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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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척
2023.01.22.
“……지호 오빠.”
그의 이름을 담은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호는 표정 없이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날…… 미안했어요. 이 말 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
“괜히 딴생각하고 왔다고 오해할까 봐.”
혜윤과 함께일 때의 여유로움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어색하게 끊어지는 말투와 주눅으로 작아진 목소리. 그건 혜윤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모습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사과였으니 당연했다.
“……그래.”
지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금 전처럼 그녀의 대본을 향해 눈짓했다. 어린아이가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눈의 언어. 알았으니까 대본 보라고.
지나는 멍하니 그 눈빛을 곱씹었다. 사과를 처음 해봐서, 잘 몰라서 그런 건가 싶었다. 보통 사과하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건가. 뭔가 답이 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21살에 어울리는 뾰로통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용서 안 해 줄 거예요? 빈말이라도. ……빈말하는 성격 아니겠지만.”
“용서는 무슨. 뭐 그렇게 큰 죄 지었다고.”
지호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 이번엔 손가락으로 정확히 그녀의 대본을 가리켰다. 그만 일하자고.
“……네.”
결국 지나는 대본을 펼쳤다. 사과하면 원하는 대답을 얻게 될 거라는 오만한 기대. 지호는 그녀의 욕심을 와장창 박살 내주며 다시 한번 벌을 주고 있었다.
***
다음 날. 이날 오후의 촬영은 모두 희수의 졸업식 날 이야기였다. 용돈으로 즐겁게 노는 하루. 두 사람이 온종일 함께하는 유일한 하루이자 제일 가까워진 날.
그리고 졸업식 날의 마지막은 이전에 찍었던 바닷가 장면으로 이어진다. 제일 가까워진 날, 종수는 희수가 다시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걸 깨닫는 흐름이었다.
오후 촬영은 거의 대사도 없었다. 음악을 덧입힐 예정이라 정말 적당히 즐겁기만 하면 끝.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거구나.”
지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인형 뽑기를 하고 있었다. 시작할 때 옆에 놓아둔 천 원짜리 10장은 이제 단 3장뿐이었다.
“와, 엄청 못 한다. 나와봐요.”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던 혜윤이 결국 답답함을 뱉었다. 붙어 서자마자 그의 몸을 옆으로 밀어낸다. 촬영 준비 중인 스태프들을 등진 채,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더 집중한 것 같았다.
“잠깐 이것 좀.”
혜윤이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 소품을 건넨 순간, 지호는 그 잠깐의 눈빛을 읽었다. ‘바보.’ 두 글자가 어찌나 잘 보이는지. 꽃다발을 받아 든 그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섞였다.
“큭큭. 좀 하나 보네?”
“다 만들어 놓고도 못 뽑으니까 답답하잖아요.”
그리고 그 자신감은 실력에서 나온다는 걸 곧장 증명하는 혜윤이었다. 돈을 넣고 신중히 위치를 살피더니만 그 뒤엔 거침이 없었다. 그가 7번을 도전해도 만져볼 수 없던 인형이 어느새 혜윤의 품에 있었다.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는 분홍색 곰 인형을 꼭 안고 있는 게 귀여웠다.
“와…… 왜 이렇게 잘해?”
“지호 씨, 인형 뽑기는 그렇게 한 번에 뽑으려고 하면 안 돼요.”
우쭐거리는 목소리는 더 귀여웠고. 그래서 지호는 조금 더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오, 그래요?”
슬쩍 기울어진 얼굴과 잔뜩 휘어진 눈이 모두 한 사람을 향한다. 마침 기세등등한 얼굴이 턱을 한껏 치켜들었기에, 정말 눈높이가 비슷해질 수 있었다.
“응. 차곡차곡 탑을 쌓아서 뽑을 수 있도록 만드는 거! 그 탑이 중요해요. 이미 만들어진 탑을 찾든가, 없으면 몇 번 공들여서 만들어야지.”
혜윤이 작게 ‘에헴.’ 같은 추임새를 더했다. 그러니 지호의 입꼬리가 더 올라갈 수밖에. 웃으며 듣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것도 맞고, 정말 공감되기도 해서.
“아, 내가 장혜윤 갖고 싶어서 공들였듯이?”
“……응? 그건 아닌데?”
“왜 아니야? 그 인형 하나 뽑겠다고 내가 얼마나 탑을 쌓았는데.”
그가 유심히 혜윤의 얼굴을 살폈다.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고개를 설설 흔들 때마다 장난의 기운이 폴폴 풍겼다.
“걔는 그냥 자기 발로 걸어 나왔어요. 다른 인형 뽑으면 어떡하지! 하면서.”
