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내가 잘해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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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내가 잘해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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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내가 잘해 줄게요
2022.12.28.
“지호 씨가 종방 때까지 시간을 줬었잖아요.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
곱게 휘어진 눈이 그를 향했지만 오래 바라보기엔 무리였나보다. 혜윤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눈만 밤의 공원을 담고 있을 뿐, 목소리와 마음은 여전히 옆에 앉은 남자에게로 흐르고 있었다.
“너무 명확해져 버리니까 굳이 시간 끌기도 싫고…… 그러다가 괜히 다른 사람 좋아하게 되면 어떡해요. 생각만 해도 속상한데.”
“……네?”
대뜸 기운이 빠진 목소리가 축 가라앉는다. 짧은 상상만으로도 시무룩해지는지 아랫입술이 볼록 부풀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지호는 줄곧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보이는 말과 행동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늘 빠르게 읽어냈던 혜윤의 진심이 이번만큼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 낯선 미로에 갇혀 미간이 좁혀질 무렵, 혜윤이 그를 마주한다.
여리고 고운 감성이 여울치는 갈색 눈동자. 그 가장자리엔 깊은 밤이 깃들었고, 한가운데엔 오직 한 사람만 자리했다. 그리고 한 주 내내 입 안에서 동글동글 굴리기만 했던 말을 또르르 내보내기로 한다.
“그러니까요. 나랑…… 진짜 진짜로 만나볼래요?”
“…….”
부끄러운 마음도 어떤 방식으로든 고스란히 전해 주는 여자다웠다. 지호는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들리지 않는 대답에 조마조마해진 혜윤은 말 한마디를 작게 보탰다.
“……내가 잘해 줄게요.”
“미치겠다, 진짜…….”
긴장이 탁 풀린 지호의 어깨가 낮게 내려앉았다. 그 위로 꾸밈없는 감상이 툭 떨어졌다. 혜윤은 그의 짧은 반응이 아주 부정의 의미는 아닌 것 같아 안도했다. 물론 여전히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바다도 옆에서 같이 보고, 지호 씨가 아는 바다에도 나 데려가 주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조금 더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속닥거리기도 했다. 지호는 잠시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댔다. 하룻밤 내내 초조의 그림자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으니 기운이 빠질 만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눈은 혜윤을 담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저 얼굴을 조금도 놓치기 싫은 걸 보면, 또한 뭐 저리 예쁜 걸까 싶은 걸 보면, 정말 답도 없지 싶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대가 원하는 건 당연히 대답이겠지만, 여전히 이쪽은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기에. 미안하지만 이게 더 급했다.
“그럼 그건 무슨 말이었어요?”
“그거?”
“어제 주눅 들어서 했던 말 있잖아. 사람 잔뜩 겁준 거.”
“응? 내가 언제 겁을…… 아, 그거!”
모르는 척하더니, 겁을 줄 법한 말이었단 걸 본인도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단숨에 파악한 걸 보면. 혜윤이 가지고 온 작은 가방을 뒤적거렸다. 지호는 여전히 힘이 빠진 몸을 의자에 척 기대고 있었다.
잠시 후 가방 밖으로 나온 작은 봉투. 익숙한 은행 이름이 선명히 찍힌 종이봉투는 꽤 두둑했다. 봉투를 꼭 쥔 손이 지호를 향했다.
“모르는 척하려고 노력했는데. 사실 그런 거 잘 못 해요, 나는.”
“……이게 뭐예요?”
“민우 선배한테 들었어요. 나 쉬게 해 주려고 지호 씨가 애썼다는 거. 정확히 얼마인지 몰라서 지호 씨가 쓴 돈보다 적을지도 몰라요.”
“하아…….”
지호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남김없이 모두 풀려버린 의문이 반갑고, 또 어이없었다. 감은 눈 아래로 평온을 찾은 입꼬리가 멋스럽게 올라붙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허벅지에 놓인 제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펼쳐보려는 혜윤을 볼 수 있었다.
혜윤의 입장에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단박에 들이덤비듯 쥐여주는 것. 미리 아는 체를 했었더라면 계좌번호를 알려주기는커녕 고맙고 미안하다는 인사조차 못 하게 했을 테니 말이다.
묵직한 돈 봉투가 그의 손바닥 위에 얹어진다. 적지 않은 액수였지만 그보다는 그 안에 든 진한 마음의 무게가 더 클 게 분명했다.
