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 어제가 있기까지 (58/110)


58. 어제가 있기까지
2022.12.18.



“오늘은 몇 시까지 촬영해요?”

-조금 늦어질 것 같은데. 자정 넘길 것 같아요.

“힘들겠다…….”

-힘들기는. 어제 재밌게 잘 쉬었으니까 일해야죠.

 
지호의 하루는 서울을 벗어나도 여전한가 보다. 그의 고된 일정에 혜윤의 미소가 잠시 사그라들었다.


-작가님은 앞으로 일찍 끝나죠?

“네. 저는 거의 6시면 끝난대요. 오전 촬영 없는 날도 있고.”

-응. 좋다.

 
깊게 안도하는 지호의 목소리에 혜윤은 전하고 싶은 마음을 휘휘 날려버리기로 했다. 미안해하는 건 어떤 이유로든 지호가 반기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도 그가 미안해하는 게 싫으니까.

그래서 미안한 마음 말고 다른 마음을 전할 기회를 살폈다.


“지호 씨. ……이번 주 토요일에 뭐 해요?”

-음, 오전부터 쭉 무대인사가 있죠. 이번 주말이 마지막이라.

“그렇구나…….”

 
혜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속에 가득 들어찬 확신을 어서 보여주고 싶었기에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막상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생각해보면 그럴듯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호 씨가 좋아요!’ 했다가 또 그때처럼 생각지도 못한 말을 되물으면 어쩌지. 진짜 절절하고 애틋하게 좋아졌는데 또 당황해서 실수하면 어떡하지.

혜윤이 베개 위에 올려진 손가락을 굴렸다. 차라리 잘됐지 싶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멋진 말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날 9시까지 숙소로 올게요. 만나서 같이 나가면 되니까.

“아…….”

 
물론 상대의 생각은 달랐지만.

지호는 그녀가 왜 일정을 물어봤는지 모르지 않았다. 비 내리는 밤에 홀로 젖어 들며 했을 그녀의 결정이란 건, 느긋한 제게도 조바심이 자라나게 했다. 꽤나 빠르고 크게.

빨리 듣는 편이 나았다. 그게 마음에 드는 대답이라면 더없이 행복할 테고, 만에 하나 그 반대라면.


-응? 어때요.

 
졸라야지 싶었다. 아직 함께 할 시간이 좀 더 남았으니 다시 생각해보라고.


“……좋아요.”

 
잠잠히 뛰는 가슴 위로 기울어진 고개와 깊어진 눈빛.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두 사람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와…… 혜윤아, 너 지난주 내내 이런 데서 혼자 있었던 거야?”

“아니야. 나도 이렇게 사람 많은 거…… 처음 봤어.”

 
다음 날 아침. 작고 오래된 아파트 앞에는 이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아놨다 해도 부족할법한 인파들이 가득했다.

민주만 놀란 게 아니었다. 혜윤은 홀로 지냈던 일주일 동안 몇 번을 이곳에서 촬영했지만, 같은 아파트가 맞나 싶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가끔 기웃거리는 몇몇 사람이 전부였던 지난주와는 너무나 달랐다.


“민주 씨, 이게 얼마 만이야?”

“와! 잘 지내셨죠? 큭큭. 이제 매일 보실 거예요.”

“혜윤 씨는 이제 몸 괜찮은 거죠? 얼굴이 더 하얘졌다.”

“그럼요. 완전 다 나았어요.”

 
경험해본 적 없는 인파를 두리번거릴 때, 여자 스태프가 두 사람에게 반가움을 보였다. 가벼운 인사를 하면서도 여전히 신기한 듯 고개를 못 멈추자 그녀가 상쾌하게 웃었다.


“지호 씨 때문에 이런 거예요. 어제는 더 난리였어. 몇 시간 동안 촬영을 못 했으니까.”

“우와…….”

“조금만 기다려요. 우리도 어제보다는 인원 보충을 해서 금방 잡힐 거예요.”

 
민주는 혜윤과 가벼운 눈짓을 주고받으며 여자 스태프를 따라갔다. 혜윤의 등 뒤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들이 점점 멀어져간다. 어제는 인파로 촬영이 지연되는 바람에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끝났다는 말도 들렸다.

