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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안지호가 아깝다 (64/110)


64. 안지호가 아깝다
2023.01.08.



“네. 저는 부산에서 다른 작품을 촬영하는 중이라서요. 감사하게도 볼 수 있었어요.”

“아, 그러셨군요.”

 
나란히 자리한 옆 배우들과 진행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배우들은 지호의 말에 담긴 부산의 바다 내음을 상상하며 끄덕였겠지만, 진행자는 그 말에 의도적으로 담지 않으려는 것들을 상상했다.

그가 부산에서 촬영 중이라는 작품이 누구와 함께하는 작품인지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럼 혼자 보신 건 아니겠네요? 아, 더 직접적으로 물어보고 싶은데. 관객분들도 다 같은 마음이시죠?”

 
얄궂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지호를 붙들었다. 또 옆 배우에게 마이크를 넘기려 했기에 속도를 내야 했다.

큰 웃음소리와 박수가 객석 여기저기에서 폭죽처럼 터졌다. 지호가 은은한 미소와 함께 천천히 마이크를 올렸다. 질문한 사람의 고민과 노력에 비해 대답의 목소리는 산뜻하다.


 


“네. 여자친구랑 봤습니다.”

“와…….”

 
감탄은 진행자에게서만 터진 건 아니었다. 더 캐물을 것도 없는 명확한 대답에 객석 분위기가 한껏 올라갔다. 출입구 앞에 서 있던 봉기는 오묘한 웃음으로 고개를 설설 젓기만 했다.


‘진짜 사귀는구나.’

 
거짓말은 고사하고 빈말조차 안 하는 지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혜윤은 이날 저녁 6시가 넘어서야 첫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곳은 민주가 찾아 놓은 유명한 횟집. 주문한 지 10분이 지나서야 밑반찬들과 회, 맑은 생선탕이 놓였다.

그 10분 동안 텅 빈 테이블 위에는 일주일 뒤를 기약했던 이야기들이 올려져 있었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연애 고백이 전부였건만 그 연애 상대가 굉장했으니. 민주도 쉽게 주제를 바꿔주진 않았다.

민주가 음식이 나오자마자 속도를 내는 혜윤을 바라봤다. ‘나 엄청 민망해.’라며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기에 조금 더 괴롭히고 싶었다.


“그래서, 어제는 어디서 주무셨어요? 장혜윤 씨?”

“……민주야, 이것도 먹어봐. 되게 맛있다.”

 
혜윤이 서둘러 회 한 점을 민주의 입 앞까지 뻗었다. 장난으로 말똥말똥한 눈은 피할 수 없으니 옴질거리는 입이라도 막아봐야 했다. 초장이 똑 떨어질지도 몰라 민주도 쏙 회를 받아먹었다.

오물오물. 꿀떡꿀떡. 3초 만에 입 안에서 사라진 회.


“아니다. 낮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지신 걸 보면 잠을 안 주무신 건가? 아침까지 뭐 하시느라?”

“그냥 바다 보고…… 그랬어.”

 
다시 회 한 점을 입에 넣는 순간에도 민주는 눈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혜윤은 이 짧은 한 문장을 두 번에 나누어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바다 보고’까지는 당당할 수 있었지만, 별것도 아닌 ‘그랬어.’로 말을 맺기까지는 마음의 밑바닥까지 손을 뻗어 휘휘 저어봐야 했다. 어제 한 움큼이나 쓴 용기가 한 톨이라도 남아 있길 바라며.

아무리 뒤적여도 남아 있지 않은 용기 대신에 뻔뻔함으로 응수했다. 대답은 어찌했지만 그와 동시에 정말 아침 바다를 본 이후의 상황들이 반짝 떠올랐다.


‘그래도 고마워요, 지호 씨. 눈 뜨자마자 바다 보여줘서.’

 
방을 따로 나와 다시 차 안에서 만났던 그 순간, 11시 10분쯤의 대화였다.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지호는 제 얼굴을 또렷하게 읽어낸 것 같았다. 가늘게 뜬 눈을 흘기는, 매력적인 새침데기 여자를 흉내 내려는 듯한 어설픈 표정을.

운전하는 그의 옆얼굴에 즐거움이 어른댔다.


‘뭐지? 전혀 고마운 눈이 아닌데?’


‘그때 잠깐이라도 못 봤으면…… 아침에 바다 못 볼 뻔했잖아요.’


‘큭큭. 내가 많이 잘못했네.’

 
생각만으로도 그 낮은 웃음소리가 선명히 살아나는 것 같았다. 웃음소리와 더불어 아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맹렬하고 격정적인 장면들도.