“거절하지 말고 받아줘요. 부족한 거라면 종종 밥 사는 걸로 대신할게요.”
마음만 줘도 충분하건만, 돈까지 줄 줄이야. 그가 고개를 설설 저었다. 황당하고 기가 막히고, 어쨌건 결국 행복하고. 그 다양한 감정이 섞인 표정을 혜윤은 계속 지켜봤다.
저쪽이야 궁금증을 모두 해결했다지만, 이쪽은 대답을 못 들었으니 간절히 볼 만도 했다.
그 시선을 느낀 지호가 고개를 들었다. 불안이 걷힌 마음에 커다란 안도가 깔리자, 언제나처럼 혜윤의 마음이 쉽게 읽혔다. 조금 부끄럽고, 적잖이 떨리고. 꽤나 제 대답을 궁금해하는 순진함이 또렷이 보였다.
“나는 싫다고 말하려는 줄 알았지.”
“말도 안 돼. 어떤 여자가…….”
“응?”
불현듯 커진 부끄러움이 속삭임을 만들어냈다. 잘 들리지 않는 혜윤의 목소리에, 그제야 지호의 등이 의자에서 떨어져 나간다. 작은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그것과 어울리는 귀여운 반론이 들렸다.
“어떤 여자가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랑 그런 식으로 막…… 아이스크림을 먹어요.”
가방 위에 올려진 손가락들이 수줍음으로 꼬물거리기 바빴다. 그 하얀 손을 보다가, 깨물리는 작은 입술을 보다가, 잠시 길을 잃은 눈동자를 보다가. 온통 깜찍함으로 무장한 모습에 흡족한 웃음이 났다.
이제 확실한 명분도 생겼으니 대놓고 귀여워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물론 여전히 답을 듣지 못한 혜윤은, 본인도 같은 명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알 수 없었다. 그 초조한 마음이 입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당장 결정하기 힘든 거면…… 생각할 시간을 조금 줄까요?”
지호는 대답에 약간 뜸을 들였다. 어젯밤 내내 불안했던 시간들이 있었으니 조금 놀려줘 볼까 했지만, 씩씩하게 낸 용기에 고마움을 표현하기로 했다.
여자의 용기는 남자의 진심보다 더 가치가 있으니까.
“그런 게 뭐가 필요하겠어요.”
“네?”
“이쪽이야 처음부터 좋아했는데.”
혜윤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지호와 눈이 마주치자 재빠르게 입술을 붙이기도 했다. 또다시 행복한 속마음이 펑 터져 나갈까 봐.
“그럼 이제 호칭 정리를 좀…… 할까?”
원래의 여유를 완벽히 되찾은 지호가 그녀를 재촉했다.
“으앗, 그건 조금만 있다가.”
“왜?”
“이상하게 지호 씨가 내 이름 부르면 너무 떨려서…….”
“큭큭. 앞에서 대단한 거 다 해놓고, 고작 이런 걸로 떨려요?”
“……네.”
작은 대답과 함께 혜윤이 양 볼을 부풀렸다. 대체 왜 수만 번도 더 들었을 이름에 떨린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 같은 저 수줍음 역시 자주 보고 싶다는 것.
“알았어요. 그럼 조금 익숙해지게.”
그러니 다 들어줄 수밖에.
지호의 나른한 끄덕임이 자연스럽게 돈 봉투에 닿았다. 볼수록 엉뚱한 선물에 피식 웃음이 났다. 혜윤 역시 만족스러움으로 생글거릴 수 있었다. 이제야 작은 불안마저 싹 날아간 눈치였다.
서로에게 건네받은 행복에 가득 젖어 드는 시간. 잠시 대화가 끊긴 차 안에는 소리 없는 미소만 둥실둥실 떠다녔다.
“아, 오늘 원하는 대로 다 됐는데 딱 하나 아쉽다.”
가벼워진 마음은 투정조차 산뜻하게 내뱉었다. 고운 목소리가 전하는 알 수 없는 말에 지호가 관심을 보였다.
“난 아쉬운 게 하나도 없는데. 뭐가 아쉬울까.”
“바다 보면서 맥주 한 잔이요. 부산에서 이제 그것만 하면 소원 다 이룬 거니까.”
