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 절절하고 애틋하게 (53/110)


53. 절절하고 애틋하게
20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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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혁의 영화팀들이 떠난 뒤에도 술자리는 시끌시끌 익어갔다. 열기는 이제 겨우 중턱을 넘어섰지만 혜윤은 딱 거기까지의 즐거움만 누리고 숙소로 돌아갔다. 졸음에 끔뻑대는 눈이 너무나 버거웠기에.

숙소에 돌아와 겨우 몸을 씻고 침대로 향하는 발걸음. 이른 새벽부터 켜켜이 쌓인 피로도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것 같았다. 고작 몇 걸음일 뿐인데도 참 더디고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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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회식 중? 술 안 마셨으면 좋겠는데. (오후 9:50)]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 1통은 모두 지호에게서 온 것이었다. 무거운 눈가가 어렴풋이 휘어졌다. 늘 감정을 땅 밑으로 가라앉히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보여주는 진심이란 건 참 좋았다.

걱정된다 이거지.

그러다 자연스럽게 도혁의 마지막 인사를 생각했다. 똑같은 사람의 진심을 보았을 텐데, 그가 보게 된 지호의 진심이란 건 제 것과는 많이 달랐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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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 선배님께 전해 주세요. 그날 일은…… 정말 사과한다고. 아마 이렇게 말하면 아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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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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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화로는 꼭 보겠다고 한 약속, 믿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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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믿어준다니까 더 열심히 봐야겠다.’

 
둘은 다음이 있는 사람들처럼 가볍게 웃으며 헤어졌다. 도혁은 이게 정말 안녕이겠구나 싶었고 혜윤은 진심으로 도혁의 안녕을 바랐다.

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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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파도치는 줄 알았네.”

 
창문을 살짝 열자 문틈으로 빗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부산에 도착한 지 며칠이 되도록 못 본 바다가 창문 밖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혜윤은 침대로 돌아가 리모컨을 쥐었다. TV를 끄고 비가 만들어 준 바닷소리를 흠뻑 누리고 싶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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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지만 창밖에 진짜 바다가 있었다고 해도 TV 속 가짜 지호를 이길 순 없었을 테지. TV를 끄려던 손이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발견한 보물 같은 장면. 지호의 영화 인터뷰였다.

은은한 싱그러움 사이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그윽한 남성미. 딱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짙은 올리브그린 색상의 니트와 잘 어우러졌다.

지호는 옆에 앉은 배우의 이야기에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붙어 있었다. 상대방의 말끝을 한 번 더 곱씹어 본 뒤에야 느리게 따라붙는 끄덕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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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저렇게나 멋진 사람과 함께 있었구나.’

 
괜히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의 그림 같은 외모만 알아볼까 봐. 그건 그가 가진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혜윤이 전원에 올려져 있던 엄지손가락을 옮겨 소리를 키웠다. 어쩐지 인터뷰가 끝나가는 것 같아 아쉬웠다. 그리고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대체 어찌 아는 건지, 그녀가 아쉬움을 느낄 새를 주지 않았다.

파도 같은 빗소리보다 더 낭만적인 목소리가 혜윤의 방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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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마지막으로 지호 씨도 말씀해 주세요. 지호 씨는 이번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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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했던 날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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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역시 개봉일만큼 떨리는 게 없겠죠?”

 
또한 그 목소리가 마음을 채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화면 속에서 기억을 어루만진 지호의 표정이 잠시 동안 깊고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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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날 정말…… 행복했어요.”

 
물감이 번져가듯 옅게 미소 짓는 얼굴에 혜윤의 코끝이 찡 울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비처럼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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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 내가 좋아요? 절절하고 애틋하게?’

 
자정을 앞둔 어느 가을밤. 아이처럼 칭얼대던 제 고백에 이어진 지호의 질문이 다시금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절절하고 애틋하게. 그땐 몰라서, 실은 아닌 것 같아서 대답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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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절절하고 애틋하다…….”

