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나 진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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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나 진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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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나 진짜 가?
2022.12.04.
“지호야, 이거 무대인사 질문들 추려놓은 거. 관객 질문이야 예측이 전부…….”
“형.”
“응? 왜.”
봉기의 손이 인터뷰지를 들고 무안하게 붕 떠 있었다. 말해 주지 않아도 혜윤의 모든 것을 알아내는 지호처럼, 봉기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호의 정신이 다른 데 쏠려 있단 걸 잘 알 것 같았다.
하지 않았던 행동들을 자꾸 보였으니까. 지금처럼.
“……우리 일요일 일정 도저히 못 빼나?”
“뭐?”
“부산에 빨리 내려가야 할 것 같아서. 알아봐줘.”
봉기가 벙한 눈으로 지호를 쳐다봤다. 주춤거리던 스타일리스트의 손놀림도 멈추고야 말았다.
봉기는 이 상황이 마냥 낯설었다. 지금껏 지호의 입에서 스케줄 조정이란 단어는 나온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일을 좀 줄이라고 해도 괜찮다던 놈이. 더군다나 당장 이틀 뒤에 단체로 잡힌 일정을 빼달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절대 모를 리 없었다.
남에게 피해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저런다는 건, 저러지 않고서야 못 참겠다는 거겠지.
“……부탁할게.”
그래,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거지.
봉기가 멍하니 고개를 주억댔다. 그리고는 손에 붙든 인터뷰지를 지호에게 건넨 뒤에 조용히 대기실을 벗어났다.
“아이고…… 이 형이 어떻게 비벼볼 수 있는 거라 다행이긴 하다.”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낸 손 위로 그의 혼잣말이 떨어진다. 언뜻 웃음이 나기도 했다. 명색이 매니저에 회사 대표인데도 달라지는 지호가 괜찮아 보여서.
“네. 팀장님, 통화 괜찮으세요? 아, 어쩌죠. 지금 급하게 연락이 왔는데 일요일에 지호 드라마 촬영이 잡혀서. ……네. 지방 촬영이라 조절이 어렵다고 하네요. 방법이 없어.”
그래서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았다.
“대신 부산 쪽 무대인사를 하루 더 돌게요. 지호가 마음이 많이 쓰이나 봐요.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고…….”
***
[연락이 없네요. 전화도 안 받고. (오후 4:10)]
혜윤의 몽롱한 눈이 지호가 보낸 글자들을 느리게 읽었다. 받지 못한 6통의 전화 중 3통은 지호에게 온 것이었다. 일부러 피한 건 아니었고 아침 일찍 병원에 다녀온 뒤로는 약에 취해 잠만 잔 탓이었다.
시계는 11시를 한참 넘긴 시간과, 더불어 오늘 하루를 완벽히 감기에게 내어줬다는 안타까움을 알려주었다.
[미안해요. 종일 자느라 이제 봤어요. (오후 11:41)]
거짓이 하나 없는 문장을 보낸 뒤 그녀는 샤워를 했다. 열이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는 통에 잠옷이 땀으로 꿉꿉하게 젖어 있었다.
“와…… 샤워가 이렇게 힘든 거였나.”
젖은 머리를 잘 말린 뒤 누워야 했지만, 축축 늘어지는 몸으로 거기까지는 정말 무리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그때였다. 겨우 침대에 앉힌 몸을 눕히려던 때, 벽에 걸린 시곗바늘이 12시 25분을 가리키던 때.
‘잘못 들었나 보다…….’
이 시간에 노크 소리는 충분히 그럴 만했기에, 그녀는 다시 이불을 들췄다.
똑똑-
하지만 두 번의 반복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움직이기 싫은 마음이 삐죽삐죽 얼굴 위로 드러났다. 그녀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방을 잘못 찾아온 것 같았지만 말이다.
“으으, 누구세요…….”
달칵-
그리고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는 작게 열린 문틈 새로 흘러나갔다. 그곳에 서 있는 한 사람에게로.
한 주 내내 많이도 보고 싶었던 남자에게로.
눈앞에 있는 큰 키를 따라 시선을 올리자 그림 같은 얼굴이 자신을 지긋이 내려보고 있었다. 지호였다.
“우와…….”
깨끗하고 순진한 감탄사가 툭 터졌다. 그 잔뜩 가라앉은 기척에 지호의 미간이 깊게 구겨진다. 그는 인사도 없이 혜윤의 이마 위에 손을 얹었다.
