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귓속말
(67/110)
67. 귓속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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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귓속말
2023.01.18.
“갑자기가 아니라 볼 때마다 생각하지.”
지호의 손을 잡고 생각 없이 걷다 보니 그의 차 앞까지 와있었다. 혜윤은 그가 줄줄이 주차된 차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길래 챙겨가야 할 무언가가 있나 보다 싶었다.
손을 잡고 그의 등을 따라 졸졸 쫓아가던 걸음이 뚝 멈춘 건 그때였다. 양옆으로 세워진 차가 둘을 가려주는 틈, 그곳에서 지호의 발이 멈추고 제 쪽으로 뒤돌던 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하마터면 그의 가슴에 이마를 콩 박을 뻔했다.
“응? 뭐 가져갈 거 있어요?”
한 뼘 남짓한 거리에서 혜윤을 내려 보는 눈이 온온했다. 지호는 대답 대신 혜윤을 찬찬히 훑었다.
봉긋한 이마를 타고 내려간 겨울의 햇살이 호기심 어린 눈망울 위에 윤슬을 이뤘다. 작은 얼굴에 올망졸망 예쁘게도 모아놨지 싶은 코와 입술까지.
늘 마지막에 보이는 건 더 오래 남는 법이라서.
그가 말아 물은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곧 혜윤을 바라보던 눈이 시야를 넓힌다. 고개를 가볍게 기울이며 혜윤의 등 뒤를 기웃거리자 그녀 역시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알 수 없는 행동, 돌아오지 않는 대답. 답답한 마음이 혜윤의 입술 사이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왜 그래요?”
“그래도 눈치 한 번쯤 봤다는 느낌은 주려고요. 나름 직장이니까?”
“응?”
“꼭 이런 건 누가 보더라고.”
싱긋 웃는 얼굴에 스며 있는 장난, 그리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애정. 결국 호기심 대장의 미간이 쪼글쪼글 구겨졌다.
“자꾸 무슨 말이지?”
“글쎄?”
지호가 그녀의 모든 행동을 똑같이 따라 했다. 잠시 미간에 힘을 주고 고개를 기울이고. 혜윤이 또 한번 답을 안 줄 것 같은 행동에 바짝 심통을 모을 무렵, 한순간 지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바로 선 고개 위에 짙어진 눈빛. 그 엄청난 간극에 놀랄 틈도 없이 지호가 그녀의 손목을 당겼다.
“으앗…….”
품으로 빨려 들어오는 몸을 감싸고, 제 차 쪽으로 몰고. 그리고 혜윤이 계속 궁금해했던 이곳에 온 이유를 직접 보여주었다.
그녀의 등이 차 외벽에 밀착되는 것과 동시에 두 입술도 맞물렸다. 겨울바람이 헝클이는 머리카락 밑으로 뜨거운 숨들이 오갔다. 입술이 닿는 순간, 혜윤은 놀란 마음에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지호는 그녀의 입술을 사탕처럼 굴렸다. 한입 한입이 너무 달아서 아쉬운 사람처럼, 부드럽고 애틋하게. 어느새 그의 가슴 위에 올려진 작은 손은 점퍼 속 그의 교복 재킷을 꼭 쥐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에 녹아내린 사탕은 핥아 먹을 때마다 진득진득한 소리를 낼 것 같았다. 꼭 지금처럼. 감성은 시작부터 녹아내렸고, 얇은 이성 한 줄만 겨우 남아 있을 때.
저벅- 저벅-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 혜윤이 쥐고 있던 재킷을 놓으며 그를 힘껏 밀어냈다.
그런데 몸이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허리를 감싼 손에 강한 힘이 느껴졌다. 더욱 견고하게 밀착된 몸은 이제 조금의 틈도 없었다. 몸 위에 입술 역시 더 깊고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커지던 발소리가 뚝 멈추더니 다시 작아져 갔다. 보고, 놀라 멈추고, 되돌아가고. 혜윤의 머릿속에는 모르는 사람의 순간들이 그려졌다. 그 조마조마한 마음이 숨결에서도 느껴지자 그때야 지호가 베어 물던 입술을 놓아주었다.
“하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아득한 눈 속에 아른대는 원망. 붉게 부푼 입술 사이로 그 불안이 고스란히 새어 나오려 할 때, 떨어져 나가려던 코끝이 다시 한번 톡 닿는다. 지호가 혜윤의 입술을 쏙 빨아들였다. 작은 불안도 다 빼앗아 가려는 듯이.