‘장혜윤, 미쳤지 아주. 덜덜 떨면서 고백한 지 얼마나 됐다고…….’

 
혜윤이 온 힘을 다해 눈을 꼭 감았다. 고양이 수염 같은 주름이 눈꼬리마다 잡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얼굴이 잠시 붉어지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애써 털어내고, 다시 눈을 뜨며 현실로 돌아오는 그 얼굴을 민주가 쭉 관찰하고 있었다.


“바다만 본 게 아니신가 봐, 장혜윤 씨. 이것저것 좋은 거 많이 보셨나 본데?”

“…….”

“좋은 추억이면 같이 좀 나눠요, 언니. 네?”

 
음흉한 눈으로 씩 웃는 민주의 얼굴에 혜윤이 덥석 아무 음식이나 입에 넣기 시작했다. 뭐라도 씹으면서 마음을 달래려고 했나 보다.


“그거 청양고추다. 뱉어.”

“응.”

 
입을 제외한 온몸이 저리도 이실직고하고 있으니. 심심할 때마다 놀려줘야지. 민주는 혼자만의 개구진 다짐을 했다.

띠리링-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혜윤의 핸드폰 화면이 밝아졌다.


“오, 남자친구? 잠시도 헤어져 있기 싫으시대?”

“에이…….”

 
콧등을 찡그리며 깜찍한 엄포를 놓았지만, 혜윤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화면을 들여다봤다. 두 여자의 예상과 달리 발신자는 민우였다.


[혜윤아, 우리 드라마 예고편. 드라마 규모가 작아서 몇 번 나가진 못해도 내일부터 깔릴 거야. (오후 6:42)]

 
그리고 곧 동영상 하나가 첨부되었다.


“민우 선배가 예고편 보내준 것 같아.”

“오! 예고편도 있어? 같이 보자.”

 
민주는 젓가락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 혜윤의 옆자리로 후다닥 달라붙었다. 조금 전의 열정이 새로운 주제로 옮겨 간 듯싶었다.

바짝 붙어 앉은 두 사람 사이로 혜윤의 손가락이 예고편을 재생시키려던 순간. 화면 밑으로 쓱 밀려드는 새로운 메시지.


[원래 화면이 더 크게 나와. 다들 그런 거니까 너무 낯설어하지 말고. (오후 6:43)]

 
두 사람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30초 길이의 예고편은 대부분 지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남녀 주인공으로 불린다고 해도 사실상 종수가 극 전체를 끌어나가는 단독 주인공이나 다름없었다.

<23센티미터>는 희수와 함께 지낸 한 달, 그 짧은 시간으로 조금씩 달라지고, 저도 모르게 성장하게 된 종수의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 예고편 속 혜윤이 등장하는 시간은 10초도 되지 않았다.

예고편이 끝난 화면 위로 혜윤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져 있었다.


“민주야…….”

“큭큭. 응.”

 
민주는 왜 혜윤의 미간에 꼬불꼬불 심통이 배였는지 아는 눈치였다. 왜 억울함으로 눈망울이 그렁그렁 해졌는지도.


“나…… 이 정도로 동글동글해?”

“왜, 귀엽게 나오는구만. 큭큭. 와, 진짜 고등학생 같아.”

 
영상이 멈춘 화면에 마지막 민우의 메시지가 다시 보였다. 이제 보니 민우가 하나 더 보내준 건 글자가 아니라 폭신폭신한 쿠션이었다. 놀라고 시무룩해져서 꽈당 넘어질까 봐, 기왕이면 이 쿠션 위로 넘어지라고. 조금만 아프라고.

민우의 말대로였다. 실물보다 키가 커 보여서 좋았지만 그것도 지호 옆에 서 있으면 작은 키가 그대로 드러났으니 의미는 없었다. 화장기 없는 하얀 얼굴과 댕강 하나로 묶어놓은 머리 때문인지 얼굴이 동그랗고 통통한 찹쌀떡 같았고.

물론 실물의 빛을 담지 못한 건 지호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화면 속의 지호는 매우 잘생겼지만.


“근데 안지호는…… 화면이 실물을 전혀 못 담네. 이건 실제로 못 본 사람들은 절대 모를 거잖아. 나도 이제야 알았는데.”

 
마치 혜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민주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그게 반가웠는지 혜윤이 곧장 말끝을 이었다. 글자마다 서운함이 몽글몽글 맺혀 있었다.


“그렇지? 실제로 보면 훨씬 멋진데. 속상하다.”

