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시차
(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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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시차
2022.11.20.
부산에서의 첫 야외 촬영.
혜윤의 촬영은 8시부터 시작되었다. 진짜처럼 보이게 만든 세트장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 펼쳐지는 곳에서 하는 연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늘의 색이 바뀌고 저 멀리 새소리,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이 느껴지는 이곳.
서울에서의 촬영과는 너무 다르게 느껴졌다.
“컷! 좋아요. 다음 씬 넘어갈게요.”
우준이 혜윤에게 다가와 대본과 물을 건넸다. 제게 물병을 주면서도 눈이 마주치는 스태프마다 눈인사를 하는 게 보기 좋았다.
“우준아, 피곤하지 않아? 차에서 조금 쉬어도 되는데.”
“피곤은 무슨. 운동 조금 가르쳐 줬더니 형들이 나 되게 좋아해.”
“큭큭. 진짜 친화력 대장이네.”
아침부터 몇 시간 넘게 진행된 촬영에도 우준의 목소리는 참 시원했다. 혜윤이 물병을 다시 잠그며 우준을 따뜻하게 훑었다. 고맙다고 말을 하면 간지럽다고 싫어할 게 뻔했기에 눈길로 마음을 전했다.
“아무튼 불편한 거 있으면 꼭 말해. 알았지?”
“내 걱정은 말고. 근데 참…… 신기해. 여전히 쪼끄만데.”
“응? 뭐가?”
우준은 혜윤이 돌려준 물병은 받았지만 되묻는 말까지는 받아주지 않았다. ‘네가 대견해 보여서.’라고 말하면 너무 신나 할 것 같았다. 저 조막만 한 손으로 아프지도 않게 툭툭 때리면서 누나라고 부르라고 하겠지 싶었다.
그렇다면 말해 줄 수 없지.
“그런 게 있어. 이제 금방 점심시간이다. 남은 것도 잘하자.”
“응.”
혜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준도 천천히 카메라 앵글 밖으로 빠져나갔다.
쉼 없이 이어진 촬영은 1시가 되어서야 멈췄다. 점심시간. 차 안에는 우준이 미리 받아둔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도시락 뚜껑을 열려던 혜윤의 손이 갑자기 방향을 확 틀어버린다. 촬영 내내 차에 놓아둔 핸드폰이 떠올랐다.
[야외 촬영은 잘하고 있어요? 힘들 텐데 걱정이다. (오전 9:05)]
지호의 메시지가 자신을 몇 시간째 기다리고 있었다. 바깥바람에 살짝 차가워진 손끝이 언제 그랬냐는 듯 따뜻하게 녹는 것 같았다.
[하나도 안 힘들어요. 새로운 곳이라 신기하고. 지호 씨는 오늘도 바쁘겠네요. (오후 1:08)]
기분 좋게 제 마음을 보내고 나니 그 위에 자리한 어젯밤 메시지들이 보였다. 입술을 꾹 다물며 좋았던 기분을 안 뺏기려 애써보았지만 몇 조각은 내줘야 했다.
그 메시지들도 지금 같았기 때문이었다. 겨우 느지막이 서로에게 도착하는 식이었다. 서울과 부산 사이에 시차가 있는 것처럼.
[이제 막 숙소 도착했어요. 방 잘 쓸게요. (오후 7:31)]
[너무 늦게 봤다. 잘 것 같아서 내일 연락할게요. 잘 자요. (오전 12:23)]
“장혜윤, 밥 빨리 안 먹으면 혼난다.”
“응…… 먹을 거야.”
우준의 엄포에 혜윤의 고개가 힘없이 끄덕여졌다. 하지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다 한 번 더 바라봤다. 어젯밤 지호의 마지막 메시지를.
자신이 확인한 건 5시간도 더 지난 아침이었지만 그래도 믿기로 했다. 잘 자라는 그의 인사 덕분에 푹 잘 수 있었던 거라고. 참 멀리서도 내 밤을 지켜주었다고.
똑똑-
“혜윤아.”
그때 조수석 쪽 창문을 두드리며 민우가 그녀를 불렀다.
“네. 선배.”
혜윤이 서둘러 창문을 내리자 그 틈에 민우와 우준이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목요일은 촬영을 못 할 것 같거든?”
“왜요?”