 
혜윤은 지호가 사라진 TV를 끄고는 다시 핸드폰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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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 잘 끝내고 들어왔어요. 지호 씨, 내일은 꼭 통화해요. 할 말도 있으니까. (오후 11:22)]

 
잠이 그녀를 덮치는 순간까지 지호는 메시지를 읽지 못한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오늘은 꼭 그의 꿈을 꾸고 싶다는 소망으로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오전에는 마음껏 게으름을 누리던 혜윤이었지만 오후는 달랐다.

노트북과 책 한 권을 챙겨 나와 카페에 자리 잡은 지 벌써 1시간째. 빗소리를 음악 삼아 글을 쓰고, 글을 읽고. 일과 휴식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하루는 꽤 기분 좋았다.

Rrrr- Rrrr-

물론 제일 좋은 건 기다리던 이의 전화를 빛처럼 빠르게 받을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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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빨리 받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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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신호도 안 간 것 같은데.

 
모처럼 만에 간절함의 크기에 걸맞은 최고의 속도였다. 재빠르게 수신 버튼을 누른 손이 그리 가벼워 보일 수 없었다. 글자마다 들뜨고 기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자랑하듯이 말하는 혜윤의 목소리 위로 지호의 낮은 웃음소리가 섞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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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회식은 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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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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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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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혁 씨도 다녀갔어요. 지호 씨한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전해 달랬어요. 이렇게 말하면 알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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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느리게 나오는 그의 반응에 혜윤 또한 빈칸을 붙였다. 어렵게 전했을 도혁의 사과를 지호가 조금 더 찬찬히 누렸으면 했다. 진심이 깃든 사과라는 건 제 눈에 너무 잘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대답을 보니 그는 다른 생각으로 빈칸을 채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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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제 둘이 술도 마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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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저는 고기만 잔뜩 먹었어요. 배 터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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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 마음에 드네.

 
그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 또한 진심 어린 사과보다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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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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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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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핸드폰 산 지 얼마 안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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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갑자기?

 
지호가 불쑥 튀어나온 색다른 주제에 의아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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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번호 딴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핸드폰 없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는데.’

 
그가 먼저 끊지만 않으면 오늘 혜윤의 시간은 한가득이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궁금증을 물어볼 수도 있었다. 질문의 저의가 들킬까 봐 모처럼 만에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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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냥…… 궁금해서. 배우 하면서 핸드폰 없이 생활했었나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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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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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 마음에 드네.”

 
하지만 별 기대 없었음에도 받게 된 최고의 대답이란 건, 건조한 말투에도 이슬이 맺히게 했다. 목소리에 흡족함이 촉촉하게 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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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또 무슨 일 있었구나?

 
혜윤은 지호가 조금만 더 집중한다면 모든 걸 알아챌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녀는 제대로 된 대답을 못 한 채 노트북 자판만 타닥타닥 괴롭혔다. 그냥 넘어가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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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할 말 있다고 본 것 같은데.

 
그리고 넘어가주되 그 역시 자신의 궁금증으로 혜윤을 잡아당겼다. 사실 혜윤의 메시지는 어젯밤 잠들기 전부터 지금까지 지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비가 눈앞의 세상을 삼킨 밤을 홀로 누리며, 꼭 할 말이 있다고 말하는 여자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조마조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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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그거 그만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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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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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때 내 마음 헷갈릴까 봐 준 시간들이요, 종방 때까지. 그거 이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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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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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보기 종료.”

 
역시나 지호의 예상처럼 무거운 말이 맞았다. 제법 여유를 부릴 줄 아는 그였음에도 가뿐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워 보이는 건 혜윤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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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 씨 부산 오면 얼굴 보고 이야기해요. 이렇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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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갑자기 무섭다.

 
남자의 잠잠히 울리는 불안에 혜윤이 키득거린다. 그 여린 웃음이 듣기 좋아 핸드폰을 귀에 조금 더 붙여보자 그녀의 웃음소리 너머로 거센 빗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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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 씨, 혹시 지금 빗소리 들려요? 아닌가? 빗소리 때문에 내 목소리가 안 들리려나? 엄청 많이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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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빗소리도 들리고 다 들려요. 그런데…… 아까부터 목소리 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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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왜요?”

 
더욱이 통화를 시작한 순간부터 그를 예민하게 만들던 찜찜함도 선명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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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잠겼잖아. 혹시 감기 걸렸어요?