“와…… 숨도 안 쉬고 대답하는 거 봐.”

 
민주가 불쑥 혜윤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절실히 알 것 같았지만, 목소리로도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서.


“장혜윤…… 좋냐?”

“……응. 좋아.”

“큭큭. 아, 부러워.”

 
꾸밈없는 솔직한 감정들이 오가자 두 사람 모두 웃을 수밖에 없었다.


 

***

다음 날.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은 유독 특별했다. 이번 주 금요일은 혜윤의 드라마 촬영 마지막 날이자 <23센티미터>의 첫 방영일이었기에.

한주 늦게 부산에 내려온 지호의 촬영 일정은 다음 주까지 빼곡했지만 혜윤은 달랐다. 오늘만 해도 오후 촬영 4시간이 전부였고, 수요일은 아예 촬영이 없었다. 물론 촬영이 없었다고 해서 오전을 편히 보낸 건 아니었다.


“……굉장하다.”

 
<23센티미터>의 예고편은 TV 방영 횟수만 적을 뿐이었다. 점점 그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TV로만.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 예고편의 조회수가 벌써 5만에 다가서고 있었다.

또한 어느새 알 수 없는 외국어가 덧입혀진 채 전 세계를 여행 중인 것 같았다. 주말 내내 지호의 부산 무대인사로 가득했던 유명 SNS에는 장혜윤, 23센티미터 예고편, 안지호 장혜윤 같은 단어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예고편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댓글들. 잎사귀를 모두 쳐내고 중심가지만 남아 있는 깔끔한 댓글 하나가 혜윤의 눈에 콕 박혔다.

‘안지호가 아깝다.’ 뾰족한 7글자가 마음을 덧나게 했다. 그래서 화면을 닫으려던 참이었다.


[예고편 봤어요? (오후 1:07)]

 
막 도착한 지호의 메시지가 싹 잊게 해 줬지만. 잠깐 따끔했던 마음 위로 그는 금세 후후 입바람을 불어주었다.

지호는 어제 부산으로 내려온 배우들과 회식을 한 모양이었다. 아침까지 자신과 지내다가 저녁 내내 무대인사를 다니고. 늦은 새벽까지 회식, 이른 새벽부터 촬영. 단 몇 초의 틈이 생기면 이렇게 자신을 챙기려고까지 하는 남자.


“하아…….”

 
다시 조금 전 뾰족한 문장들을 마주했다.

‘안지호가 아깝다.’

마음을 덧나게 한 이유는 너무나 공감되는 말이라서. 혜윤은 큰마음을 먹고 그 댓글 끝에 놓인 엄지를 눌렀다. 언젠가, 그가 아깝지 않을 만큼의 좋은 여자가 되면 다시 와서 눌러놓은 엄지 자국을 지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날이 빨리 오길 바라면서.


[네. 지호 씨, 그런데 나 진짜 저렇게 생겼어요? (오후 1:09)]

 
Rrrr- Rrrr-

명랑한 답장을 보내자마자 지호의 이름으로 화면이 반짝거렸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의 목소리를 불렀다.


“점심시간이에요?”

-응. 그런데 저렇게라니? 어떻게?

“똥글똥글 똥글똥글.”

-큭큭. 원래 화면은 조금 부은 것처럼 나와요. 내 눈엔 예쁘기만 한데.

 
듣기 좋은 목소리로 듣기 좋은 말만 해 주니, 덧난 마음이 녹아내리는 건 당연했다.


“……그럼 됐다. 조금 심통 날 뻔했는데.”

 
혜윤이 귀여운 말과 어울리는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지호는 조용히 그 웃음을 귀에 담았다. 그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하는 건 굳이 말이 아니어도 됐으니까.


-참, 작가님 오늘 씬 중에…….

“……응?”

 
수화기 너머의 지호가 대뜸 말을 멈췄다. 조금 기다려도 여전히 반대편 세상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뭐지? 지호 씨?”

-아, 미안해요. 전화 끊어야겠다. 감독님이 급하게 찾으시네.

“응. 얼른 가 봐요.”

-그래요. 똥글똥글 귀엽게 잘 오고.

“큭큭. 이따 봐요.

 
서둘러 끊긴 전화였지만 1시간 뒤면 볼 수 있었기에 아쉽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씬 중에…… 무슨 말을 하려던 거였지?’

 
대뜸 끝내지 못한 지호의 말이 궁금해졌지만, 그것 역시 1시간 뒤에 물어보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른스럽고 너그럽게 궁금증을 뒤로 미루는 일. 그게 늘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1시간 뒤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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