살짝 커진 눈이 민우를 향했다. 이 상황이 탐탁지 않다는 건 민우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의 입에서 약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날 부산에 호우주의보래.”
“으아…….”
“수요일 오후부터 내린다고 하니까 그전까지는 최대한 많이 찍는 게 좋을 것 같아.”
혜윤은 조용히 동의했다. 젓가락질을 멈춘 우준도 민우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듣고 있었다.
혜윤의 부산 촬영 일정은 총 3주. 그중 이번 한 주 동안은 지호와 함께하지 않는 모든 장면을 찍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이번 주는 촬영 시간을 조금 늘리고 싶은데 괜찮지? 6시부터 시작하자. 끝나는 시간도 조금 뒤로 빼고.”
“네, 저는 좋아요.”
그녀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민우가 살짝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혜윤의 차에서 돌아온 민우의 표정이 여전히 좋지 않자 조연출이 도리어 목소리를 높였다.
“감독님, 그럼 어차피 목요일 어그러진 거 이참에 회식 한번 해요. 비 오는 날 고기 구우면서 술 마시면 최고지. 이런 기회가 어딨다고.”
“그럴까…… 그럼 한번 말은 꺼내봐야겠다.”
민우가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
다음 날 아침. 5시에 눈을 뜬 혜윤은 이른 아침부터 시무룩했다. 잠이 덜 깬 눈가에 억울함이 그렁그렁했다.
“아…… 뭐가 자꾸 이래…….”
핸드폰 화면 속에 적혀 있는 글자들. 자정 넘어 온 지호의 부재중 전화 한 통과 짧은 메시지가 원인이었다.
[목소리 듣고 싶은데 내가 자꾸 시간을 못 맞추네. (오전 12:32)]
흐릿한 눈에도 그의 아쉬움이 또렷이 보였다. 웬만해서는 투정 한 번 없는 사람이 그러니 더더욱. 사실 시간은 지호가 맞출 게 아니었다. 그보다 일찍 끝나는 자신이 맞춰야 하는 거지.
“음…… 한번 해보자는 거지…….”
그래서 슬슬 잠이 깨는 것과 동시에 혜윤의 마음속에서는 다른 아이도 깨어나고 있었다. 모처럼 만에 의지가 활활 불타오르는 아이가 씩씩거리는 중이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다짐과 함께.
오늘은 늦게 자더라도 꼭 지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마음속의 아이는 씩씩거리다 못해 벌써부터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혜윤 역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늘은 꼭 받을게요. 끝나면 연락해요. (오전 5:07)]
***
“으읏!”
“피곤하지? 오기 전에 운동 좀 시켜줄 걸 그랬다.”
우준이 잠시 눈을 감은 혜윤의 어깨를 꾹 눌렀다. 놀라고 아픈 탓에 인상이 확 찡그려졌지만 계속 눌러주니 조금씩 시원한 기분이었다.
촬영 시작 12시간째. 오늘은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고는 버리는 시간이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촘촘하게 짜여 있었고 배우를 포함한 제작진 모두 실수가 없었다.
바짝 오른 긴장감, 제법 쌀쌀해진 날씨, 거기에 피곤함이 겹쳐지니 몸이 겨울을 더 차갑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간간이 덜덜 떨렸다.
“참, 민주 답장 왔다. 그럼 월요일에 일찍 오겠다는데 너 진짜 괜찮겠어?”
“응! 당연하지.”
퍼뜩 떠오른 민주의 메시지에 우준의 미간이 좁혀진다. 그 걱정스러운 얼굴에 혜윤이 조금 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피곤함도 달랠 겸 큰 눈을 조금 더 크게 떠 보이기도 했다.
혜윤의 열띤 제안으로 민주의 부산행 일정이 늦춰진 것이다.
본래 주말에는 촬영이 없고 비 소식으로 목요일 촬영마저 취소된 터. 스타일링이 크게 필요치 않은 자신을 위해, 그것도 오직 금요일의 한나절을 위해, 민주가 종종걸음으로 내려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래도 민주가 빨리 오는 게 좋지 않을까? 얼른 와서 조금이라도 꾸며줘야지. 이렇게 못생겼는데.”
“이게 진짜…….”
“촬영 다시 들어갈게요!”