혜윤이 스스로 말에 머리를 주억거렸다. 차가 있으니 바다 근처까지는 갈 수 있어도, 가까이에서 누릴 수는 없었다. 지호가 난처해질 게 뻔하니 말이다. 역시 차가 있으니 맥주는 말할 것도 없고.
아쉽지만 아직 한 주가 더 남았으니까. 다음이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어른스럽게 아쉬움을 접으려 했지만.
“뭐지? 제일 쉬운 게 그거 같은데.”
“……네?”
지호는 접으려던 혜윤의 마음을 뺏어 들었다. 봉투를 내려놓은 손이 기어를 움켜쥐었다.
***
달칵-
“와, 진짜 넓다.”
문을 열고 들어선 혜윤은 바다가 보이기 전부터 입을 크게 벌렸다. 모든 호텔이 대체로 고급스럽고 깔끔하겠지만, 지호가 안내한 방은 크기와 인테리어부터 압도적이었다.
창가로 다가서려던 걸음이 잠시 멈춘 건,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는 지호와 눈이 마주쳤을 때였다. 먼저 방에 도착한 그는 이미 코트를 벗고 있었다.
‘키 받으면 메시지로 호수 알려 줄게요. 차에서 10분만 기다려요.’
10분 전, 호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지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아무리 연인 사이로 알려졌다 한들 ‘안지호, 장혜윤이 어느 호텔에 다녀갔다더라.’ 같은 이야깃거리는 예쁘게만 회자될 것 같지 않으니까.
이 늦은 시간까지 SNS에는 지호의 부산 무대인사가 글과 사진으로 쉼 없이 떠다니고 있었기에, 호텔 역시 그의 방문에 사적인 의미를 두진 않는 듯했다.
“우와!”
작은 발이 온통 바다로 채워진 큰 유리 벽에 다다르자 격한 반응이 터졌다. 상상했던 맑고 푸른 바다는 아니었지만, 검게 물결치는 밤바다는 범접할 수 없는 진중한 멋이 있었다.
테라스와 연결된 문으로 철썩이는 소리와 함께 바다 내음이 짙게 불어왔다.
“바다 보면서 맥주 한잔하기에 나쁘진 않죠?”
“네! 엄청 좋아요! 이런 방법은 상상도 못 했다.”
“응. 제일 좋은 방으로 잡았어요. 마침 내가 큰돈이 생겨서.”
가까이 다가온 지호에게서 짓궂은 장난이 보였다. 그의 뒤에 자리한 소파 위에는 단 10분 만에 가난해진 은행 봉투가 놓여 있었다. 텅텅 비어 홀쭉해진 종이봉투가 꼬깃꼬깃해 보였다.
순간 혜윤의 미간 역시 꼬깃꼬깃 구겨진다.
“으으, 이러면 내가 준 의미가 없잖아요. 서울 가서 다시 줄게요. 오늘 건 무효.”
“역시 부자 누나 맞네.”
지호가 주는 것에는 한없이 진심인 얼굴을 보며 맥주를 건넸다. 가볍게 캔을 맞대자 둔탁한 듯 경쾌한 소리가 난다. 테라스에서 마시고 싶은 혜윤이었지만 지호는 허락하지 않았다.
감기 걸렸다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하지만 안 된다고 엄포를 놓으면 더 뾰로통해질 걸 알기에, 스스로 선택하게 보기를 줬다.
‘테라스에서 마시려면, 전처럼 북극 사는 아이같이 입고 나가야 하는데. 괜찮겠어요?’라는 그의 질문. 혜윤은 쉽고 깔끔하게 포기했다.
둘은 넓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셨다. 한 뼘쯤 열린 문 틈으로 파도가 만들어준 낭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 낭만 위로 장난과 소소한 이야기들이 한 겹 한 겹 쌓여간다.
“그런데 지호 씨는 주량이 어떻게 돼요?”
“못 마시진 않아요. 남자들이야 기본은 하니까.”
그녀가 지호 쪽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캔 한 개를 보았다. 그도 자신처럼 똑같이 몇 모금 마시지 않았음에도 벌써 한 캔을 앞서고 있었다.
“나 이제 지호 씨 말을 해석할 수 있거든요. 술 엄청 잘 마시는구나?”
“오, 생각도 읽는다더니 이젠 말도 해석할 수 있고?”
“큭큭. 맞아요.”
꼴깍꼴깍. 혜윤이 웃으며 맥주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