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상황 설명 시작
(4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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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상황 설명 시작
2022.11.16.
“하암…….”
주먹만 한 하품을 하며 혜윤이 몸을 일으켰다. 몸살이 난 것처럼 온몸은 욱신거렸고 피곤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2시를 알리는 핸드폰 화면 밑으로 민주에게서 온 2통의 부재중 전화가 보였다.
이어지는 무거운 마음까지.
[혜윤아, 전화를 안 받네. 정말 미안한데 나 오늘 같이 못 갈 것 같아서. 이틀 뒤에 가도 될까? 우준이 돌아오기 전에 갈 수 있어. (오전 9:10)]
“당연히 됩니다…….”
부드럽게 휜 눈꼬리와 어울리는 혼잣말을 하며 그녀의 손가락이 비슷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에이, 미안하기는.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와. 한참 더 있다가 와도 돼. (오후 12:05)]
짐은 어제 미리 챙겨뒀기 때문에 더 준비할 일은 없었다. 느릿느릿 씻고 옷을 입고. 잠시 앉아서 TV를 보던 그녀가 우준의 전화에 집을 나섰다.
“너 여기 들어가서 잠도 잘 거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우준이 그녀의 캐리어를 기가 막힌다는 듯이 훑었다. 남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여자들의 여행 가방.
“음……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까.”
“자기 몸만 한 걸 가지고 왔네.”
투덜거리면서도 우준은 재빨리 손잡이를 뺏어 쥐었다. 차에 짐을 싣고 앞자리에 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시간에 맞는 대화를 했다.
“우준아, 점심 먹었어?”
“아니. 우리 가다가 휴게소 들르자.”
“오! 좋다. 휴게소 너무 오랜만이네.”
혜윤은 우준의 대답이 반가웠다. 그의 식사량이면 다양한 음식을 잔뜩 맛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런데 전지나는 나 있을 때 안 와?”
그러나 들뜬 기분을 곧장 빼앗기기도 했다.
“……응.”
“아쉽다. 진짜 보고 싶었는데.”
우준이 실망스러운 대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표정에 싱겁게 웃은 혜윤이었지만 그 옅은 웃음조차 오래가진 못했다. 어쩐지 민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아무튼, 명확하게 말했거든. 지호 씨 때문에 출연하고 싶은 거니까 무조건 겹치는 역할로 불러 달라고.’
몹쓸 기억력은 때론 떠내려가게 놔둬도 되는 문장들을 악착같이 붙잡고 있었다.
‘공식적인 연인이 함께 있는 곳까지 찾아온다는 건,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걸까? 아니, 용기가 아니라…… 애정이겠지?’
묘한 감정에서 자라난 호기심은 꼬리를 물었다. 조금 전 우준의 표정을 따라 하던 혜윤이 운전석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우준아, 원래 예쁜 사람들은 자신감이 넘치나?”
“응. 운동할 때 보면 알지. 그래서 더 예쁜 것도 있어. 자신감 있게 행동해서.”
“……그렇구나.”
“그러니까 넌 자신감 있게 행동하면 안 돼. 못생겼으니까.”
“씨이…….”
혜윤은 그의 팔뚝을 때리려다가 다시 스르륵 주먹을 풀었다. 어차피 답을 얻지 못할 복잡한 생각보다는 이런 말장난이 편하기도 했으니까. 이정도 장난은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참…… 안지호는 진짜 안 오는 거 확실하지?”
“이게 진짜!”
하지만 이 장난은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 조금 전의 화까지 더해 우준을 때렸다. 진지한 그의 표정이 더 화를 돋우었다. 자신이 지호에게 얼마나 창피한 질문을 했었는지 생각한다면.
“넌 더 맞아야 돼!”
손에 더 큰 힘이 실리는 건 당연했다. 씩씩거리는 혜윤과 달리 우준은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도리어 때려달라고 팔을 뻗어주기까지 했다. 어린아이가 해 주는 안마를 받는 것처럼.
“근데 나는 방 하나 따로 주는 거지?”
“……으앗!”
그리고 혜윤의 귀여운 주먹질이 뚝 멈춘 건 우준의 말 한마디로부터였다.
얼마 전, 필요한 숙소 개수를 알려달라는 스태프의 말에 혜윤은 한 개를 신청했었다. 민주와 한방을 쓰면 더 즐거울 테니까. 우준의 동행을 까마득히 잊은 것이었다.