“하아…….”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뜨끈한 열. 지호는 바위로 가슴을 짓눌린 것처럼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혜윤을 보는 눈이 늘 그랬듯 다정하지만은 않았다. 스스로에게 난 화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어떻게 여기 있어요?”
하지만 혜윤은 말긋말긋 올려다보기 바빴다. 아이같이 상황 파악은 뒤로 미룬 채 마냥 반가워했다. 제 머리 위에 올려진 시원한 손, 그가 데려온 밤바람의 냄새까지 모두 좋았다. 열이 옮겨붙은 손을 내린 지호가 문틈을 슬쩍 훑었다.
“친구분은 없어요? 감기 때문에 방 옮겼나?”
“아니요. 월요일에 오기로.”
“월요일? ……그럼 쭉 혼자 있었다고?”
그리고 혜윤은 자신의 말이 그의 화를 더 돋우었다는 걸 곧장 알 수 있었다. 지호의 차가운 눈빛에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목보다는 마음이 따끔거렸다.
“아…….”
지호가 얼마나 울분을 삭이고 있는지 온몸으로 느껴지자 ‘네.’라는 한 글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가뜩이나 작은 체구가 주눅으로 바짝 움츠러들었다. 겨우 한번 해내는 끄덕거림에 지호가 서둘러 제 마음을 다스렸다.
아픈 것도 애가 끓는데 눈치까지 보게 하다니. 스스로가 한심했다.
“일단 방에 들어가서 말해요. 여기 춥다.”
“…….”
지호가 문고리를 잡았다. 더는 놀라지 않게 본래의 따뜻함을 건네며. 그런데 이번엔 혜윤이 이상하게 굴었다. 그녀 역시 반대편 문고리를 잡고 놔주질 않았다.
“왜?”
“……월요일에 봐요. 촬영하는 날.”
문고리를 잡은 손에 온 힘을 쏟은 혜윤의 미소가 유독 희미했다. 지호는 미소 뒤에 가리고자 했던 마음을 들여다봤다. 힘없는 목소리에 담긴 속뜻이 감기를 옮기게 될까 싶은 걱정이란 걸 알았을 땐 좀처럼 참기 힘들었다.
그러자 손에 힘이 실리는 건 당연했다. 상대는 아픈 여자였으니 문고리를 잡은 몸이 공기처럼 가볍게 안겨 오는 것 또한.
“엇…….”
순식간에 활짝 열린 문 사이로 혜윤이 휘청이며 끌려 나왔다. 지호가 그 작은 몸을 기다렸다는 듯이 감쌌다. 부드러운 입술이 맞붙고 열로 뜨거워진 입 안을 가볍게 훑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극명히 다른 온도의 두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는 순간에서야 혜윤이 놀란 숨을 내뱉었다. 지호의 한 손은 여전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제 나도 옮았으니까 같이 있어도 되겠네.”
대신 아팠으면 싶은 열망이 고스란히 녹아든 시선에 혜윤의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렸다. 가뜩이나 열이 오른 뺨이 새빨갛게 익어버릴 것 같았다. 혜윤은 제 몸을 빙그르르 돌려 방으로 밀고 들어오는 그를 더는 막을 수 없었다.
“밥이랑 약은 먹었어요?”
“……네.”
지호는 천천히 혜윤의 방을 살폈다. 테이블 위에 어른스럽게 올려놓은 노트북과 대본, 포스트잇, 펜, 두 권의 책. 천진하게 던져진 초콜릿과 젤리, 과자. 그리고 볼 일이 없었으면 좋았을 약 봉투들.
연락이 닿지 않던 혜윤의 시간들이 장면마다 그려지는 것 같았다. 모든 게 제 탓 같아 지호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금방 튀어 오르기도 했다. 침대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이 맑게 반짝이고 있었기에.
작은 얼굴을 드는 것조차 버겁겠지 싶어 혜윤의 옆자리에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그런데 내일 오는 거 아니었어요?”
“네. ……목 아프겠다.”
겨우겨우 내는 목소리로 하는 말치고는 참 귀여웠지만 그래서 더 마음이 쓰렸다. 그의 손이 혜윤의 목을 살짝 눌러준다. 지호의 시선과 손길마다 애틋함이 파도처럼 너울댔다.
“말 그만하고 자요. 내일 아침에 죽 챙겨줄 테니까.”
“……네.”
“어떻게…… 같이 있을까요, 갈까요. 더 편한 걸로 말해요.”
목에 올려둔 손이 물 흐르듯 젖은 머리를 빗겼다. 혜윤은 말없이 눈을 굴렸다. 반가워서 같이 있고 싶지만, 정말 감기를 옮기게 될까 봐 같이 있기 싫고.