말은 어떡하지, 라면서 표정은 어찌나 당당한지. 결국 지호의 입술 새로 웃음이 터지자 혜윤도 따라 웃었다.
“저기…….”
“네?”
순간, 어색한 기척에 두 사람이 뒤돌았다. 모든 세팅이 끝난 카메라와 함께 민우가 서 있었다. 천천히 열렸다 닫히는 눈꺼풀 사이로 약간의 난처함이 비쳤다.
“촬영도 지금처럼 할 거야? 대충 괜찮기는 한데…… 지금 둘이 너무 좋아 죽는 느낌이거든요? 꼭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사람들처럼.”
혜윤이 인형을 안은 손에 힘을 줬다. 인형이 아프다고 할 것 같아서 서둘러 힘을 빼자 이번엔 볼이 빵빵해진다. 다행히 바로 옆에 지호가 있었기에 어색함을 감추려는 모든 행동들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지호는 민우를 향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덜 좋아하는 척을 해 줘요. 이런 요청은 나도 처음이긴 해.”
민우의 말이 끝나자 스태프들이 작게 웃었다. 지호도 비슷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곳저곳에서 잔잔히 울리는 웃음 사이로, 혜윤에게만 들릴법한 낮은 목소리가 내렸다.
“귀신이시네.”
그의 혼잣말에 부풀려 놓았던 볼에서 바람이 샜다. 정확히는 행복이.
***
“고추장을 많이 넣었나 보다. 떡볶이가 약간 텁텁해요.”
다음 장면은 근처에 미리 섭외해둔 분식집에서 진행됐다. 혜윤은 소품으로 나온 떡볶이 하나를 벌써 오물거리고 있었다. 얼른 하나를 더 집어 지호의 입에 가져가자 그 역시 입을 동그랗게 열었다.
지호가 떡 하나를 삼키며 혜윤을 봤다. 입이 작아서인지 여전히 씹고 있었다.
“요리 진짜 잘하나 보다.”
“나? 아니요. 잘 못해요.”
“너무 겸손한데? 나 전에 먹어봤잖아요. 아침 차려준 날.”
“아, 그거…….”
짧게 말을 흐리던 혜윤이 오물조물하던 입에 속도를 냈다. 곧이어 꿀꺽 삼키고는 배시시 미소를 보인다. 오물조물 먹을 때도 예뻤던 입은, 아름아름 망설일 때도 여전히 예뻤다. 천천히 열리는 입술이 부끄러운 모양새를 띠었다.
“소고기뭇국 맛있었어요?”
“네. 엄청.”
“다행이다. 사실은…… 나 요리 그것밖에 못 해요, 소고기뭇국.”
“응?”
지호의 한쪽 눈썹이 황당함에 꿈틀거렸다. 쑥스러운 빛이 여리여리하게 혜윤의 얼굴을 물들였다.
“반찬은…… 다 엄마가 만들어준 거.”
“큭큭. 미치겠다.”
“속은 기분이에요? 그래도 국이랑 밥은 진짜 내가 한 건데…….”
느릿느릿 끔벅끔벅. 한 번씩 눈꺼풀이 움직일 때마다 작은 두근거림이 쌓이는 게 보였다. 약간의 초조함도.
언제나처럼 감추지 못하는 여린 마음을 지켜보다가, 지호가 떡볶이 옆에 놓인 튀김 하나를 혜윤의 입으로 쏙 넣어줬다. 좋아할 만한 대답과 함께.
“난 국이랑 밥이 제일 맛있더라.”
“음…….”
튀김을 꼭 가둬둔 입술이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금세 바사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살금살금 올라붙는 입꼬리. 초조함이 사라진 자리에 어떤 마음을 올려놨을까. 지호가 싱긋 웃으며 그녀를 살폈다.
“너무 마음에 든다고?”
“아니요. 엄마한테 일러야지. 지호 씨가 반찬 맛없다고 했다고.”
“우와…….”
장난을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또 한 번 웃음이 나려는 지호의 입 속으로 똑같이 튀김을 넣어주는 혜윤이다.
장소가 바뀌어도 분위기는 여전했다. 조금 늦게 합류한 조연출이 민우 옆으로 다가선다. 민우와 똑같은 모니터를 보며, 역시나 똑같은 감상이 생겨난 듯했다. 그의 목소리가 짓궂었다.
“둘이 너무 좋아하는 느낌인데요?”
“응. 자제시킨 게 저거야. 대충 찍어서 써.”
모니터 속의 두 사람이 그러했듯, 이 둘도 같은 감정으로 웃었다. 하지만 곧 조연출의 입가에 걱정이 어렸다.
