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결국 만나다
(65/110)
65. 결국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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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결국 만나다
2023.01.11.
촬영장에 도착한 혜윤은 지난주까지만 해도 없던 대기실을 볼 수 있었다. 아파트만큼이나 오래된 상가 건물의 빈 가게 하나를 간이 대기실로 만든 것 같았다.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게끔 흰 막으로 가려둔 곳. 아직 그곳까지 열 걸음은 더 가야 했지만 ‘대기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붙여 놓은 글씨가 잘 보였다. A4용지에 두꺼운 사인펜으로 슥슥 써놓은 모양이 참 허술하고 귀여웠다.
“그럼 수요일에 다들 괜찮으신지 물어본다?”
“응. 맛있는 거 잔뜩 먹고 부산 구경도 하자.”
“어제 그 횟집도 괜찮던데. 더 맛있는 집 있는지도 알아볼게.”
그 애매한 위치에서 민주와 혜윤의 발이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민주야, 나 잠깐 지호 씨 얼굴 좀 보고 올게. 아까 제대로 못 들은 말이 있어서.’
‘어머,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해 주고 끊었어? 우리 혜윤이 섭섭하게?’
‘아, 진짜!’
차에서 내리기 전에 나눈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였다. 혜윤은 못해도 일주일 동안은 이렇게 놀림 받겠지 싶었다.
“……어? 여기 없으면 어디 있는 거지?”
당연히 차에 있을 줄 알았던 지호는 그곳에 없었다. 전화로 찾아내는 것보다 짠 하고 등장하고 싶었지만 딱히 짐작 가는 곳도 없었고.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의 화면을 밝히려던 때였다. 조금 전 허름한 대기실이 떠오른 순간이.
마침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려던 발이 종종거리며 신나게 그곳으로 향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선 공간은 대기실이라고 써둔 글씨와 비슷했다. 허술하고, 허름하고, 휑한. 사람도 몇 명 없었다.
“……어?”
그 휑한 공간 끝에 스타일리스트의 손길을 받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길고 풍성한 머릿결에 뒤태가 대부분 가려질 만큼 늘씬한 몸매였다.
누굴까, 라는 의문을 가질 틈이 없었다. 곧장 그 뒷모습이 혜윤을 똑바로 마주했기에. 여자가 앉아 있던 의자가 대기실 문 쪽으로 뱅그르르 돌았다.
“와…….”
그 순간, 놀란 마음이 호흡과 뒤섞여 입술 새로 빠져나갔다. 의자에는 지금껏 살면서 본 여자들 중에 가장 예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의 나른한 눈빛이, 스르륵 기울어지는 얼굴 속에서도 오직 한 곳에만 꽂혀 있다.
바라만 봐도 취할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또한 그것과 어울릴 만큼 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또한 눈빛을 따라 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장혜윤…… 작가님이시구나?”
미묘하게 올라붙는 한쪽 입꼬리에, 평생을 누리고 살았을 자신감이 흘렀다.
띠리링-
그녀의 인사에 대답할 틈도 없이 혜윤의 핸드폰이 맑은 소리를 냈다. 화면 속에는 1시간 전에 들었으면 좋았을 소식이 이제야 도착해 있었다.
[오늘 작가님이랑 지나랑 한 씬 겹칠 거예요. (오후 2:05)]
[나랑은 한두 시간 같이 찍을 것 같고. 궁금해할 것 같아서 말해요. (오후 2:05)]
혜윤이 답장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지금 같이 있어요.’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제 온몸을 훑는 지나가 보였다.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도.
“아, 잠깐 놀라서 인사가 늦었어요. 안녕하세요.”
의자에 앉아 있는 지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지나 역시 비슷한 고갯짓을 보였다.
“생각보다 예뻐서 놀란 거였으면 좋겠네.”
“맞아요. 너무 예뻐서…… 놀랐어요.”
줄곧 나른한 기운이 흐르던 지나의 눈동자에 잠시 빛이 돌았다.
보고 싶은 만큼 보고,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자신과 비슷한 행동을 하는 혜윤이었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기운들이 하나같이 저와는 정반대 같아서. 뭐가 다른 걸까.
