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아이스크림
(57/110)
57. 아이스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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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아이스크림
2022.12.14.
혜윤은 또 한번 지호가 준 손톱만큼의 아이스크림을 빠르게 녹여 먹었다. 그러고는 얼른 지호와 같은 곳을 내려봤다. 크게 한 입 남은 마지막 아이스크림. 그러자 저절로 지호에게 시선이 향한다. 정확히는 간절함이.
아주 크게 먹어야 한 입인 거고 충분히 손톱만큼은 나눠줄 수 있으니까. 운이 좋다면 자기 차례가 한 번은 더 올 것 같았다. 그리고 지호는 착한 사람이니까.
‘응. 정말 정말 착한 사람이니까.’
저렇게나 절절하게 올려보고 있으니, 계속 아이스크림만 바라보는 지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건 당연했다. 혜윤의 눈이 닿는 오른쪽 볼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음…….”
그래서 일부러 눈길은 주지 않은 채 뜸 들이는 소리만 냈다. 그리고 그래서, 크게 한입을 푹 떠서 제 입으로 다 넣었다.
이제 보니 못된 놈 정도가 아닌 것 같다. 깜찍한 열망을 외면당했을 때의 얼굴도 보고 싶은 걸 보면.
“아…….”
그의 입에 가득 넣어진 아이스크림을 보던 혜윤은 작게 실망했다. 그제야 지호는 혜윤을 마주했다. 그렁그렁한 눈 속에서, 기대가 저물고 원망과 불신이 빠르게 들어차는 과정이 생생히 보였다.
아이스크림이 가득인 입을 꾹 닫으며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건만.
“……이제 지호 씨 방으로 가요.”
“큭큭. 화났어요?”
울컥한 마음을 숨기지 않는 표정 앞에서는 잘되지 않았다. 혜윤은 뚱한 얼굴로 제 감정을 눈빛에 녹여 보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돌리려고 했다.
“난 지호 씨가 한 입 더 줄…….”
지호의 손이 곧장 뺨을 감싸서 완벽히 되진 않았지만. 그리고 이어지는 말들은 맞닿은 입 안으로 흩어졌다.
몰랑몰랑한 입술 사이로, 그녀의 뜨거운 숨결에 담긴 섭섭함을 그가 시원한 아이스크림으로 달랬다. 무엇이 달콤한지, 무엇을 맛보는지, 경계가 불분명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건네면 건네는 대로 꼴깍꼴깍 잘 먹는 게 예뻐서, 지호가 장난스럽게 몸을 뒤로 물렀다. 그러자 아이스크림에 취한 혜윤이 제 쪽으로 자연스럽게 몸을 기울였다.
‘아픈 여자한테 욕심부리면 안 되는데.’
더는 입 안에 남은 게 없었음에도 지호는 조금 더 작은 입술을 머금었다. 제법 시원해진 입 안을 따뜻하게 훑다가 한순간 깊게 얽고 빨아들였다. 그러자 손바닥으로 움찔대는 뺨이 느껴졌다.
정말 욕심부리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지호는 그 작은 떨림에도 가볍게 그녀를 놓아주었다. 파르르 눈을 뜬 혜윤이 몽롱하게 그를 바라봤다. 낮게 들썩이는 가슴조차 버거워 보였다.
“누가 아이스크림 사준다고 하면 따라가게 생겼네.”
“……맛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보송하게 웃는 입매가 아직은 아파 보여서, 지호가 조심조심 그 입술을 닦아주었다.
“다 나으면 또 사줄게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먹자.”
“……네.”
“나도 여기까지만 할 테니까.”
부끄러움과 미열로 혜윤의 뺨에 발그스레한 꽃이 폈다. 지호는 그 얼굴을 눈으로 어루만지며 제 손에 묻어온 혜윤의 아이스크림을 쪽 빨았다.
***
“……다행이다.”
혜윤은 어렴풋이 눈을 떴다. 하루의 시작을 알린 목소리는 그 말에 담긴 의미만큼이나 포근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가늘게 떴지만 사실 또렷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은은하게 느껴질 뿐.
빛이 없는 어두운 새벽, 이마 위에 올려진 시원한 손, 기분 좋은 향, 그리고 낮은 속삭임.
“열 많이 내렸다. 나 이제 갈게요. 더 자요.”
“흐음…… 몇 시예요…….”
“4시 반. 약 꼭 챙겨 먹고.”
잔머리를 살살 쓸어주는 손끝,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며 톡. 톡. 마지막 남은 감기 한 톨마저 타일러 보내려는 큰 손바닥.
