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제한 시간
(6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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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제한 시간
2023.01.04.
혜윤은 맞닿은 입술을 잠시 떼어냈다. 지호의 뺨을 감싼 손바닥에서 미미한 화장기가 느껴졌기에. 아무리 얇은 메이크업이라 한들 이 시간까지 씻어내지 않았으니 답답할 게 분명했다.
“으이그, 진작 말하지. 샤워하고 와요.”
얼굴에서 내려간 손바닥이 조심스레 그의 맨 가슴을 밀었다. 귀여워는 해도 귀여워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이럴 때 알 수 있었다. 밀어내도 밀려나지 않을 때, 그의 큰 손이 제 속살을 빈틈없이 어루만지려 들 때.
새벽 1시에 잠긴 남자의 목소리를 낼 때. 지금처럼.
“……같이 할까?”
“으앗! 그건 절대! 절대 절대.”
“큭큭. 왜 그렇게 싫어해.”
지호의 휘어지는 눈 속에 울긋불긋 달아오른 얼굴이 담긴다.
“싫은 게 아니라…… 얼굴 빨개져서 터질까 봐 그래요. 부끄러워서.”
“뭐 그렇게 부끄러운 것도 많을까.”
계속 제 밑에서 바르작거리며 가슴을 밀어내는 혜윤 때문에, 지호는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침대 밖으로 폴짝 일어서는 혜윤이었다. 그러고는 곧 지호의 손을 당겨 샤워실로 이끌었다.
탁-
샤워실의 조명이 켜지자 다시금 이 호텔의 웅장함이 느껴졌다. 짧게 둘러보기엔 꽤나 넓은 공간이었다. 그 모든 웅장함을 가볍게 압도하는 욕조, 정확히는 욕조 위의 창문.
“와, 여기서도 바다가 보인다.”
넓은 창문으로 겨울, 밤, 바다 같은 아름다운 것들만 끝도 없이 흘러들고 있었다. 욕조맡 선반에 쪼르르 놓인 입욕제들이 귀여워 보였다. 어서 따뜻한 물을 내려달라고 쫑알거릴 것만 같았다. 방울방울 몸을 부풀리고 싶다고.
그때 혜윤의 뒤로 단단한 몸이 느껴졌다. 고작 그의 티셔츠 하나만 사라졌을 뿐인데도, 등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힘과 열기가 너무나 생생했다. 가볍게 허리를 감싼 양팔에 굵은 힘줄이 뻗어난 모양.
그와 어울렸다. 단정하고 관능적인.
“나 샤워 다 하고 여기에서 같이 바다 봐도 좋겠다. 저거 거품 나는 거 아닌가?”
달래는 듯 다루는 말투가 매혹적이었다. 창문 밖 바다와 함께 알록달록한 입욕제에 닿은 갈색 눈, 그 잠깐 동안 보인 관심을 읽고 한 말이었다. 그랬으니 기대했던 반응이 터질 수밖에.
쪼물쪼물 작은 목소리가 더해진다.
“……타월로 몸 감싸고 들어가도 되니까.”
“응.”
“거품도 보글보글 많이 많이 낼 거고.”
“그렇죠.”
혜윤은 이미 넘어간 눈치였다.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큰 타월이 제 다리 어디까지 내려오려나, 가늠하는 게 보였다.
그 귀여움에 지호가 손에 넣었던 힘을 풀었다. 샤워가 끝나야 이 모든 게 이어질 수 있으니, 그가 혜윤의 어깨를 잡고 빙그르르 방 쪽으로 돌린다.
끝까지 덤덤한 척하려고 했지만 결국 피식 웃음이 터졌다.
“왜 웃어요?”
“아니, 그냥…… 남자 심리를 잘 아는 건가 싶어서?”
“내가?”
샤워실을 나가는 그녀의 등 뒤에 지호의 혼잣말이 작게 흩어졌다.
“벗은 것보다 벗기고 싶은 게 더 끌리지.”
그녀는 그 말을 들을 수 없었지만 1시간 뒤, 경험할 수는 있었다.
거품이 가득한 욕조 안에서, 부푼 마음들은 좁은 욕조를 넘어 욕실을 가득 채웠다.
뜨거워진 공기와 습기를 달래려 열어놓은 한 마디 남짓의 창문 틈. 그 틈으로 넘치는 애정이 달콤한 향기로, 웃음으로, 때론 밤을 닮은 호흡으로도 솔솔 흘러나갔다.
더 이상 깊어질 수 없을 만큼의 새벽. 차가운 바다에도, 뜨거운 방 안에도 마음을 젖게 만드는 소리들만 가득했다.