맙소사.
“뭐지? 방 같이 쓰자고?”
“우와…… 진짜 큰일 났다. 잠깐만.”
여전히 장난기가 그득한 우준과 달리 혜윤은 다급했다. 싱글벙글 쳐다보는 눈을 가볍게 무시한 그녀가 민우의 번호를 꾹 눌렀다.
-……응. 혜윤아, 출발은 했어?
“네. 지금 가는 중이에요. 그런데 선배, 일행이 한 명 더 늘어서요. 3일 정도 방이 하나 더 필요한데…….”
급한 마음이 가벼운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본론부터 던지기 바빴다.
-아…… 오늘은 추가 인원이 많아서 남은 방이 없는데.
“엄마야…….”
-아니지? 지호 씨 쪽에서 신청한 방은 남는 거잖아. 안 올 거니까. ……안 오겠지? 그쪽에서 방 3개 신청했거든.
“그럼 제가 물어볼게요. 괜찮으면 하나 쓰고 싶어요.”
-그래.
민우와의 통화가 끝나자 혜윤은 골똘히 생각했다. 지호에게 연락하자니 이건 매니저의 영역 같았다. 큰 결심을 내린 엄지손가락이 봉기의 번호를 톡 스친다.
신호가 가는 순간에도 괜히 무서웠다.
***
같은 시간, 지호는 꽉 막힌 도로 안에 갇혀 있었다. 저 멀리 차 사고가 났는지 조금 빠른 차선으로 보인다 싶으면 서로 끼어들기 바빴다.
한참을 멈춰 있다 겨우 엉금엉금. 또다시 멈춤.
스타일리스트들은 그를 치장했고 지호 역시 다음 인터뷰와 상영회 준비로 읽을거리들에 집중했다. 운전대를 잡은 봉기만 화가 잔뜩 쌓이는 상황이었다.
Rrrr- Rrrr-
“네. 작가님.”
도로 상황에 한껏 성난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높았다. 그랬기에 지호의 시선도 단번에 끌 수 있었다. 지호가 익숙한 단어에 대뜸 봉기를 봤다.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네. 말씀하세요.”
-다른 게 아니라 저희 부산 숙소 말인데요.
“네…….”
조심스러운 혜윤의 목소리에 그도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를 건넨 건 ‘네.’ 한마디뿐이었다. 옆 차가 바싹 붙어 앞으로 끼어들자 봉기의 감정이 다시 거칠어진다. 클랙슨을 누르는 손에 힘이 가득했다.
“몇 대를 끼워주냐. 양심 좀 있어라 진짜!”
-……네?
“아, 미안해요. 차가 막혀서. 그런데 부산 숙소라고 했나요?”
겁을 먹은 건지 더 작아진 혜윤의 목소리에 봉기가 얼른 예의를 갖췄다. 지호는 눈빛만큼 집중력 또한 매우 깊어진 상태였다.
“지호야, 고개 저쪽…….”
“잠깐만.”
지호가 반대쪽 얼굴로 향하던 스타일리스트의 손을 살짝 거절하며 손에 쥔 인터뷰지를 내려놓았다. 룸미러에 비치는 봉기의 얼굴을 보니 혜윤이 한창 이야기 중인 것 같았다.
-네. 남자인 친구가 한 명 같이 가서요. 방이 하나 더 필요한데…… 지금 남은 게 지호 씨네 배정된 방이 전부라고 들어서요.
“아…….”
옆에서는 끼어들려고 하지, 사방에서 경적은 신경질적으로 울리지, 그 와중에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는 세상 작고 조곤조곤하지. 사실 봉기는 그녀의 속삭임이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방 하나만 3일 정도 빌려 쓰고 싶은데요. 불편하시면 저희 방에서 재우거나 다른 숙소를 알아봐도 돼요. 여쭤만 보는 거예요.
“아니에요. 쓰셔도 돼요. 저희야 뭐…… 이번 주는 서울에 있을 텐데.”
-와, 감사합니다.
앞차가 조금씩 기어나가자 봉기가 서둘러 차를 붙였다.
“아이고, 내가 지금 정신이 없네. 그럼 또 필요하신 거 있으면 연락 주세요.”
-네. 끊을게요.
전화를 끊자 완전히 자유로워진 목소리가 신나게 혼잣말을 이었다.
“간다, 가! 나도 옆 차 끼워주는 거 싫은 사람이야.”
