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행복이 내려앉은 오후
(56/110)
56. 행복이 내려앉은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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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행복이 내려앉은 오후
2022.12.11.
또 한 번의 얕은 잠이 다녀간 것 같았다. 혜윤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조금씩 선명해지는 눈앞이 벽이란 걸 알게 됐을 무렵, 제대로 닿지 않던 소리 또한 귓가에 솔솔 불어왔다.
드문드문 사각사각, 종이 넘기는 소리. 또한 등을 쓰다듬는 크고 따뜻한 손길도.
‘……아늑하다.’
평화로이 고요가 깃든 방 안. 혜윤은 등 뒤에 있는 사람이 주는 감각들을 말없이 음미했다. 지호는 대본을 넘기는 순간에만 제 등에서 손을 떼는 것 같았다. 가볍게 등을 두드리는 소리가 멈출 때에만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토닥토닥,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
아픈 것도 잊고 꽤나 다디단 잠을 잤을 거라 확신했다. 이렇게나 느리고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 앞에서 확신이란 건 호흡처럼 쉬웠다.
하지만 이내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그의 손이 제 아픔과 걱정을 씻겨준 게 아니라 대신 쓸어 담아 가져간 건가 싶어서. 지호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서. 그건 정말 싫은데.
그제야 혜윤이 불안한 감정에 몸을 돌렸다. 뒤척이는 몸짓에 그의 손 또한 멈춘다. 그리고 지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는 간지러운 호기심만 가슴 한가운데에 퐁당 던져졌다.
‘손끝의 온기는 눈에서부터 오는 걸까?’
지호는 김이 폴폴 날 것 같은 눈으로 혜윤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 따스함을 조금도 다른 곳에 내어주기 싫어서 그녀 역시 깊은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
집중을 쏟아내는 갈색 눈동자. 지호는 그런 혜윤이 재미있는지 고개를 까딱이면서도 눈을 거두지 않았다.
간지러운 눈싸움.
그리고 이 장난을 끝내 이기고야 말겠다는 목소리가 혜윤의 귀에 흘러들었다.
“너무 등만 보여주네.”
“으아, 졌다…….”
결국 먼저 눈을 접으며 웃음을 비춘 건 혜윤이었다. 반듯하게 참기만 하는 사람이 한 번씩 보이는 서운함은 절대 이길 수 없었다. 행복이 번진 눈가가 둥그렇게 휘자 지호 역시 싱긋 웃었다.
“나도 조금 자야겠다.”
지호는 덮은 대본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자연스럽게 혜윤을 바라보며 누웠다.
최고의 집중력으로 제 눈빛을 받아내던 조금 전은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혜윤은 시선이 두 뼘쯤 가까워지자 눈을 슬쩍 돌렸다.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보르르 끓는 모양이었다.
이불을 서둘러 코까지 덮길래 틈을 주지 않고 턱까지 다시 내려주었다. 붉은 기운이 스며 있는 볼이 귀여웠다.
“이따가 저녁에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말해봐요.”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
“아…… 그건 좀 들어주기 싫은데.”
원래도 촉촉한 눈망울이 간절함으로 한껏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마에 조심히 손바닥을 올려보자 확실히 어제보다는 열이 내린 게 느껴졌다.
“그럼 밥 다 먹고 한 개 사서 나눠 먹자.”
땀에 젖은 머리가 얼굴을 간지럽히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떼어줬다. 여린 눈 속에 흡족함으로 반짝 도는 생기. 그 얼굴을 눈에 선연히 새긴 뒤에야 지호는 몸을 바로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몰랐겠지만, 갈색 눈동자의 생기는 그가 눈을 감은 뒤에야 비로소 절정을 맞이할 수 있었다. 드디어 제 차례였으니까. 보고 싶은 만큼 바라볼 수 있는.
앞머리에 반쯤 가려진 이마를 따라 가파르게 치솟은 콧날, 깔끔하고 선명한 인중 끝에 예쁘게도 올라붙은 입술. 그 유려한 곡선을 따라 턱으로, 목젖으로, 언뜻 보일듯한 굵은 쇄골까지. 누워 있는 옆선은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참 우아한 사람.
놀라우리만큼 눈부신 외모에 그의 사려 깊은 성품이 가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잘생겨서 손해를 보다니.
‘속눈썹도 참 길다…….’
혜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홀린 사람처럼 그의 검은 속눈썹에 손끝을 댔다. 톡. 톡. 동시에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
그 움찔거림에 그제야 제 행동을 자각한 그녀가 재빠르게 손을 뗐지만 그보다는 지호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더 빨랐다. 느릿하게 떠지는 눈이 언제나처럼 한 사람을 향한다.