***
불과 몇 시간 전의 기억에, 지호의 쇄골 밑을 슬근거리던 손이 잠시 멈추어 선다. 그러다 조금 더 내려온 손가락이 가슴 언저리를 꾹. 꾹. 눌렀다. 그의 가슴이 눌리긴커녕 손가락만 구부러질 뿐이었다.
“와…….”
혜윤은 어제도 또 한 번 느꼈지만, 지호의 몸이 온통 근육으로 감싸져 있는 걸까 싶었다. 조금 전까지 문지르던 피부는 그리도 부드러운데, 어떻게 그 속은 이렇게나 딴딴할 수 있을까.
누구보다 운동에 열정적인 우준이 곁에 있었지만, 둘은 결이 완전히 달랐다. 옷으로 꽁꽁 감춰도 근육질인 게 표가 나는 우준과 달리, 지호는 옷을 입으면 이 정도의 몸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바쁜데 운동은 언제 하는 걸까?’
큰 키와 큰 골격, 옷태로 보아 몸매가 상당히 좋을 거라는 예상은 할 수 있겠지만, 역시나 직접 보지 않는 한 믿을 수 없는 몸매였다. 보이는 모습이 완벽한 남자는, 사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완벽한 남자였다. 몸도 마음도.
꾹꾹 누르던 손가락이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선다. 그러더니 곧 작게 주먹을 만들어 콩콩 가슴을 때렸다.
퍽- 퍽-
‘뭐지? 돌덩이가 아니고서야.’
아직 아침잠이 배인 주먹이었기에 손가락만큼이나 힘이 적었지만, 남자의 연기를 멈추기엔 충분했다.
감은 눈 밑에 맞붙은 지호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큭큭. 만지작거리길래 자는 척 좀 하려고 했더니.”
“어? 일어났나 보다.”
혜윤의 머리에 내어줬던 그의 팔이 몸 안쪽으로 확 당겨진다. 5분 넘게 괴롭혀대던 단단한 가슴이 그녀의 눈앞까지 훅 다가왔다. 안긴 품이 늘 그렇듯 포근했다.
“그렇게 때리는데 어떻게 안 일어나…….”
낮게 가라앉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자 혜윤이 한쪽 팔을 쭉 뻗었다. 그러고는 똑같이 그를 안았다. 그 사랑스러운 온기에 지호의 입꼬리가 고운 선을 그렸다. 행복을 그려낸 입술 위로, 스르륵 떠진 눈이 절경에 닿았다.
“와…… 정말 꿈같네.”
“응? 뭐가요?”
순간 지호의 손이 그녀의 몸을 창문 쪽으로 돌린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보다 등 뒤로 바짝 밀착된 그의 살결에 놀랐지만, 제일 놀라운 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었다.
“우와!”
청명하고 깨끗한 겨울 바다, 그 위로 아침 햇살이 흩뿌려 놓은 빛의 향연. 감탄을 뱉은 뒤에도 작은 입은 계속 벌어져 있었다.
이불이 덮인 몸을 이불 밖의 단단한 두 손이 꼭 감싼다.
“밤바다랑은 많이 다르죠?”
“네. 정말 정말…… 진짜 진짜 예쁘다.”
“응. ……예쁘다.”
품 안에 폭 파묻힌 채 바다에 흠뻑 취한 얼굴을 향해, 그 역시 감탄을 전했다.
가벼운 뒤척임에 폴폴 공기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향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어서, 그만큼 몸에 배인 향이 똑같아서. 또 어디까지가 내 피부인지도 모를 만큼 두 몸이 부드럽게 감겨 있어서.
지금 누리는 감정의 이유를 찾자면 끝도 없었다. 오감으로 느껴지는 게 온통 행복뿐일 수도 있구나.
지호가 혜윤의 목덜미로 코를 묻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자 폐부 속에도 행복만 훅훅 들이치는 아침. 힐끗 치켜뜬 눈에 시계가 스쳤다. 8시 30분. 다시 눈을 돌리자 여전히 바다에 마음을 뺏긴 혜윤이 보였다.
“바다 보면서 걷고 싶어요?”
사실 그는 딱 5초가 전부였다. 바다가 눈에 들어오는 시간이. 그건 어제 욕조에서도 그랬다. 더 아름다운 쪽으로 눈이 가는 건 본능이니까.
그래도 저리 좋아하는데, 원한다면 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바스락거리는 베갯잇 위로 혜윤의 고개가 도리도리 움직였다.
“여기서 보는 것도 충분히 좋아요.”
지호는 그 작은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좌우로 흔들리는 얼굴을 따라 이어진 가녀린 목선, 흐트러진 머릿결 사이마다 보이는 새하얀 피부, 그 매끄러움.