엷은 갈색 눈에 갈팡질팡 어쩔 줄 모르겠는 마음이 비치자 지호의 입가에 스멀스멀 미소가 번졌다. 슬쩍 고개를 기울여 그 눈을 애정 있게 들여다보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혜윤이 흠칫 놀라 쳐다보기 전에 서둘러 웃음을 숨기기도 했다.
같이 있고 싶구나.
“나 진짜 가?”
언제 즐거웠냐는 듯이 진지하게 묻는 행동이 배우다웠다. 머리가 복잡한 혜윤은 당연히 그의 장난을 발견하지 못했다. 불현듯 밀려오는 초조함에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할 뿐.
감추긴커녕 불빛을 비춰 더 환히 보여주는 진심 앞에서 지호는 몰래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한 걸음을 떼자 작고 가냘픈 손이 제 소매를 쥔다. 서둘러 표정을 다잡고 뒤돌았지만 억울함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눈엔 절대 못 당하지.
결국 참았던 웃음이 새버렸다.
“응. 옷만 갈아입고 올게요.”
끄덕끄덕 소리가 날 것 같은 움직임에 그가 조금 더 크게 미소 지었다. 들통나버린 본심이 부끄러웠던 혜윤은 물고기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
감긴 눈꺼풀 위로 스며든 빛. 혜윤은 스르르 떠진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몇 번의 끔벅임 뒤엔 시야 한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 자리하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지호는 TV도 켜지 않은 채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깨끗한 얼굴이 촉촉한 걸 보니 세안도 끝낸 것 같았다. 열꽃이 핀 제 얼굴이 부끄러워 이불을 끌어 올리려 했지만 그보다는 지호의 손이 더 빨랐다.
봉긋한 이마에 손을 올린 지호의 표정이 영 탐탁지 않은 눈치다. 이제 막 잠에서 깬 눈이 자신을 올려보자 지호도 옆으로 누워 보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의 높이가 똑같아졌다.
“……지금 몇 시예요?”
어색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혜윤이 먼저 입을 뗐다. 안 그러면 지호가 계속 쳐다만 볼 것 같았다. 지금처럼, 사람 녹아내리게.
듣는 사람도 아픈 목소리에 지호의 눈썹이 살짝 씰그러졌다.
“10시.”
“우와…… 많이 잤다.”
“잘 자야 빨리 낫지.”
지호가 흘러내린 혜윤의 머릿결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실은 잠든 모습을 꽤 오래 바라봤었다. 밤새 이따금 이어지는 기침 때문에 혜윤은 이른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든 것 같았다. 새근새근 잠에 빠진 얼굴이 참 예쁘고 기특했다.
“죽 좀 사러 다녀올까 하다가 말았어요. 또 눈 떴을 때 없으면 속상해할까 봐.”
입술을 꼭 말아둔 혜윤이 슬며시 웃었다. 언젠가 그녀 혼자 맞이했을 아침이 계속 그의 가슴에 무겁게 맺혀 있었다.
그러다 작은 머리 위를 맴돌던 손이 멈칫. 미간을 좁히며 하고 싶은 말을 추리는 것 같았다. 다시 머릿결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여전히 포근했지만 말투에는 장난과 섭섭함이 교묘히 섞여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해보니까…… 조금 억울하더라고요?”
“……뭐가요?”
“나 없을 때 마음 결정했다고 했잖아. 잘 보일 기회도 안 주고.”
“에이, 그게 뭐라고.”
혜윤이 그의 귀여운 투정에 배시시 웃었다. 도리어 자신이 지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이보다 더 잘 보일 수는 없어요.’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이어지는 지호의 말을 들어보니 그 말을 안 해 주길 잘했지 싶었다.
“그거 잠깐 무르고 오늘 점수까지 추가해요. 잘해 줄 거니까.”
이미 100점을 받아놓고도 무르라니. 그래도 잘해 준다는데 어떤 여자가 거절을 할 수 있을까.
“응?”
저렇게나 다정히 되묻는데.
“……좋아요.”
수줍은 긍정에 지호가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손등이 혜윤의 목에 보드랍게 닿았다. 조금 전의 웃음은 싹 사라지고 낮은 목소리에는 오직 애끓는 마음만 가득했다.
“말할 때 목에 힘주지 마요. 가까이 있으니까 속삭이기만 해도 돼.”
“네.”
똑똑-
그리고 갑작스러운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