
조금 쑥스럽게 신발을 벗은 혜윤이 잠시 소매를 걷어 지호의 코앞에 손목을 살랑거렸다.
 


“비슷하죠? 집 냄새랑.”

 
눈앞에 얇고 새하얀 손목이 아찔한 향을 내며 흔들리니, 당연히 남자의 마음은 그보다 더 격하게 흔들렸다. 그가 조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저런 작은 행동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부르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잠도 잘 오는 향이에요. 이불도 폭신하니까 오늘 진짜 푹 잘 거예요.”

 
혜윤의 눈이 자신감으로 반짝였다. 그 얼굴을 보던 지호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집은 생각보다 꽤 넓었다. 아파트 외관은 평범해 보여도 동네가 부촌이었기에 잘 꾸며놨을 거란 예상은 있었다. 그 예상과 맞아떨어지기도 했고.

넓은 거실 모퉁이에는 부지런한 주인을 만난 트리가 벌써 놓여 있었다. 누구보다 빨리 산타를 기다리는 게 귀여워 잠시 시선을 주다가 조금 더 시야를 넓혔다. 혜윤의 말처럼 창밖으로 보이는 단지 내 조경이 꼭 개인 정원 같았다.
 


“부자 누나였네. 잘 보일걸.”

 
지호가 벗은 재킷을 소파에 올리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다이닝룸에서 천천히 걸어오던 혜윤이 그 농담에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컵을 건넸다. 이전에 지호가 선물한 컵이었다.
 


“큭큭. 충분히 잘 보였으니까 걱정 말고요.”

 
익숙한 모양의 컵에서는 은은하게 김이 나고 있었다. 적당히 따뜻해 보이는 허브티.
 


“지호 씨, 이거 한잔 마시고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자요.”

 
컵을 내려보던 그의 눈이 혜윤의 얼굴로 향한다. 그녀가 준비해둔 아기자기한 계획들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에 뿌듯함이 스며 있는 걸 보면.

그래서 지호는 절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지어졌다.
 


“아…… 이걸 어떡하지.”

“왜요?”

“……정말 재워만 주려고 데려온 것 같아서.”

 
산뜻하게 되묻던 혜윤에게도 지호의 탄식이 조금은 번진 모양이다. 그녀 역시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아…… 그것보다는…… 아침밥 해 주고 싶어서…….”

“응. 그러니까.”

 
그의 눈빛이 혜윤을 따뜻하고 아늑하게 감쌌다. 부끄러움에 몇 방울은 흘릴지언정 나머지는 모두 담아내려는지 그녀 역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사실 혜윤도 거기까지 생각을 못 한 건 아니었다. 단지 더 큰 간절함이 작은 걱정을 밀쳐냈던 것이다. 따뜻한 밥 한 끼를 꼭 해 주고 싶다는 간절함.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모퉁이에 놓인 트리의 전구들이 스무 번 가까이 반짝이는 동안에도 둘은 그 시선과 고요를 유지했다. 결국 지호가 먼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비슷한 각도로 입꼬리 역시 미세하게 올라붙어 있었다.
 


“응? ……어떻게 할까요, 내가.”

 
그가 주는 간지러운 애정이 온몸에 지르르하게 퍼지자, 혜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얼굴에 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무슨 마음인지 다 알겠다고.
 


“원하는 거 하나씩 들어주기였으니까…… 진짜 원하는 대로 해 줘야겠다.”

“…….”

“푹 자라고 하면 얌전히 자고, 꼭 안 그래도 된다고 하면…… 욕심 좀 부리고.”

“아…….”

 
지호는 언제나처럼 결정권을 넘겼다. 혜윤은 어젯밤이 정말 행복했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지만 한 번의 끄덕임 정도라면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용기보다 빠른 건 그의 진심이었다.
 


“그런데 어제랑은 좀…… 많이 다를 것 같은데.”

“뭐가요?”

“내가요.”