혜윤은 멀리 떨어진 곳에 촘촘히 자리한 차들을 바라봤다. 지호의 차도 그곳에 있었기에, 그는 이미 이곳에 도착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보다 가까운 곳에 민우가 있었다. 민우는 이런 분위기가 꽤 익숙한 건지 걱정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혜윤이 그의 곁으로 걸어갔다.

시끌시끌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길고 하얀 외투를 입은 사람이 아장아장 제 쪽으로 걸어오고 있으니. 민우가 혜윤을 천천히 훑었다.


“혜윤아, 몸은 괜찮아? 안색은 많이 좋아졌다.”

 
얼굴은 확실히 좋아 보이고, 하얗고 큰 옷을 입혀놓은 몸은 더 확실히 귀여워 보이고. 두 번째 생각은 안 좋아할 것 같아서 뱉지 않았다.


“네. 선배 덕분에 푹 쉬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내 덕분에? 뭐가?”

 
두 사람 사이에 오묘한 눈빛이 오고 갔다.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이다가 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일정 바뀐 거요. 선배가 해 주신 거라고 들었는데…….”

“……누가 그래?”

 
의문만 쌓여가는 대화가 조금 더 이어졌지만.


“지호 씨가…….”

“아…… 말을 그렇게 해놨구나.”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모든 게 한방에 풀려버리기도 했다. 물론 민우만 전부 눈치챈 것 같았고 혜윤은 여전히 미로 속에 갇혀 있었다. 민우가 인자한 웃음을 보였다. 사이사이에 장난기도 설핏 섞여 있었다.

‘이걸 말을 해 줘, 말아.’ 같은.

결국 웃음 사이로 어제를 만든 더 어제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아니, 뭐. 결정이야 내가 했지만 고생은 지호 씨가 다 했지. 일정 바뀌면서 추가 헌팅비, 위약금 같은 것도 지호 씨가 다 내줬고.”

“네?!”

 
혜윤이 소리를 빽 질렀다. 이번에도 그녀 혼자만 당황한 건지 민우는 여유롭게 턱을 쓸었다. 어차피 말을 해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거, 민우는 곁가지도 버리지 않고 다 쥐여주기로 했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이 안 될 때, 사실 욕받이 하나 있으면 좋잖냐. 그것도 지호 씨가 자기 이름 써먹으라고 했으니까…… 우린 전화만 돌린 게 다야.”

 
‘지호 씨 스케줄 때문에 일정이 변경됐어요, 어쩌죠? 앵무새처럼 그 말만 반복한 게 다네.’라는 말엔 나름 같이 웃자며 우스운 흉내를 냈지만 혜윤은 전혀 웃음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뜨겁게 북받치는 마음에 작은 말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확실히 탑티어는 달라. 지호 씨 이름 대니까 다들 별 불만이 없어. 거기에 식사라도 하시라고 위로금 조로 더 얹어주니까, 얼굴 붉힐 일이 전혀 없었지.”

“…….”

“자기 개인 촬영을 갑자기 당겨버렸으니 대사 외우고 준비하느라 고생한 것도 지호 씨일 테고…… 이야, 그런데도 어제 NG 한 번이 없더라? 그 많은 분량을. 그제 아주 대본에 파묻혀 있었나 봐.”

 
혜윤은 주먹을 꼭 쥐었다. 입술이 파들거리며 떨리는 통에 최대한 힘으로 짓눌러야 했다.


‘참, 내일 하루 더 푹 쉬어요. 감독님이 촬영 일정 바꿔주셨으니까.’


‘민우 선배가요?’


‘네. 금요일에 하기로 했던 내 개인 촬영을 내일 하자고 하셔서.’

 
늘 어떤 일도 제 덕으로 돌리지 않는 사람이란 걸 이젠 다 알면서.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일요일 내내 제일 많이 보았던 지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본을 읽던 반듯한 옆얼굴. 잘생겨서 손해 보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안타까워 해놓고는, 자신 또한 고운 얼굴만 흠뻑 바라봤던 것이다.

그가 왜 그렇게 온종일 대본에서 눈을 떼지 못했는지를 헤아릴 생각도 못 하고.

혜윤이 아쉬움 대신 입 안의 살을 세게 깨물었다. 그 울 것 같은 표정을 민우가 따뜻하게 바라봤다.


“너 이럴까 봐 말 안 했나 보다. 그냥 속으로만 고마워하고 모르는 척해.”