여전히 밤을 헤매는 혜윤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몸은 이날 새벽을 지호의 손길로 기억할 것이다. 10분 동안이나 애틋하게 내려앉은 눈빛으로도.
달칵-
지호가 사라진 방엔 그가 주문처럼 남기고 간 다행이 있었으니, 혜윤은 행복하게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 뒤로 30분이 지나자 복도엔 하나둘 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
끔벅끔벅.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이다가 겨우 초점을 잡은 혜윤이 몸을 일으켰다. 아침 8시. 얇은 커튼을 가볍게 지나온 빛으로 방은 이미 환했다. 한 사람의 부재로 마음은 조금 어두웠지만.
새벽의 기억은 너무 희미해서 떠오르는 건 약을 꼭 먹으라는 그의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
혜윤은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진 생수병을 들었다.
슥-
“……응? 뭐지?”
너무나 쉽게 열리는 뚜껑이 의문스러워 다시 한번 쳐다봤다. 분명 새것 같아서 힘을 바짝 몰았건만. 그런데 생각해보니 테이블에 올려진 새 생수병 5개가 너무 낯설기도 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다시 테이블을 살피자 가장자리에 붙은 작은 포스트잇.
[뚜껑만 열어놓은 새 거.]
이젠 제법 익숙한 글씨가 궁금증을 똑 잘라 주었다. 짧고 단정한 한 마디가 전부인데도 볼이 조금 올라붙었다. 잠시 손에 쥔 생수병을 내려놓고 다른 생수병 뚜껑을 돌려보자 모두가 똑같았다.
손만 닿아도 가득 찬 물이 찰랑이며 스르륵 열리는 게, 부끄럽지만 꼭 제 마음 같았다.
‘일찍 나가느라 정신없었을 텐데…….’
그의 배려에 보답이라도 하듯 혜윤은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와, 물 참 달다.”
이제는 맑은 빛을 어느 정도 되찾은 목소리가 제법 산뜻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정면 화장대를 바라보자 새 수건 여러 개도 단정하게 쌓여 있었다.
고마운 마음도 저렇게 차곡차곡 쌓아서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엉뚱한 소망도 잠깐.
“응? 저건 또 뭐지?”
화장대 밑에 놓인 작은 냉장고에 형광색 포스트잇 한 개가 떡 붙어있는 모양. 뭔지는 몰라도 누군지는 알 것 같아서 얼른 걸음을 옮겼다.
[오늘 밥 세 끼 다 먹으면 저녁에 열어봐요. 상 있으니까.]
“음…….”
콧소리로 살랑이는 기분이 노래처럼 흘러나왔다. 너무 행복하고, 너무 궁금하고. 잔잔한 아침에 누리기에는 지호가 제게 남기고 간 감정들이 하나같이 한낮의 햇살처럼 쨍하고 눈부셨다.
혜윤은 저도 모르게 눈치를 봤다. 괜히 화장실 쪽으로 상체를 훅 꺾어 보기도 하고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일단 여기엔 아무도 없는 거니까 목격자는 확실히 없고…….’
어제도 느꼈지만 지호는 정말 정말 착한 사람이니까. 용서해 줄 거라고 믿기로 했다. 저녁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호기심 대장의 조급함을.
탁-
그래도 5분은 망설였으니 많이 노력한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며, 혜윤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익숙한 물과 주스가 전부인 것 같은데 상이 뭘까. 새 물을 넣어둔 걸까 싶은 순간.
냉동 칸에 보이는 미니 컵.
“우와!”
어제 먹었던 아이스크림 컵 한 개가 작은 냉동 칸에 꾸깃꾸깃 넣어져 있었다. 혜윤은 얼른 손가락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날카로운 얼음에 살짝 놀랐지만, 차가움이 선명해질수록 어젯밤의 달콤한 맛 또한 선명히 떠올랐다.
뽁 하고 아이스크림을 빼내자 큰 기쁨이 몰아쳤다. 그리고 작은 컵이 손안에 온전히 쥐어졌을 때, 또 한 번의 익숙한 글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아이 같은 마음이, 그 또한 익숙하다는 듯이.
[밥 다 먹고 저녁에 열어보라고 했을 텐데. 말 안 들었으니까 또 반만 줘야지.]
“응? 뭐라고요?”
뚜껑 위에 납작 달라붙은 포스트잇에 혜윤은 서둘러 아이스크림을 열었다. 정말 딱 절반만 들어있는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 먹기도 전에 절반을 뚝 잃어버렸건만, 대신 행복이 배로 담겨있었다.
