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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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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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죄송합니다
2022.11.23.
“으앗!”
정말 지호의 답장이라는 것에 놀랐고 그 내용은 더 경악스러웠다. 혜윤의 손이 통화 버튼으로 급히 향한다. 하지만 덜컥 멈추기도 했다.
이 시간에 깬 건 분명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저보다 더 오랜 시간 시달리며 일하는 지호였으니 좀 더 잠을 잤으면 싶었다.
하지만 또 하나 더해지는 이야기.
[집에 자주 오라고 했었나? 아니다. 같이 살고 싶다고 했었나. (오전 5:11)]
“우와! 말도 안 된다!”
그녀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아는 지호였다. 그제야 혜윤의 손이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른다.
-큭큭. 바로 전화 오네…….
신호가 채 한 번도 가지 않았을 때 피곤에 잠식된 목소리가 들렸다.
“저거 진짜예요? ……지금 자다가 받은 거죠?”
-네…… 잘 잤어요?
“……네.”
혜윤은 힘이 완전히 빠진 그의 목소리에 젖어 드는 것 같았다. 잠의 무게에 짓눌려 느려진 어조마저 너무 듣기 좋았지만, 조금 어른스러워지기로 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건 지호의 휴식이라고.
-……끊을 생각하지 말고.
“아…….”
그렇지만 상대는 더 어른스럽고, 더 빨랐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제 못한 이야기 해봐요…… 야외 촬영은 괜찮았어요?
“…….”
-얼른…… 궁금하다.
“……네. 그런데 부산은 오늘부터 비 와서…….”
그래서 그냥 아이처럼 굴기로 했다. 지호가 내민 손을 덥석 잡은 채 혜윤은 며칠 동안의 일상을 쫑알거렸다. 수화기 너머로 간간이 들리는 나른한 웃음소리, ‘진짜?’ ‘그랬구나.’ 같은 짧은 호응만으로도 이렇게 기쁠 수 있다니.
혜윤은 이 아침,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
결국 이날의 촬영은 오후 4시를 겨우 맞이하며 끝났다. 하늘이 내일의 호우를 위해 아침부터 먹구름을 잔뜩 몰고 온 탓이었다. 저녁처럼 어두운 오후 2시를 지나, 3시부터는 토도독토도독 비가 떨어지고야 말았다.
내일까지의 계획이 모두 어긋났기에, 장비를 정리하는 4시의 표정들은 비구름처럼 무거워 보였다. 하지만 7시를 앞둔 지금은 모두가 하얀 뭉게구름 같다.
부드럽고 유쾌하게 들뜬 얼굴들.
어두운 유리 벽 너머의 빗소리와 실내의 고기 굽는 소리, 웃고 떠드는 소리.
혜윤 역시 즐거운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우준과 통화를 하면서도 눈은 신기한 듯 회식 분위기를 구경했다. 그 와중에 몸을 손바닥으로 슥슥 문지르기도 했다. 비 때문인지 그녀의 몸이 으슬으슬 추위를 느꼈다.
“걱정되니까 서울 도착하면 꼭 연락해. 알았지?”
-내가 비에 떠내려갈까 봐 걱정된다는 거야?
“큭큭. 혹시 모르잖아…….”
우준의 되묻는 목소리에 터무니없다는 감정이 선명했다. 장난기로만 가득했던 통화가 끝나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때, 작은 손이 한 번 더 화면을 밝힌다.
[부산은 비 정말 많이 올 건가 보다. 지금도 와요? (오후 3:40)]
[네. 그래서 촬영 일찍 끝났어요. 저녁에 다 같이 회식할 것 같아요. (오후 4:55)]
2시간 전에 보낸 메시지는 아직도 지호의 핸드폰 속에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네. 거기 맞아요. ……거의 다 왔네요? 조심히 들어와요.”
혜윤이 근처에서 크게 울리는 민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이목만 끈 건 아니었는지 다른 자리에 앉아 있는 조연출이 턱을 슬쩍 치켜드는 게 보였다. 취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목소리가 조금은 커져 있었다.
“차도혁 씨 영화 팀? 되게 빨리 왔다.”
“응. 비가 심해질 것 같아서 시간 조절했나 봐. 시영할 때 인사하는 걸로 다 바꿔서 진행했대. 빨리 서울 올라가려고.”
“그래도 그 와중에 여긴 들렀다 가네요? 다들 감독님한테 눈도장 좀 찍으려고?”