그 야릇한 장난에 걸맞은 목소리가 그녀를 달랬다.
“집중을 못 하네. 뭐가 그렇게 무서울까.”
무엇도 개의치 않는다는 말투에 장난만 있는 건 아니었다. 상대가 이 관계에 이렇게까지 강한 확신을 보인다면, 두려움도 쉽게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혜윤이 지호의 가슴께에 있던 손을 올렸다. 잔뜩 뭉개져 반들거리는 립밤이 야해 보였다. 그 입술을 엄지로 살살 문지르며,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가 제법 그럴싸했다.
“우리 지호 큰일 났다. 맨날 이런 거 할 생각만 하고.”
“큭큭. 말투 좀 봐.”
살금살금 움직이는 손 밑으로 지호의 입매가 유쾌하게 휘어진다. 손은 한없이 조심스러우면서도 말만 우쭐거리는 게 귀여워서 더 그랬다.
***
“어? 왜 다시 와? 우리 차 저쪽에 있잖아.”
“아니야.”
“뭐가 아니야, 맞구만.”
들통난 사람들이 기분 좋게 웃고 있을 무렵, 막상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그가 저 뒤에서 육중한 장비를 들고 오는 다른 스태프를 향해 손짓했다.
빠르게 휘휘 저어지는 손놀림이 어서 되돌아가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하지만 무거운 짐을 여기까지 들고 온 상대에게는 그런 손짓이 와닿을 리 없었다. 열흘 넘게 같은 곳에 주차해놓은 차가 없다는 걸 믿을 바보는 없으니.
그가 여전히 발을 멈추지 않는 뒷사람에게 조바심을 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1분만 있다가 가. 아니다. 5분? ……10분?”
“자꾸 뭐라는 거야. 무거워 죽겠는데. 비켜.”
결국 뒤에 있던 스태프가 빠른 걸음으로 그를 앞질렀다. 애정 행각은 저쪽에서 했는데 왜 이쪽에서 전전긍긍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그냥’이 가진 힘은 매우 컸다. 생뚱맞게 허공으로 목청을 높일 만큼.
“어! 우리 지금 주차장 들어갑니다!”
“얼씨구? 뭐 하는 거야?”
“우리 차 저쪽 끝에 있어요! 쭉 걸어 들어가면 주차장 다 보일 건데!”
“……추위도 먹을 수 있나? 더위 먹듯이? 단단히 미쳤네.”
이 정도까지 했으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 그였다.
***
5시가 넘자 뉘엿뉘엿 해가 졌다. 이 하늘을 배경으로 지호와 혜윤, 지나가 함께하는 유일한 장면을 찍을 예정이다. 특별한 대사는 없는, 오직 시선의 방향으로 마음을 가늠할 수 있는.
오늘 혜윤의 마지막 촬영이자 지나의 첫 촬영이었다.
“눈빛으로 분위기만 살려주면 돼요! 예원이가 종수 보고, 종수가 희수 보고. 희수는 덤덤한 느낌인 건데…….”
민우가 모니터에 잡힌 세 사람을 보며 말을 멈췄다. 힘 있던 말투치고는 말꼬리가 많이 흐늘거렸다.
“그런데 혜윤아.”
“……네?”
쭉 모니터를 보던 민우가 눈썹을 실긋 기울이며 혜윤을 찾는다. 다른 곳에 한눈을 팔고 있는 그녀였기에, 느린 대답이 돌아올 거라 예상을 한 모양이었다. 민우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들렸다.
“왜 그렇게 지나 씨만 쳐다봐?”
“제, 제가요?”
“큭큭. 왜, 좋아서 그래? 지나 씨한테 자꾸 눈이 가?”
어르는 말투가 부들부들했다. 지나가 몇 걸음 옆에 선 혜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크게 깜빡이는 눈 아래로 입술이 작게 열릴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유심히 지켜봤다.
“쪼금밖에 안 봤는데…….”
민우에겐 들리지 않을 혼잣말. 지나는 혜윤을 신기한 듯이 바라봤다. 그러다 툭. 툭.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자신과 비슷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던 지호가 두 걸음 만에 혜윤 옆으로 다가서 있었다.
혜윤의 한쪽 어깨를 꾹 누르며 무어라 속삭이는 것 같았지만, 지나에게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본 적 없는 그윽한 눈빛만 보일 뿐.