 
지호가 김이 사라져가는 허브티에 입을 댔다. 입 안에 가득 머금은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내려가기 전까지 이 집의 천장과 여러 공간을 훑기도 했다. 그의 시선을 뒤따르며 함께 제집을 둘러본 혜윤이 결국엔 그를 봤다.

목을 축인 지호의 입에서 은은한 캐모마일 향이 났다.
 


“여기는 너무…… 작가님 향이 세요. 지금처럼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도 조금…… 힘들 정도로.”

 
향기로운 입으로 향을 이야기했지만 쉽게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눈을 읽은 지호가 돌려 말하지 않기로 한 것도 그때였다.
 


“그래서…….”

“…….”

“시작하면 어제처럼 자제 같은 건 못한다고.”

 
노골적인 진심에 혜윤이 주먹을 꼭 쥐었다. 단둘이서만 온전히 함께한 시간. 그렇기에 상대가 어떤 마음과 손길을 보였는지 알 수 있는 건 그녀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호는 자신의 속도에 맞춰주었다. 마음이든 몸이든. 그 부끄럽지만 따스한 배려를 떠올리느라 그녀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탁-

그리고 둔탁한 소리에 옆을 보자, 지호가 다 마신 컵을 몇 걸음 떨어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채근하는 눈빛이 참 달았다. 해 주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 놓인 그의 진심이 눈 안에서 갈팡질팡했다. 밤에 잠긴 건지 목소리가 너무 깊어서, 그게 그의 마음 같아서, 혜윤이 천천히 입을 뗀다.

해 주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 지호에 한해서라면 혜윤은 두 개가 똑같았으니까.
 


“대신요…….”

“응.”

“내일 아침밥 맛없으면…… 꼭 맛없다고 말해 줘요……. 참지 말고.”

“큭큭. 겨우 그거예요?”

 
지호가 피식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아침밥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나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촉촉한 눈이 한없이 진지해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지호 씨는 밖에서 항상 참기만 하니까…… 우리 집에서는 참지 말라고요.”

“…….”

“뭐든지.”

 
이 순간, 물결치는 갈색 눈동자에 들어찬 오직 한 사람. 저 눈이 보는 세상에 언제나 자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솟구쳤다.

오직 자신만. 지금처럼.

그 욕망이 그를 집어삼키는 건 찰나였다.
 


“……정말 미치게 한다.”

 
그의 넓은 보폭이 단번에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두 입이 맞붙는 것도 동시였다. 틈 없이 맞물린 입술 사이로 그는 이전과는 달리 거칠게 움직였다. 그녀의 침실로 향하는 걸음마다 옷이 하나씩 툭. 툭. 떨어져 갔다.

그 위로 가쁜 호흡과 서로를 자극하는 숨소리가 허공에 흩어진다.
 


“하아…… 나 너무…… 어지러운데…….”

 
포근한 이불이 등에 닿자 혜윤이 터질 것 같은 떨림을 전했다. 말조차 덜덜 떨리는 것 같은 두근거림이 버거웠지만.
 


“나도 그래요. ……너무 예뻐서.”

 
더운 숨이 섞인 그의 목소리는 진심으로만 가득 차 있어서 벅차게 행복하기도 했다.
 

 

***

아침 6시. 조금은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혜윤이 재빨리 손을 뻗었다.
 


“으아…….”

 
알람을 끄는 속도만큼 온몸에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이 번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어금니를 꼭 깨물며 이불을 살짝 들치려던 때였다. 크고 따뜻한 지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살짝 쥐었다.
 


“……깼어요?”

“네…… 아침은 다음에 해 줘요. 마음만 받아도 충분하니까.”

 
잠이 덜 깬 묵직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손목을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자 혜윤이 제 손을 빼내어 양 손바닥으로 지호의 눈을 가렸다.
 


“한 시간만 더 자요. 깨우러 올게요.”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손짓과 말투에 지호의 입매가 나른하게 휘었다. 그는 못 보았지만 그녀 역시 비슷한 표정과 고갯짓을 하며 방문을 나섰다.