짧게 액셀을 끊어 밟는 봉기를 보며 지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늘 그렇듯 차분하다.
“……작가님?”
“어? 어.”
“왜?”
“아, 숙소 때문에. 남자친구랑 같이 가는데…….”
“뭐?”
그의 박살 난 차분함이 유리 조각처럼 봉기의 등 뒤에 박혔다. 등받이에서 떨어져 나간 지호의 상체가 운전석 쪽으로 좀 더 가까워졌다.
“아니 아니. 남자인 친구. 아무튼 둘이 다른 숙소를 알아보는데…… 아닌데? 뭐라고 했더라?”
지호의 집요한 시선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알려주고 싶었지만 봉기 역시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짜고짜 결말을 던졌다. 안 그러면 제 뒤통수가 뚫릴 것 같아서.
“아무튼 우리 방 하나만 주면 해결된 거라고 했어. 별일은 아니었던 것 같아.”
“…….”
지호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벌어진 입 사이로 새는 바람과 함께.
‘매우 별일 같은데.’
혹시 차 안에서 잠이라도 잘까 싶어 내내 혜윤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밤새 피곤했을 테니까. 하지만 깨어 있는 것도 알았고, 들어야 할 일도 생긴 것 같으니. 그가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최대한 간단히 묻기로 했다. 이것보단 긴 해명이 오길 바라면서.
[자, 상황 설명 시작. (오후 2:30)]
지호의 혀끝이 입 안을 꾹 찔렀다. 그리고 그런 그를 쭉 살피던 스타일리스트가 다시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대체 이 완벽한 작품의 어디를 덧칠해야 하는지 늘 아리송했지만, 요즘은 특히나 더 그랬다.
“지호야, 너 요즘 왜 이렇게 안색이 좋지?”
“내가?”
“응. 어우…… 볼 때마다 놀랄 정도로. 피곤한 것 치고는 너무 좋잖아?”
“글쎄…….”
“영화가 잘돼서 그런가?”
가벼운 대화가 드문드문 오간 지 10분이 넘어갈 무렵, 그의 핸드폰에 새 메시지가 떴다. 그리고 화면을 읽던 지호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진짜…….”
낮은 혼잣말을 흘리는 입매에 미소가 흘렀다.
[1. 원래 혜윤, 민주, 우준까지 3명이 함께 출발하기로 함. 2. 그런데 민주가 개인 일정으로 며칠 늦게 오기로 함. 3. 민주와는 한방을 쓰려고 했는데……]
매우 긴 글에서 노란 병아리가 쉼 없이 삐약삐약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추가된 짧은 메시지에 그의 입꼬리가 조금 더 확실히 올라갔다.
[상황 설명 끝. 추가 질문 환영. (오후 2:49)]
“응? 뭔데 그래? 재밌는 거야?”
그 멋들어진 미소를 흐뭇하게 보던 스타일리스트가 관심을 보였다.
“아니. 귀여운 거.”
의문스러운 대답이었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얼굴이 그림 같아서 절로 끄덕여진 것도 있었다.
“하아…… 그나저나 빨리 부산 가서 바다 보고 싶다.”
밖으로 빠져나온 속마음을 옆에 둔 채, 그의 얼굴에서 손을 내린 그녀가 꽉 막힌 차도를 봤다. 지호도 같은 곳을 쳐다보다가 눈을 돌렸다.
“그러게. 나도 빨리 가서…… 보고 싶다.”
목적어를 건너뛴 대신 혜윤에게 온 메시지를 다시 한번 내려봤다.
***
[방 3개 다 줄 테니까 작가님 방엔 1초도 들이지 마요. (오후 2:57)]
지금 막 도착한 답장을 보다가 혜윤이 수줍게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비치는 제 미소가 꽤 마음에 들었다. 창밖으로 추운 겨울 풍경이 끝없이 스쳐 갔지만 행복이 물든 얼굴은 따뜻해 보였다.
잠시 그 기분을 접고 그녀가 우준을 봤다. 모든 문제를 해결했기에 우준도 걱정하지 말라는 뜻에서.
“우준아, 너 지호 씨 방 쓰면 되겠다.”
“하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이런 상황 결국엔 올 줄 알았다고.”
하지만 오히려 걱정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착각은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혜윤은 티셔츠를 목 위로 바짝 올리는 그의 손놀림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휴, 바보 같은 놈. 지호 씨 오고 싶어도 못 와.”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때릴 가치도 없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