“너무 사랑스럽게 쳐다보네.”
“그냥 어쩌다가 눈이 가서 조금만 본 건데…… 많이 안 봤는데.”
그러다 불쑥 지호가 혜윤의 귓가에 입을 내렸다.
“남자 좋아한다더니. 확실해요?”
“응? 갑자기 무슨…… 우와! 다 들었어! 그렇죠!”
“작가님, 쉿.”
빽 소리치는 혜윤에게 모든 사람의 눈이 꽂히는 순간이었다.
5분 뒤, 예상했던 대로 촬영은 한 번에 끝났다. 지호와 지나는 몇 장면이 더 남았기에 혜윤만 조용히 퇴근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봤자 스태프들과의 인사가 전부였지만.
지호와는 당연히 눈빛으로, 지나와도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오늘의 반가움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돌아서려던 발이 멈칫. 눈을 뱅그르르 굴리더니 다시 몸을 돌렸다. 대본을 보고 있는 지호에게로.
톡톡-
“……응?”
“지호 씨, 잠깐만.”
혜윤이 지호의 팔을 잡았다. 정말 끌고 가려는 게 맞는지 헷갈릴 만큼 손끝에 힘이 없었다. 사람들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도착해서야 혜윤은 팔을 놓았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게 귀여워서 지호는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뭔지는 몰라도 계속 지켜보고 싶었다. 이번엔 또 어떤 놀이를 하는 중인 걸까.
그 순간 혜윤의 손이 지호의 귀를 불렀다. 제 오른팔 쪽에서 발끝으로 키를 늘리려 하기에 그 역시 허리를 구부려줬다. 그녀의 입이 지호의 귀에 바짝 붙었다. 작은 양손도 동그랗게 귓속말할 준비를 끝낸 듯하다.
“……으면 좋겠어요. 나도…….”
“큭큭. 응?”
그리고 곧 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목소리는 안 들리고 작은 숨소리가 간지럼만 태우고 있었기에.
“조금 크게 말해도 돼요. 나도 안 들린다.”
그리고 그가 오른팔로 혜윤의 어깨를 감쌌다. 꼭 붙은 몸 사이로 이제야 조금 커진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작았지만.
“이제 들려요?”
“응. 말해요.”
귀여워만 하기엔 상대가 나름 진지해 보여서, 그도 오른쪽 귀에 집중했다. 그러자 퇴근도 마다하게 만든 그녀의 진심이 들렸다.
“있잖아요. 나 없을 때도 아까처럼 지나 씨 오래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응?”
“엄청 예쁘게 생겨서 나도 자꾸 눈이 가는데요. 그래도 지호 씨가 오래 보는 건…… 샘이 많이 나요.”
괜히 집중했지. 쓸데없이 집중해서 귀여운 것만 더 알아버렸네.
지호가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끝낸 건지 혜윤이 다시 키를 낮췄다. 여전히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너무 진심인 게 티가 나서, 미안하지만 너무 귀여웠다. 머리로 손을 뻗으려는데 혜윤이 고개를 돌린다.
“진짜 인형 같다…….”
그녀는 다시 지나에게 시선을 뻗었다. 민우의 놀림 속에서도 몰래 힐끔거리더니, 짧은 촬영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인 게 틀림없었다. 지호가 마음만큼이나 새하얀 얼굴을 바라봤다. 추운 건지 코끝이 여리여리하게 붉었다.
“추운데 빨리 가서 쉬어요. 끝나고 연락할 테니까.”
“응. 꼭…… 노력해요.”
혜윤이 지호의 양손을 조물조물했다. 꾹꾹 힘을 실어 주는 게 격려를 하는 것 같았다. 진짜로 최선을 다해달라고.
“하아…… 보내기 싫어 죽겠네.”
그러니 지호 역시 진심이 절로 뱉어졌다.
***
“대사 한번 맞춰 보자.”
혜윤이 떠난 촬영장. 지호는 지나 곁으로 다가갔다. 별다른 감정이 없는 목소리와 함께 대본을 넘기는 소리. 지나는 잠시 어깨를 움츠렸다.
맞다, 지금 겨울이었지.
문득 이 생각이 스쳤다. 한 사람이 잠깐 봄을 데려왔던 것 같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추위를 느끼다니. 문득 고개를 돌리자 지호가 제 얼굴을 보고 있었다. 대본을 가리키는 눈짓과 함께.
일 년 전, 늘 봐오던 지호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