“눈도장은 무슨. 겸사겸사 인사하고 가는 거지.”
툭툭-
그때 제 왼팔을 살포시 두드리는 손길. 시선을 돌리자 여자 스태프가 앞접시에 고기를 놔주고 있었다. 그 상냥함을 조금이라도 되돌려주고픈 마음으로 혜윤이 생긋 웃었다.
“혜윤 씨, 그런데 민주 씨는 오늘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조금만 더 있다가 오기로 했어요. 다음 주 월요일에 오기로.”
젓가락으로 집은 고기를 보며 작은 입이 소리도 없이 ‘우와.’ 움직였다. 여자 스태프 몇몇이 그 생기에 작게 미소 지었다. 모두가 대충 혜윤에 대한 파악이 끝난 듯싶었다.
조용조용 크게 나서지 않을 뿐이지, 어디든 부드럽게 융화되는 사람이란 걸.
“그런데 민주 씨가 많이 걱정될 것 같아요. 혜윤 씨 혼자 둬서.”
“그러게. 동갑인데도 혜윤 씨가 동생 같아.”
“에이, 사실 제가 민주보다 생일도 두 달이나 빨라요. 그래서 훨씬 언니인데.”
혜윤이 오물거리던 고기를 꿀떡 삼키며 의기양양한 목소리를 냈다. 작은 두 달을 어지간히도 강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곧장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큭큭. 이러니까 걱정하죠. 두 달이 아니라 두 살 많았어도 걱정했을 거야.”
“맞아. 혜윤 씨는 혼자 두기엔 조금…… 불안해. 귀여워서.”
“전혀 아닌데.”
모두의 끄덕임과는 달리 그녀 혼자만 열심히 도리도리했다. 풀어둔 갈색 머리칼이 부드럽게 나풀거렸다.
그리고, 벌컥 식당 문이 열리며 수런대는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안녕하세요!”
“오! 다들 오셨네. 찾기 어렵진 않았죠? 식사들은 하셨어요?”
“아니요. 급하게 가느라 차에서 때우려고요.”
“에이, 그러지 말고 여기서 조금 먹고 가요. 30분도 안 걸린다.”
식당 안에 있는 모두가 새 얼굴들에 반응했다. 민우가 맞이한 사람들이 배우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나같이 정갈한 아름다움들. 남자 넷과 여자 둘의 미모가 전부 그랬다. 그리고 그중에 조금 더 시선이 가는 한 사람.
혜윤의 눈이 그래도 잠시나마 헤아려본 얼굴 위에 머무른다. 눈이 마주친 2초, 말없이 주고받은 가벼운 인사.
도혁과 혜윤이 고개를 까딱이는 그 잠깐에 민우까지 얽혀들었다.
“혜윤아, 잠깐 이쪽으로 와 볼래?”
콕 집어 혜윤을 향해 손짓하는 민우 덕분에 배우들의 관심이 한곳으로 집중됐다. 그녀는 시선에도 점성이 있는 것 같았다. 하나같이 온몸에 척척 끈덕지게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여배우들의 눈길이 특히 그랬다.
“온 김에 안면 트면 좋잖아요. 여기는 우리 드라마 장혜윤 작가님.”
“……안녕하세요.”
그 눈길은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여전했다. 모든 집중력을 눈에만 모은 통에 입은 움직일 생각들이 없어 보였다. 혜윤의 작은 인사에 빠른 대답이 안 들리자 그 틈을 남배우들이 서둘러 메웠다.
“와, 이렇게 뵙네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진짜 작가님 맞아요? 너무 예쁘신데요.”
“그렇죠? 장 작가가 연기도 꽤 잘해.”
소문을 말씀이란 단어로 바꿔 말해 주는 것도 나름의 배려인 듯했다. 낯간지러운 칭찬이 가득인 대화들. 혜윤이 부끄러운지 입술을 작게 모았다.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기도 했고.
간단한 인사도 끝났으니 조심조심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오늘 지호 씨는 없나 봐요?”
반가운 이름 앞에 굼떠지는 걸음. 그래도 몇 발은 더 옮긴 뒤에 다시 그곳을 돌아봤다.
“응. 지호 씨도 영화 홍보로 바쁘잖아요. 이번 주는 촬영이 없어요.”