“혜윤 씨 첫 방 나가고도 저렇게 웃기만 했으면 좋겠네. 지금 아주…… 난리던데요.”
“뭐, 잠깐 그러다가 잠잠해지니까.”
“그 잠깐이 너무 굉장하잖아요. 지호 씨 때문에.”
어느덧 3일 뒤로 다가온 첫 방송일. 두 사람은 웃음이 가신 눈으로 모니터 속 얼굴들을 바라봤다.
***
게임을 하고, 떡볶이를 먹은 이후의 촬영도 비슷했다. 함께 붕어빵을 먹으며 걷고, 소소한 쇼핑을 하고. 종수는 관심도 없는 문제집을 선물하는 희수가 있었고, 두 옷 사이에서 고민하는 희수에게 더 잘 어울리는 걸 골라주는 종수가 있었다.
정말이지 데이트 같은 촬영이었다.
“오늘 너무 재밌었다.”
6시, 오늘의 마지막 장면을 앞두고 지호가 혼잣말을 흘렸다.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더 듣고 싶어서, 혜윤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그 눈빛이 닿은 입술이 또 한 번 따뜻하게 열렸다.
“고등학생 때부터 일 시작해서 이런 추억이 없거든요. 중학생 때는 그럴 상황이 아니었고.”
“…….”
“작가님이 오늘…… 내 6년을 채워줬네. 받기만 해서 어떡하지?”
목소리만큼이나 기분 좋은 시선이 혜윤을 어루만졌다. 그러다 지호가 혜윤의 등 뒤에 민우를 본다. 대뜸 걸음을 옮기는 것도 그와 동시였다.
그리고 잠시 후, 스태프들의 환호를 부를 민우의 말이 들렸다. 종일 이어진 촬영으로 지친 목소리치고는 흥이 가득했다.
“오늘 끝나면 다 같이 저녁 먹어요! 내일 촬영 있어서 술은 안 되고 식사만! 지호 씨가 근처에 유명한 한우 맛집에서 밥 사신대요!”
“와! 지호 씨, 감사합니다!”
여기저기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지호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 박수를 작게 흉내 내고 있었다. 혜윤은 다시 제 곁으로 돌아오는 그를 바라봤다. 식사를 대접하는 거야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메뉴 선정이 잘못된 것 같았기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너무 비싼 음식인 것 같아서.
그리고 그게 혼자만의 걱정은 아닌 듯했다. 바로 옆까지 다가온 지호에게 자신보다 빠르게 걱정을 비춘 건 조연출이었다. 그는 어느 틈에 지호 옆에 서 있었다.
“지호 씨, 돈 너무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우리 그 집 가서 배부르게 먹으려면 몇백은 우습게 나와요. 몇백이 뭐야, 까딱하면 천만 원도 나올걸? 내가 다른 집 아는데, 그쪽으로 가요.”
“아니에요. 오늘 일은 안 하고 혜윤이랑 논 것 같아서요. 출연료 받은 거 돌려드리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그냥 거저 출연해 주는 거면서.’라는 조연출의 말 뒤로 가까이 민우의 목소리도 들렸다. ‘사실 둘이 노는 것 같긴 했어.’라는 장난의 말. 세 남자는 유쾌하게 웃었지만 혜윤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조연출을 보다가, 지호가 시선을 돌렸다. 바로 옆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눈에 억울한 감정이 보르르 끓고 있었다.
서운하고, 애틋한 마음이.
“왜요. 또 밥값 반 주려고?”
지호가 장난스럽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주는 것에는 한없이 진심인 여자가 식사 대접의 이유에 제 이름이 들어간 걸 알아버렸으니. 어떤 말을 할지 안 들어도 훤했다.
“엄청 비싼 집인가 봐요. 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자꾸 빚이 늘어나요.”
“큭큭. 밥값 줄 생각 말고, 진짜 밥 해 줘요.”
“진짜 밥?”
“응. 그것도 반만 해 주면 돼. 반은 어머니 반찬 주고, 반은 작가님이 직접. 어때요? 한 번 해봐서 익숙하려나?”
혜윤이 장난으로 포장해둔 그의 애정을 건네받았다. 귀여운 꼼수마저 감동으로 되돌려주는 그를 초롱초롱 올려봤다. 그래서 그 시선과 함께 그가 반가워할 만한 대답을 띄워 올렸다.
“응. 그럼 난 자주자주 많이 많이 해 줄게요.”
“아…… 저녁 몇 번 더 사도 되겠다.”
“아, 진짜! 돈 그만 써요!”
결국 이날 마지막 촬영까지, 두 사람은 덜 좋아하는 척은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