 
핸드폰을 쥔 지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미간도 성이 난 듯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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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서 조금 추웠나 보다. 우와, 나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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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신기해하는 거 예쁘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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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괜찮아요. 챙겨온 약도 있고 아프면 바로 병원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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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고 지금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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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정함만 건네던 사람이 보여주는 단호함. 혜윤은 입꼬리가 축 처졌다. 몸이 조금 추위를 느낄 뿐 아픔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비를 뚫고 병원에 가야 한다니. 주사를 맞아야 한다니. 처진 입꼬리 가운데에 울상인 턱이 도톨도톨 일어났다.

하지만 말이 없는 대답의 의미를 알면서도 지호 또한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껏 낮게 깔린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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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듣자.

 
짧은 말 한마디로 전해지는 묵직한 진심. 혜윤의 아랫입술이 뽈록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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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요.”

 
지호는 혜윤의 찌푸린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글자마다 꼭꼭 힘주어 투덜거리는 게 참 귀여웠다. ‘착하네.’라는 말과 함께 조금 긴 웃음이 이어지자 혜윤도 결국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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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도 눈을 뜨기 전인 새벽 5시.

하루의 시작과 함께 혜윤이 부여잡은 단어는 고마움이었다. 앞으로 지호의 말을 잘 들어야겠다는 엉뚱한 다짐도 섞여 있었다.

밤새 어찌나 끙끙 앓았는지 옆방에서도 제 기침 소리에 잠을 뒤척이진 않았을까 걱정스러웠다. 병원에 다녀온 게 행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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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아…….”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다시 한번 목청을 가다듬어 본다. 따끔거리는 통증을 비집고 나오는 목소리들이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쇳소리처럼 조금 거칠고 탁한 기운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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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만 참자. 주말에 잘 쉬면 되니까.’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응원의 고갯짓을 했다. 오늘이 금요일인 게 정말 다행스러웠지만, 시작도 안 한 하루에 벌써 지쳐버린 것 같아 걱정스럽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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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촬영 여기까지 할게요! 주말 잘 쉬세요!”

 
꼬박 14시간의 촬영을 끝으로 모두의 이번 주 일정은 끝이 났다. 여기저기 약간의 피로가 보였지만 마음이 가벼운 건지 촬영장을 정리하는 손 모양들이 날렵했다.

그 가벼운 몸짓들 사이에 유독 무거워 보이는 한 사람 곁으로 민우가 걸어갔다. 아픈 건 혜윤이건만 민우도 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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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윤아, 너 감기 심한 것 같은데. 약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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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제 병원도 다녀왔어요. 걱정 안 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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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주말에도 푹 쉬어. 나 이틀 내내 부산에 있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제법 그럴싸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뒤돌아 차에 올랐다. 재킷 안에 입은 교복 셔츠가 식은땀으로 젖은 것 같았다. 저녁 바람에 땀이 식자 온몸이 추위를 더욱더 격하게 느꼈다.

방에 들어가 천근만근인 몸을 겨우 씻고는 약을 꿀꺽꿀꺽 털어먹었다. 더는 아침만큼의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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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는 어때요? 좀 나아졌어요? (오후 3:31)]

 
침대에 누워 몇 시간 전에 온 지호의 메시지를 들여다봤다. 마음 쓰지 않게끔 가볍게 답하고 얼른 잠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도 이렇게 무거워질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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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주말까지 잘 쉬면 될 것 같아요. (오후 9:07)]

 
Rrrr- Rr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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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호의 이름과 함께 잔잔히 진동하는 핸드폰. 혜윤은 그저 바라만 보았다. 목소리를 들려주는 건 걱정을 들려주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혜윤이 미안한 마음을 담아 핸드폰을 꼭 쥐었다.

***

지호는 영화관 측이 마련해 준 간이 대기실에 앉아 스타일리스트의 손길을 받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눈과 신경은 모두 핸드폰 화면에 꽂혀 있었다. 지금 막 도착한 혜윤의 메시지에.


[오늘 조금 피곤해서 내일 연락할게요. (오후 9:13)]

‘감기 심해졌구나.’

 
지호의 입매가 눈빛만큼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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