“……나 자지 마? 같이 놀까요?”
졸음이 섞여 낮아진 목소리가 건넨 질문은 너무 달콤해서 조금 오래 귓가에 머물 것 같았다. 혜윤은 서둘러 고개를 획획 저었다. 베게 위의 바스락 소리를 뒤로하고 지호처럼 반듯하게 누워 눈을 감았다.
눈도 꼭 감았고 입도 꾹 붙였으니까, 지금 가진 행복을 조금도 안 흘릴 것 같아서 흡족했다.
스윽-
그러던 때, 목뒤로 부드러운 살결이 솜털을 쓸며 훅 밀고 들어왔다. 놀라서 눈을 떴을 땐 지호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제 품으로 폭 당겨버린 뒤였기에 눈앞엔 그의 너른 가슴만 보였다.
“응. 한 시간만 자자.”
꿈결 같은 향기와 함께 깊이 울리는 목소리. 지호가 조금 더 손에 힘을 줘 껴안자 그의 심장 소리가 쿵. 쿵. 쿵. 선명하게 들렸다. 마치 그 심장 안에 갇힌 것처럼.
하지만 금세 또 꼬물꼬물. 지호는 제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혜윤 때문에 웃음이 났다.
‘잠 안 오는구나.’
놀아줘야지 싶어서 어깨를 감싼 힘을 풀려던 참이었다. 파닥거리던 움직임이 똑 멈추던 때가. 그러고는 곧 등에 조심스러운 손길이 닿았다.
토닥토닥.
조금 전 자신이 해 준 걸 그대로 흉내 내는 혜윤이었다. 그래서 열심히도 팔을 빼내려 꼬물거렸나 보다. 이걸 해 주고 싶어서. 좋았던 건 꼭 기억해뒀다가 따라 하는 습관이라니.
팔이 빠져나간 만큼의 벌어진 틈을 그가 살포시 당겨 안았다. 아랫입술을 깨물어도 감출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십여 분 뒤, 토닥이는 작은 손짓이 느리게 멈추고 곱게 올라붙었던 단정한 입매도 스르르 제 자리를 찾았다. 쌔근거리는 두 사람의 숨소리 위로 조용한 행복이 내려앉은 오후였다.
***
창밖으로 9시에 걸맞은 어둠이 깔려 있다. 그 어두운색이 옮아 붙은 것도 아닐 텐데 마치 혜윤의 표정이 그랬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색의 기운이 보일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울상은 점점 짙어졌다. 정확히는 지호의 손이 바빠질수록.
‘편의점 5분 거리니까 같이 가고 싶어요.’
‘그럼 대신에 옷 단단히 입어야 돼요.’
‘응. 당연하죠.’
늦은 저녁을 먹은 뒤, 약속대로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가려는 지호와의 대화. 혜윤은 이 짧은 대화에 큰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서로가 생각한 ‘단단히’의 간극이 이렇게 클 줄이야.
제 옷 위에 지호가 새로 방에서 가져온 그의 옷 몇 벌까지. 더 이상 팔이 안 움직일 정도로 껴입히고서야 그는 만족했다. 반면 배로 커진 몸만큼 혜윤의 입은 심통으로 톡 튀어나왔다.
“이제 목도리만 하면 되겠다.”
그 오리 같은 입을 애써 외면한 지호가 마지막으로 목도리를 칭칭 감았다.
“이건 너무…….”
혜윤은 물끄러미 거울을 봤다. 지호의 하얀 패딩 점퍼는 복숭아뼈까지 내려왔고 손은 옷 밖으로 다 나오지도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시멜로 덩어리 같았다. 북극곰 같기도 하고.
낑낑거려도 팔이 잘 움직이지 않자 결국엔 눈이 그렁그렁해진다. 분한 마음이 호흡으로 씩씩 새어 나왔다. 흡족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지호의 시선이 결국 그녀의 억울함을 터뜨렸다.
“됐다. 가자.”
“씨이…… 북극 사는 아기들도 이렇게는 안 입어요! 굴러다닐 것 같잖아요.”
“큭큭. 감기 걸린 아기는 이렇게 입어야 돼요.”
투덜거리면서도 바깥 공기는 쐬고 싶었는지, 혜윤은 문을 열어주자 뒤뚱뒤뚱 앞서 나갔다. 지호는 그 뒷모습에 입술을 꾹 맞물었다. 이미 웃음을 감추기엔 늦었지만.