“정말…… 이 남자 뭐지…….”
살짝 깨물어본 입술이 예쁘게 곡선을 그렸다. 어떤 행복은 너무 벅차서 울컥 눈가에 물기를 돌게 만든다. 바로 지금처럼.
혜윤은 그가 남기고 간 두 개의 포스트잇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소중히 바라보다가, 또 한 번 더 보다가. 노트북 옆에 놓인 대본을 들었다. 그리고 지난주 혼자 연기했던 장면 위에 그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혼자 있던 일주일을 두 장의 종이가 꼭 달라붙어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절대 혼자 아니었다며.
[나 잘 때 항상 선물 놓고 가기 있어요? 시간 될 때 연락해요. 나는 오늘 쉬니까 아무 때나. (오전 8:33)]
괜스레 찡해진 코를 슥슥 문지르다가 지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다시 뚜껑을 닫고 넣어두려던 때.
달칵-
부산스러운 소리와 함께 민주가 들어왔다. 제법 큰 짐가방과 한눈에 봐도 죽이 담긴 작은 종이봉투를 들고.
“우와, 민주다!”
“장혜윤…… 너 손에 그거 뭐야? 감기 걸렸으면서 아이스크림 먹었어?”
아이 같은 반가움과 어른 같은 나무람. 민주는 걱정을 에둘러 표현했다. 늘 메시지로는 감기도 다 이겨냈다고 자랑하더니,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핏기가 싹 빠져나간 듯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래도 목소리나 뿜어내는 기운을 보면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이 시간에 아이스크림이라니. 민주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섰다.
“아니야. 나 안 먹었어.”
“안 먹기는?”
그녀가 절반이 휑 비어진 아이스크림과 혜윤을 번갈아 쏘아봤다.
“세상에. 아침부터 반이나 먹었어? 이 차가운 걸?”
“진짜 내가 먹은 거 아닌데…….”
“그럼 누가 먹었는데?”
혜윤은 눈치를 살피며 서둘러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뚜껑이 꼭 닫히자마자 등 뒤로 아이스크림을 숨겼다. 민주가 그 행동을 황당하다는 듯이 지켜봤다.
누가 보면 보물이라도 감추는 줄 알겠네.
“……아무튼 이거 내 거야. 절대 절대 아무도 안 줄 거야.”
작은 목소리에 담긴 결연함. 조금만 달라고 하면 곧 무섭게 인상을 쓸 기세라 어이가 없었다.
“으이구, 떼쟁이야? 알았으니까 일단 냉동실에 넣어놔.”
“…….”
그리고 더 어이가 없는 건 저 표정이었다. 초조감으로 벌어진 저 입술,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저 눈빛. 경계를 조금도 풀지 않는 혜윤을 지켜보다가 결국 민주가 빽 소리쳤다.
“안 먹어!”
“민주야…… 나 불안해…….”
민주의 약속에도 혜윤은 쉽게 의심을 놓지 못했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냉동실에 넣지도, 녹을까 어디 숨겨두지도 못해서 울상인 얼굴 앞에선 결국 민주도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민주는 ‘20년 우정을 걸고 절대 한 입도 안 먹겠습니다.’라는, 남이 볼까 조금 창피한 선서를 해야만 했다. 아프다니까 다 들어줘야 했다.
***
-몸은 괜찮아요? 목소리 많이 좋아졌다.
“네. 그런데 아이스크림 반 어디 갔어요?”
혜윤이 지호와 연락이 닿은 건 3시가 될 무렵이었다. 예상보다 많이 늦어서, 더 많이 반가웠다.
-역시. 벌써 아는 걸 보니 열어봤구나.
호기심 대장의 조급함을 귀엽게 넘어가 주는 건 더더욱 반가웠고.
“큭큭. 아침부터 너무 행복했다. 냉장고 열자마자 아픈 거 싹 잊었어요.”
-아픈 거 잊은 거면 내가 더 행복하지.
혜윤은 얌전히 누워 있는 이불을 팡팡 때렸다. 옆에 놓인 베개를 꼬집고 슬근슬근 문질러봐도 설렘이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민주가 잠시 차에 내려갔기에 망정이지,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놀려댔을까.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방글방글 웃는 얼굴은 또 얼마나 바보 같을까.
-아, 난 새벽부터 아이스크림 반 먹고 나오느라 잠이 확 깼네.
“우와, 진짜…….”
그녀가 봄날의 꽃처럼 활짝 웃었다. 그냥 바보 말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바보 같을 거란 생각에 조금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