***

식탁 위에 깔끔하게 올려진 소고기뭇국, 쌀밥, 몇 개의 반찬들.

지호가 수저를 든 순간부터 혜윤은 식탁에 양 팔꿈치를 세우고 있었다. 두 손바닥이 받치고 있는 볼살은 아이처럼 귀여웠지만, 잔뜩 찡그려진 미간은 어른처럼 심각했다.

지호가 느릿하게 밥을 씹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맞은편에 앉아 제 쪽으로 온 관심을 쏟고 있는 한 사람을 봤다. 밥이 아니라 애정을 먹는 기분.
 


“진짜 맛있는데요.”

“음……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그가 조금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자 혜윤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제야 식탁에 세워둔 팔을 내리고 상체를 세운다.

그녀는 틈틈이 지호의 밥 위에 반찬을 올려주었다. 착한 아이처럼 밥을 먹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지호가 어떤 반찬을 더 좋아하는지를 맞히는 것도 소소한 기쁨이었다.

특히 국을 뜨면서 ‘이건 나중에도 생각나겠다.’ 같은 혼잣말은 자신이야말로 오래 기억할 것 같았다.

짧은 30분의 식사가 끝나자마자 지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끊으며 ‘지금 나갈게.’라는 말을 한 걸 보면 분명 봉기인 것 같았다. 그녀가 신발을 신는 지호를 물끄러미 봤다.
 


“오늘 부산은 언제 출발해요?”

“아마 점심쯤.”

 
요리를 할 땐 그렇게 가볍던 손이 현관문 앞에서는 너무나 무거웠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지호가 그럴 필요 없다는 듯이 자신만 쏙 빠져나간다. 결국 문틈을 사이에 두고 둘은 마주 섰다.
 


“조심히 잘 내려가요. 도착하면 꼭 연락하고.”

“……네.”

 
보내는 사람이나 가려는 사람이나 아쉬웠지만 지호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 지호의 방식이 어른스러운 인사법이란 걸 알지만 조금 심통이 났다. 그래서 귀여운 장난을 치고 싶기도 했다. 장난 같은 선물이었다.
 


“어? 저거 뭐지?”

“응?”

 
혜윤의 쭉 뻗은 팔을 따라 지호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빠르게 까치발을 들어 그의 볼에 쪽 소리를 냈다.
 


“얼른 가요.”

 
놀란 모습이 마음에 들어 이 기분 그대로 그를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불쑥 지호가 그녀의 얼굴에 집중했다.
 


“……여기 뭐 묻은 거 알아요?”

“에이, 제가 방금 써먹었잖아요. 안 속아요.”

 
태연하게 고개를 설설 젓는 그녀와는 달리 지호의 얼굴에 살짝 황당함이 보였다. 손가락이 신발장 쪽 거울을 가리키는 순간에도 감정이 한결같았다.
 


“진짠데…… 거울 봐봐요.”

“정말요?”

 
당황한 몸짓이 서둘러 상체를 뒤로 무르려 하자.
 


“큭큭. 안 속는다더니.”

 
거울을 가리키던 손이 금방 그녀의 작은 볼을 감싼다. 산뜻하게 입술만 닿았다 떨어지는 것도 그녀를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우와, 연기력 이렇게 쓴다고요?”

 
동그랗게 커진 눈이 그의 표정을 따라 살짝 웃었다. 그리고 장난으로 몇 초를 미뤘다 한들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이제 진짜 갈게요. 다음 주에 봐요.”

 
지호가 시선으로 혜윤의 얼굴을 꾹 눌렀다.
 


“……네.”

 
그리고 그가 작은 대답을 몇 초 더 되새긴 뒤 비상구 문을 열었다. 점점 아득하게 들리는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혜윤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를 못 보는 일주일은 내일부터인데 벌써 가슴이 허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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