그러다 보면 차마 누르지 못한 욕심이 붕 떠오르는 법이었다. 어찌 막을 틈도 없이.
“그럼…… 바다 보면서 하는 건?”
“으앗.”
“큭큭. 체크아웃 2시간 남았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그의 목소리 쪽으로 혜윤이 몸을 돌렸다. 살짝 발그스레한 얼굴 위로 초롱초롱한 눈이 지호를 향한다. 부끄러움마저 가득 껴안은 눈 속에 더 이상 불안은 없었다. 오직 확신뿐.
그리고 얼핏 순진한 호기심도.
“지호 씨…… 안 피곤해요?”
“원래 2살 어린 동생은 체력이 좋으니까.”
지호가 샐쭉거리는 입술을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몸을 돌리는 탓에 살짝 내려간 이불이 가슴을 가려주긴 했지만 쇄골 밑으로 엷게 피어난 붉은 자국은 고스란히 눈에 보였다.
조심 좀 할걸, 싶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분명했다.
못 참았겠지. 상대가 장혜윤인데.
잠시 붉은 꽃잎 같은 밤의 흔적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혜윤의 머리카락을 빗겼다. 헝클어진 머리를 조심조심 귀 뒤로 넘겨주며, 조심스럽지 못한 진심이 툭 던져진다.
“그래서…… 해, 말아. 누나?”
글자마다 담겨 있는 애정이 너무 달아서, 혜윤은 저도 모르게 발가락을 오므렸다.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는 시선을 타고 자르르 사랑이 퍼지는 순간. 그녀가 불쑥 양손을 뻗어 지호의 볼을 감쌌다.
쪽-
못 참겠는 마음이 꼭 그에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쪽도 상대가 안지호라면 말이다. 산뜻하게 입술에 쪽 소리를 내린 뒤에는 아이 같은 웃음이 들렸다. 짧지만 어른 같은 대답도.
“해.”
곧장 이불 속의 두 몸이 겹쳐진다. 지호는 어떨 때 누나라고 불러야 하는지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입술이 깊게 얽히고 아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농염한 공기가 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제한 시간이 그의 본능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8시 40분부터 10시 40분까지. 혜윤은 거친 숨으로 가득했던 어젯밤마저도 그가 저를 위해 많이 참았던 거란 사실을 2시간 동안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이 아침 또한 누르고 누른 정염이란 걸, 그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저녁이라기엔 많이 이른 오후 4시. 그때부터 지호의 마지막 무대인사가 시작됐다. 서울에서 내려온 배우들과 진행자까지. 미리 준비된 일정은 즐겁고 차분히 흘러갔다.
“오늘 자로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소식은 들으셨나요?”
“네. 이 무대 인사 들어오기 직전에 들었어요.”
기록 추이를 봤을 때 오늘내일일 거라는 예상이 있었는데, 그게 오늘이 되었다. 영화사 측도 희소식에 다양한 이벤트를 곁들였다. 개봉 17일 만에, 그것도 올해 첫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뉴스에서도 이 소식을 다뤘다.
“부산에서 이렇게 좋은 소식을 듣게 돼서 더 특별한 것 같아요.”
함께하는 배우들의 목소리에 벅찬 감동이 물들어 있었다. 지호는 한가운데 서서 그 얼굴들을 흐뭇하게 봤다. 꼭 쥔 마이크 역시 마음이 옮아 붙어 따뜻해졌겠지, 싶었다.
그는 어제도 부산 관객들과 인사를 나누었기에 말할 기회를 대부분 다른 배우들에게 넘겼다. 사실 좋은 소식을 안고 시작된 무대인사는 누가 마이크를 잡아도 기쁨만 전할 게 분명했다.
“부산 오셨는데 바다는 보셨어요? 여름 바다랑은 완전히 분위기가 다른데.”
“사실 저희는 다 못 봤어요. 서울 가기 전에 잠깐이라도 보고 가려고요.”
배우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중 한 사람, 지호는 긍정 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연륜 있는 진행자가 그 미세한 차이를 못 잡을 리 없었다. 모두가 주인공인 배우들 중에서, 누가 가장 주인공인지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으니.
틈틈이 지호의 작은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으려 들지 않는 사람에게 마이크를 쥐여주고 싶어서. 번뜩이는 눈빛에 걸맞은 목소리가 높이 치솟았다.
“오, 지호 씨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요? 표정이.”
갑작스레 객석 쪽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의 이름만으로도 생뚱맞은 박수 소리와 웃음소리까지. 모두가 지호의 목소리를 기다렸던 게 틀림없었다. 옆 배우들의 손을 타고 온 마이크가 지호에게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