발끝만 겨우 보여서 솜뭉치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호숫가에 띄워진 목련 꽃잎 같기도 하고.
귀여워서 눈을 뗄 수가 없네.
왜 심통이 났는지 알 것 같아서 조금 미안했다.
***
“제일 먹고 싶은 거 딱 하나만 골라요. 반씩 나눠 먹을 거니까.”
편의점에 들어서자 들뜬 뒤뚱거림이 조금 빨라졌다. 웃으며 지켜보자 두 손이, 정확히는 두 옷 소매가 아이스크림을 소중하게 쥐고 있었다. ‘딱 하나만’이 왜 나온 말인지 알 텐데, 아이스크림에 영혼이 팔린 아이가 파인트를 집을 줄이야.
지호가 벌써부터 냠냠 입맛을 다시는 솜뭉치의 어깨를 꼭 감쌌다.
“혜윤아…… 이러기야?”
혜윤은 힐끔 눈치를 보다가 순순히 마음을 접었다. 봐줄 생각이 없는 눈빛과 근사한 미소, 어깨를 꾹 그러쥐는 힘 앞에서 포기라는 건 깔끔히 할 수 있었다. 떨어지는 고개를 따라 큰 아이스크림도 제자리에 놓이고, 고르고 고른 미니 컵 하나.
“아, 착하다.”
지호는 착한 솜뭉치와 함께 계산대 앞에 섰다. 바코드를 찍자마자 덥석 잡는 게 곧장 먹을 기세여서 뺏어 들었다.
“여기는 추워서 안 되고 방에 가서.”
“……응.”
방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통통거리며 억울해하더니 지금은 한껏 신이나 보였다. 작은 대답과는 다르게 끄덕이는 고개는 꽤 경쾌했다. 여전히 아이스크림만 바라보는 눈도 반짝였고.
지금 혜윤은 꼭 간식만 쳐다보는 강아지 같아서 ‘손.’ 하면 내밀어 줄 것도 같아 보였다. 설마 정말 그럴까 싶어 대뜸 아이스크림을 머리 위로 번쩍 들자 촉촉한 눈이 쫄쫄 따라붙는다.
“아…… 아픈 건 정말 싫은데.”
“네?”
“아니, 그냥.”
‘이건 또 이대로 너무 예뻐서.’는 속으로 삼켜버리는 지호였다. 이렇게까지 못된 놈이었나 싶어서 그녀 몰래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이 남기고 간 미세한 향기마저도 편의점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막상 함께일 땐 숨소리도 안 내던 직원이, 이제 막 도착한 친구에게 뒤늦은 흥분을 쏟아냈다.
“조금 전에 안지호랑 여자친구 왔다 갔다!”
“잘생겼나?”
“완전…… 미쳤다. 잘생긴 정도가 아니라 사람 같지가 않다.”
“아, 일찍 올걸!”
“팬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못 했다. 너무 떨려서…….”
그리고 흥분이 한소끔 끓고 간 자리엔.
“안지호가 여자친구 진짜 예뻐하더라. 그냥 쳐다만 보는데도…… 사랑스러워 죽으려는 게 보이더라고.”
부러운 마음이 놓여졌고.
“여자친구는 예쁘나? 장혜윤?”
“몰라. 꽁꽁 싸매고 와서. 나 처음엔 눈사람 걸어 들어오는 줄 알았잖아.”
“눈사람? 무슨 소리고?”
못 본 사람은 말해 줘도 모를 솔직한 감상평도 이어졌다.
***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시간. 혜윤은 제 입에 한 입을 넣어주고 스스로 한 입을 챙겨 먹는 지호를 바라봤다. 또 한 번의 반복, 또 반복.
그러자 다시 벌에 쏘인 것처럼 아랫입술이 댕댕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나눠 먹기로 했으니까 너 한 입, 나 한 입인 건 알겠지만…….’
결국 토라질 것 같은 마음이 입 밖으로 쪼물쪼물 새어 나왔다.
“지호 씨, 우리요…….”
“네.”
“한입 크기가…… 많이 다른 것 같은데…….”
“응. 체격이 다르잖아.”
지호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실은 언제쯤 저 서운함을 쏟아 내려나 지켜보고 있었다. 첫입을 손톱만큼만 나눠줄 때부터 울 것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체격은 말도 안 되는 핑계고 감기 때문에 많이 먹이면 안 될 것 같았다.
혜윤이 부푼 입술을 쏙 말아 물고는 기운 없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가 그 얼굴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아…… 아픈 건 정말 싫은데.’
편의점에서 그렇게 반성해놓고도 또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진짜 못된 놈이 맞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