만나기 전에도 궁금했지만, 만나보고 나니 더 궁금해졌다.
“고마워요. 작가님은 딱 상상했던 대로네요. ……귀여운?”
지나가 그제야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던 핸드폰을 벽에 붙은 테이블 쪽으로 옮겨두기도 했다. 핸드폰 화면은 <23센티미터>의 예고편이 멈춰진 상태였다.
작은 화면을 가득 채운 지호의 얼굴. 혜윤은 잠시 그 얼굴로 눈을 내렸지만, 금방 거둘 수밖에 없었다.
“오빠, 은지 언니랑 잠깐 나가 줘. 작가님이랑 할 말이 있어서.”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긴 지나의 말 한마디 때문에.
“아…… 지금?”
“응. 다른 사람들은 못 들어오게 하고.”
모두가 그녀를 봤지만, 그녀는 줄곧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었다. 혜윤도 그 눈을 지긋이 바라봤다.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거대한 호기심이 충돌하고 있었다.
“지나야, 너는 2시간 뒤에 찍는다 쳐도 작가님 일정도 있으실…….”
“몇 시부터 시작하세요?”
매니저의 말을 싹둑 자르는 와중에도 그 눈은 여전했다. 굳이 말속에 주어를 넣지 않아도 될 만큼.
“30분 정도…… 남았어요.”
혜윤의 짧은 대답이 들리자 비로소 지나는 매니저를 바라봤다.
“응. 그 전에 끝나.”
갸름한 턱 끝이 대기실 문 쪽을 가리켰다. ‘들었으면 나가야지 뭐 해?’라고 감정 없이 타이르는 것 같았다.
혜윤은 지나가 살아오면서 많은 오해를 부르고, 또 껴안고 살았을 거라 생각했다. 내리읽어낸 큰 눈 속에 악의는 없었지만, 그건 자신처럼 읽어내려 애쓰는 사람에게나 보이는 것이었으니까. 애쓰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예를 들면 기다려주지 않는 것. 둘만 남았을 때 해도 될 말을 다른 사람들이 채 나가기도 전에 내뱉는, 지금처럼.
“혹시 들은 얘기 있어요? 나랑 지호 오빠에 대해서.”
기다려주지 않는 것에 예외는 없나 보다. 설령 대답일지라도.
“뭐…… 있든 없는 상관은 없어요. 이제부터 내가 말해 줄 거니까.”
혜윤의 앞까지 다가온 매니저가 고개를 숙인다. 인사를 하며 보이는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락부락한 체격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감정 같아서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여린 미소가 거대한 남자를 위로하는 장면. 지나는 기이하다는 듯이 지켜봤다.
탁-
대기실의 문이 닫힌다. 지나의 요청대로 둘만 남게 되었지만, 어설프게 유리 벽에 붙여둔 흰 막 너머로 육중한 남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매니저는 ‘다른 사람은 못 들어오게 하고.’라는 요청까지 들어주려나 보다.
잠시 찾아온 적막. 원래부터 잘 기다려주지 않는 것 같은 여자는 이 순간에도 다르지 않았다. 지나가 특유의 알아듣기 쉬운 화법으로 말문을 열었다.
돌려 말하지 않는, 그럼에도 오해를 사기 좋은.
“지호 오빠랑 저랑 촬영장에서 몰래 키스했다더라…… 이런 식으로 소문났을 것 같은데. 혹시 들어봤어요?”
지나의 손등 위로 핸드크림이 동그랗게 얹어졌다. 쓱쓱. 뭉개질수록 모락모락 향기가 피어났다. 외모도 향기도, 온통 꽃 같았다. 꽃은 고백의 의미니까. 때때로 진심을 주고받을 때면 등장하는 선물 같은 거니까.
“……네. 대충은.”
혜윤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꽃 같은 그녀가 전해 주려는 말에도 향기가 나길 바랐다. 이미 지호가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기에, 지나가 여기서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많이 아쉬울 것 같았다.
‘아, 내가 저 사람의 눈을 잘못 읽었구나. 예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고.
“그렇구나…… 그럼 더 쉽네.”
그리고 작은 읊조림이 바닥에 떨어졌다. 두어 번의 느릿한 깜빡임 사이로 잠시 기억을 뒤적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혜윤에게 불쑥 꽃 한 송이가 내밀어졌다. 말 한 송이가.