스태프의 우렁찬 목소리에 우준이 익살맞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되돌아가는 우준의 그림자가 석양을 받아 길게 늘어졌다.
붉게 물든 하늘빛이 혜윤의 광대 위에도 살짝 내려앉았다. 이제 한두 시간만 지나면 끝이라며 그녀를 달래 주는 것 같았다.
***
Rrrr- Rrrr-
혜윤은 최대한 노력했다. 8시 넘어 촬영이 끝난 뒤, 샤워를 할 때 빼고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잠들지 않기 위해 이미 달달 외운 대본을 다시 또 보고, 가볍게 스트레칭도 해보고.
Rrrr- Rrrr-
잠든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이 울리는 것처럼 제 마음속의 아이가 망치로 그녀의 온몸을 쾅쾅 때렸다. 제발 일어나라고.
-……여보세요.
“오, 받았다.”
자정이 아직 안 된 시간. 지호는 한 번 더 신호가 가면 전화를 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수화기 너머의 작은 목소리가 더 애틋했다.
-…….
“……자요?”
물론 작다 못해 결국 멈춰버린 것 같았지만.
-……아니요.
“큭큭. 잠꼬대하는 것 같네.”
깊은 밤에 푹 빠져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꾸역꾸역 말을 잇는 혜윤이 기특했다. 지호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노력한다고 해서 끝나는 시간이 당겨지진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자정을 넘기진 않았다. 그리고 운 좋게 짧은 말 한마디라도 들었으니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욕심부릴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그만 자자. 내일 통화하면 되니까.”
-……아니요. 내가…… 이 전화 받으려고…… 아까…… 어제는…….
“아이고, 졸려라…….”
지호는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혜윤의 마음속에 몽롱한 아이가 대충 아무 말이나 주섬주섬 주워 입 밖으로 던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정말 끊으려고 했지만.
-흐음…… 하고 싶은 말…… 많은데…… 나…….
하고 싶은 말이라는 소리에 멈췄다.
“응. 해요. ……다 들어줄 테니까.”
그런 거라면 정말 다 들어주고 싶었으니까. 뭐든지.
-내가…….
“응.”
-……보고 싶다고요.
“…….”
-지호 씨…… 많이…….
전파가 겨우 이어지는 전화처럼 드문드문.
혜윤은 하고 싶은 말이라면서 듣고 싶은 말을 해 줬다. 늘 손톱만큼만 기대해야지 싶으면 어떻게 알고 양 손바닥에 가득 쥐여주는 여자.
“……아무렴 나만 할까.”
잠에 완전히 취해서 현실인지 꿈인지도 모를 곳에 있을 혜윤은, 철저히 현실에 서 있는 자신에게 꿈같은 말을 건넸다.
보고 싶은 마음이 떨어진 거리만큼 길게 늘어나는 것 같았다.
-…….
“……잠들었네. 우리 혜윤이.”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는 더 이상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집중해야만 겨우 들리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전부였다. 지호는 그 희미한 숨결을 10분이 넘도록 들었다.
***
“이게 무슨…….”
잠에서 깬 혜윤의 눈이 단숨에 초점을 찾았다. 핸드폰에 적힌 어젯밤 지호와의 통화 기록.
무려 17분 53초의 시간.
‘세상에…… 20분 가까이 통화를 했는데 2초도 기억이 안 난다고?’
너무 당황스러워 목덜미까지 소름이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혜윤의 조그마한 엄지손가락들이 핸드폰 속 자음과 모음 위에서 한참을 머뭇댔다.
기억을 전혀 못 하는 건 큰 실례 같은데, 그렇다고 다 아는 척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되고. 답답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꼭 깨물다가 결국 실토하는 쪽을 선택했다.
[지호 씨, 어제 통화했었나 봐요. 정말 미안한데 나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잠결에 받아서. 시간도 길던데 제가 이상한 말 한 건 아니죠? (오전 5:10)]
“하아…….”
완벽히 전송된 메시지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서울과 부산의 시차를 고려했을 때 적어도 3시간 이상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의 답이 올 때까지.
슥-
그런데 그녀의 메시지 밑에 바로 새 메시지가 밀려 들어왔다. 곧장, 소리도 없이.
[기억 못 하는구나. 어제 보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였어요. (오전 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