“…….”

“할 수 있겠어?”

“……아니요.”

“응. 글러 보인다. 큭큭.”

 
그때,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단숨에 주위를 덮쳤다. 크게 내지르는 소리 없이 오직 웅성거리는 듯한 분위기였음에도 모두의 시선이 단 한 곳으로 향했다.


 


“조금만 조용히 해 주세요!”

“사진 찍지 말아 주세요!”

 
건장한 체격의 남자 스태프들이 방호벽처럼 드문드문 인파를 통제했고 주차해놓은 차에서 지호와 봉기가 걸어오고 있었다.

지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혜윤은 조용히 시선을 떨궜다. 그 얼굴을 눈에 담은 지호가 곧 옆에 있는 민우와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지호 씨한테 가 봐, 혜윤아.”

“……네.”

“응. 오늘 촬영도 잘해보자.”

“……네.”

 
목소리만큼이나 힘을 잃은 발이 천천히 뒤돌았다.

배우도 스태프도 모두가 검은색 패딩 점퍼로 무장을 했음에도 유독 빛이 나는 남자.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웅성거림이 조금 커지기도 했지만 마음이 어지러운 혜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호가 한 발짝 가까이에 선 혜윤을 온온하게 바라봤다.


“야외라 조금 정신이 없죠? 바람이 조금 차네.”

“……네.”

“흰색이라 찾기 쉬워서 좋다.”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혜윤의 점퍼 옷깃을 매만졌다. 잠가두지 않아 헤벌어진 옷깃이 꼭 맞붙자 가슴께에 미미한 온기가 돈다.

혜윤은 낮췄던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모르는 척은 절대 할 수 없으니까. 많이도 작은 목소리가 조심조심 시선을 뒤따랐다.


“그런데 민우 선배한테…….”

 
폭-

그 순간 혜윤의 얼굴이 지호의 가슴으로 폭 박혔다. 갑작스러운 어둠이 찾아오기 직전에 보였던 건 지호의 빠른 손놀림이었다.

검은 점퍼 옷깃을 벌리고 그 안으로 폭 당기고. 자신이 본 게 맞는 건지 등까지 지호의 옷이 제 몸을 감싸고 있는 게 느껴졌다.

머리 꼭대기에서 은연히 떨어지는 빛과 호흡, 주위를 감싼 어둠과 향, 심장 소리. 혜윤을 지배하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전부 그의 것들.

제 옷깃만 여몄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열기가 돌았다. 수많은 눈들이 낯간지러운 해명을 요구한 건지 지호의 목소리가 낮게 울린다.


“혜윤이가 감기라서요.”

“와…… 촬영 들어가기 전에는 여자친구다?”

 
또한 희미한 웃음소리까지 그의 목울대를 타고 고스란히 제게로 내렸다. 혜윤은 그저 가만히 귀 기울였다. 은은하게 전해지는 지호의 모든 것들이 혜윤을 먹먹하게 했다.

귓가를 왕왕 울리는 심장 소리는 더 이상 지호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가만히 안겨놓고는 또 이리 뒤늦게 버거운 떨림이 발끝까지 번진다. 항상 지호에 한해서는 감정의 순서도, 자라나는 속도도, 제멋대로였다.

그리고 오직 품에 안긴 사람에게만 들릴법한 속삭임이 닿았다.


“핫팩은? 붙였고?”

“……네. 등에 두 개나.”

“응. 잘했어요.”

 
토닥토닥. 등 뒤로 전해지는 온기는 떨림을 달랬고.


“대기가 길어지네…….”

 
옷을 바짝 여미는 듯, 그녀를 품 안 가득 감싸는 힘은 확신을 키웠다.


“사진 촬영 금지입니다! 찍지 마세요!”

 
다시금 촬영장에 크게 울리는 목청이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물론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야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나야말로 사진 좀 찍어놔야겠는데.’

 
그 시선 중의 하나인 봉기 역시 관중이 된 기분이었다. 살다 보니 별걸 다 본다 싶었다. 사진을 찍지 말라며 쩌렁쩌렁 목청을 높이는 스태프에게 묻고 싶었다. 혹시 매니저도 촬영 금지냐고.

또한 봉기와 비슷한 거리에서 비슷한 감상을 하는 한 사람. 민주 역시 같은 곳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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