“감독님, 지호 씨는 홍보 좀 살살 하라고 전해 주세요. 거긴 이번 주에 손익분기점 넘길 것 같대요. 내일이면 400만 넘을 거라던데.”
“진짜? 굉장하네…… 일주일도 안 됐는데.”
지호의 이름이 나오자 배우들의 얼굴에 비슷한 감정이 샘솟았다. 혜윤은 떨어진 거리에서 선이 고운 얼굴들을 들여다봤다. 모두 호기심이 둥둥 떠올랐는데, 그 강도가 이번에도 여배우들에게선 격정적이었다.
“아…… 나도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실제로 한 번도 뵌 적 없어서.”
그게 사실임을 증명하듯이 곧장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왜? 너도 죄송합니다, 소리 듣고 싶어서?”
“큭큭. 나도 알아. 안 선배님 별명이 ‘죄송합니다’라며? 얼마나 많이들 들었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어?”
혜윤이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조금 더 바짝 다가가고 싶어 하는 발을 달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지호 씨가 사과할 만한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닌데…….’
지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명 같아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공통의 관심사였는지 두 여배우의 목소리가 조금은 높아져 있었다.
“이 바닥에서 이름 좀 날린다 싶은 여자들은 죄다 도전했다는 거지. 다들 자기는 될 줄 알고. 번호든 시간이든 뭐 하나라도 물어보면 1초컷이잖아. 죄송합니다. 끝.”
‘죄송합니다’를 말할 땐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그를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적당히 예의 있고, 적잖이 차갑게.
더는 말을 이을 수 없게.
“지금까지 번호 딴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핸드폰 없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는데.”
“근데 난 그게 이해가 안 가. 죄송합니다, 라고 했어도 나 같으면 더 들이대 보겠다. 몇 번 더 모양 빠지면 어때? 무려 안지호잖아.”
“응…… 네가 실물을 못 봐서 그래. 그냥 숨이 턱 막히게 하는 분위기가 있거든. 진짜 예의 바른데 조금…… 무섭다고 할까?”
“……무서워?”
“응. 그래서 더 섹시하기도…… 아이고,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별 뜻 없이 움직이던 그녀의 입이 차마 끝을 맺지 못한 채 멈춰버린다.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물기가 가득한 혜윤의 눈이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거리상 어쩌면 못 들었겠지, 라고 생각하기엔 눈빛이 너무나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두 여배우의 입꼬리가 민망함에 어색한 모양새로 굳었다.
사실 혜윤은 몰랐던 지호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더군다나 배우들이라서 그런 걸까. 보통 사람들보다 유려하고 선명히 읽히는 감정선이란. 거기에 발음까지 좋았으니 눈과 귀로 속내가 훅훅 들이치는 게 시원시원했다.
하지만 여배우들의 당황스러움을 봐버렸기에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돌린다. 맞물린 입가에 더 듣지 못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여기 간단하게 식사도 돼요?”
“……네?”
어느 틈에 옆에 온 건지, 도혁은 집중할 대상을 잃은 혜윤의 눈길을 제게 끌어당겼다. 낯선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혜윤은 그의 눈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이제 막 자신을 쳐다본 게 아니라는 것을.
“아…… 네. 그런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거구나.
“그럼 저쪽 테이블에 음식 시켜둘게요! 다들 천천히 오세요.”
도혁이 배우들을 향해 말을 툭 던지곤 걸음을 옮겼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혜윤도 결국엔 도혁의 방향으로 발을 돌렸다. 아직 끝나지 않은 민우와 남배우들의 대화가 혜윤의 등 뒤로 퍼졌다.
“감독님, 저 조금 섭섭해요. 들어보니까 이번 드라마 시나리오 엄청 많이 돌리셨던데 저는 아예 주지도 않으셨더라고요.”
“에이, 그런 거 아니야. 사실 장 작가 필력 자랑하고 싶어서 진짜 많이 돌려보려고 했거든. 기태 씨도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왜 안 주셨어요?”
“왜겠어…… 지호 씨가 정말 빨리 연락이 왔으니까.”
“아…….”
점점 멀어져가는 목소리만큼 혜윤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질문도 없었어요. 전화 와서는 딱 두 마디 했나? 꼭 출연하고 싶다. 장혜윤 작가님 만나게 해달라.”
그리고 어두울수록 빛나던 한 남자는, 이곳에 없음으로써 그녀 안에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혜윤의 온 가슴속에 지호만 꽉 들어차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