“나 혼자 좋아서 달려든 거예요.”
화려하고 예쁜 포장은 없었지만, 지금 막 기억에서 똑 따온 말 한 송이에서 투박한 진심이 느껴졌다. 혜윤은 그 말이 반갑고 고마웠다. 그래서 지나를 따뜻하게 바라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기억 속에서 말 몇 송이를 더 따고 있는 것 같았다.
“지호 오빠가 가만히 있긴 했어요. 받아주려고 했던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느려도 망설이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굴던 지나가 말끝을 흐렸다. 어떤 꽃을 따려다가 가시에 찔린 걸까. 그녀의 큰 눈이 좀처럼 현실로 돌아올 생각을 못 하자 혜윤이 기척을 냈다.
“……내가?”
“응. 내가 입이 닿자마자 뗐어요. 많이 놀랐거든요.”
“뭐 때문에요?”
“……지금 정말 큰 실수를 하고 있구나, 같은 자각?”
지나는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콧바람을 내며 여유롭게 미소를 내렸지만, 그 끝엔 입술 어딘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 일의 시작을 따지려면 감정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시작은 그로부터 한 달 전, 친오빠의 촬영장 난동이 있던 그날이었다.
지호가 제 뺨을 때리려던 오빠를 제압하고, 촬영이 멈추고. 스태프들의 끝없는 웅성거림과 어수선한 상황이 정리되기까지 2시간. 다시 촬영이 시작될 때쯤이었다. 대본을 보고 있던 그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사람…… 가족이야?’
‘네?’
놀라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호가 제게 건넨 첫 질문이었으니까.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어떻게든 가까워지려 해도 그는 딱 선을 긋고 있었다. 예의 섞인 인사와 주고받은 대사가 전부였었다.
더군다나 반말이라니. 모든 게 처음이라, 모든 게 현실감이 없었다. 그녀가 눈치 보듯 고개를 돌렸다. 옆을 올려보자 빤히 제게 내린 눈길.
우습지만 두근거렸다.
‘궁금해서.’
‘다, 당연하잖아요.’
‘아니. 태어나보니까 엮여 있는 거 말고. 너한테.’
심장이 쿵. 쿵. 요란하게 울리는 와중에도 그의 눈빛이 무얼 헤아리려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너한테 그 사람…… 가족이야, 아니야. 그게 궁금해서.’
이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떨린다.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았다. 한 사람이 제게 집요하게 쏟아내는 눈빛이란 게, 그게 얼굴이 아니라 마음을 헤아리려 한다는 게,
뭐든 말하면, 뭐든 들어줄 것 같은 확신이 든다는 게.
지금껏 제 얼굴과 몸만 핥아댔던 시선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하는 거, 생각 없는 척 웃고 떠드는 거, 그런 거 숨 쉬듯이 하는 게 저인데. 쪽팔리고 매달리는 거, 해 본 적도 없고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그건데.
갑자기 말이 하고 싶어졌다. 도와달라고.
‘아니에요…… 가족.’
‘그래.’
그리고 연기가 아닌 처음으로, 지호의 미소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 미소는 분명 위로였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그다음 날. 결국 제 치부가 온 세상에 공개됐다. 회사는 가정사 관련한 모든 일들을 사실무근과 명예훼손, 법적 대응으로 겁주려 들었지만 채 반나절 만에 백기를 들었다.
‘드라마 촬영장에서 난동을 피운 전지나의 오빠를 안지호가 제압했다고 한다.’에 대해서 지호 측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했기에. 그건 사실상 다 맞다고 인정하는 모양이니까.
그래서 알았다. 아, 이 기사를 지호 오빠가 냈구나. 돈 떨어지면 찾아오는 가족, 몸값 떨어질까 봐 쉬쉬하는 말로만 가족이라는 회사. 그런 거 말고, 이 사람은 진짜 나를 걱정해 줬구나.
그곳에서 나오라고 문을 열어주는구나.
그래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 욕심은 끝이 없지. 그렇게 나왔으면 내 갈 길 가면 되는 건데, 지호 옆으로 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