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구원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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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구원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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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구원의 정의
2023.01.25.
“작가님 인생 정말 잘 사셨나 보더라. 꼼꼼히 모니터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안 좋은 말이 전혀 없네.”
첫 방송을 단 하루 앞둔 밤. TV를 켠 봉기가 넌지시 말을 흘렸다.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옷부터 벗던 지호가 작게 반응했다. 꼬박 16시간의 촬영으로 피로가 배인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보였다.
“동창이라는 글 몇 개 올라온 거 보면 죄다 칭찬이야. 예뻤다, 공부 잘했다, 착했다, 남자들한테 인기 많았다…….”
“인기 많았대?”
벗은 교복 조끼를 쥔 손이 멈칫. 지호가 흥미롭게 봉기를 본다.
“그런 것만 들리냐?”
봉기의 흘겨보는 눈에 지호는 키득 웃기만 했다. 문밖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물며 가족들에게도 어느 순간부터 떠받들어지는 존재가 됐으니. 제게 툭툭 말을 던지는 사람은 봉기가 유일했다.
물론 혜윤은 툭툭 던진다기보다는, 살살 간지럼을 태우는 말투였고.
뭐가 됐든, 지호에겐 제일 편하고 고마운 두 사람이었다.
“첫 방 나가면 우리가 먼저 치고 나갈까도 생각 중인데. 좋은 기사로 여론 몰이 좀 해볼까 하고.”
“아니. 그런 것도 하지 마.”
“그럼?”
침대에 걸터앉은 봉기가 지호를 올려 봤다. 당장 내일로 다가온 첫 방송일, 충분히 예상가는 해일 같은 반응들. 지호가 가장 신경 쓰는 게 누구인지는 알지만,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지를 몰랐다.
제일 중요한 문제 앞에 봉기의 눈이 깊어진다. 지호 역시 셔츠를 풀던 손이 뚝 멈춰 있었다.
“그냥…… 최대한 조용하게. 안 좋은 기사만 신경 써서 내려주고.”
말을 끝낸 뒤에도 지호의 손은 여전히 셔츠 위에 굳어 있었다. 봉기도 천천히 그의 대답을 곱씹었다. 최대한 조용하게. 지호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알았음에도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안지호 여자친구’가 꼬리표가 아니라 그녀의 이름표가 될 텐데. ‘조용하게’라니.
“기사 올리고 내리는 거야 어떻게든 할 수는 있는데…… 조용하게는 불가능인 거 알고 있지?”
“…….”
“작가님도 마음 좀 단단히 먹으셔야 할 거야. 여기저기서 떠들기 시작하면…… 분명히 상처받을 테니까.”
지호 역시 마음처럼 무거워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벗어 놓은 교복 조끼 위에 셔츠가 툭 올려지자 봉기도 슬슬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최대한 노력은 해볼게. 조용하게…… 그래, 해보자. 누가 이기는지.”
“응. 고마워.”
첫 방송을 앞둔 설렘과 긴장감은 없었다. 적잖은 비장함을 나누며 지호는 샤워실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봉기 역시 손에 쥔 리모컨으로 TV를 끄려던 참이었다. 지루한 뉴스 채널에 숫자 하나를 더 하자 새로운 채널, 새로운 화면이 보였다.
새로운 화면 속 익숙한 남자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도혁 씨, 이번 영화가 500만을 돌파 했어요.”
“네. 큰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봉기가 한 번 더 채널을 옮기려던 손을 멈춘다. 반지르르 꾸며진 얼굴이 제법 근사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500만? 정 대표 똥줄 좀 타겠네.”
샤워실로 들어가려던 지호의 발을 잡은 건, 도혁보단 봉기의 목소리였다. 500만 관객이라는 큰 수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 같아서.
지호가 봉기를 향해 돌아섰다.
“왜? 제작비가 그렇게 많이 들었어?”
“응. 저 영화 600만이 손익분기점이야. 운 좋으면 본전치기는 하겠다.”
시대극도 아닌데 제작비가 상당했구나, 이런 가벼운 감상이 전부였다. 그 생각과 어울리는 고갯짓과 함께 지호 역시 화면 속 도혁의 얼굴을 봤다.
“워낙 쟁쟁한 경쟁작들이 많아서 솔직히 마음고생 하셨을 것 같아요.”
“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래서 같이 올라온 것 같더라고요. 이기고 싶어서 견제하고, 눈치 보고. 그러다 보니까 제 인생이 이 꼭대기에 있네요. 늘 의식했던 경쟁자 옆에.”
늘 의식했던 경쟁자. 그 표현이 누구를 지목하는지 봉기와 지호 모두 같은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봉기가 급하게 소리를 키운 것과 동시에 지호 역시 TV를 제대로 마주했으니 말이다.
그 관심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TV 속 도혁의 목소리가 화면 밖의 한 사람을 향한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안지호 선배님께도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어요. 그렇게 생각해보니까 제 인생에 귀인이시더라고요.”
의외의 발언에 눈이 동그랗게 커진 진행자, 그에 비해 천연덕스레 웃는 도혁. 봉기의 몸이 스르르 지호를 향했다. 화면 속 진행자보다 더 큰 눈을 보이며.
“뭐라는 거냐? 귀인?”
“…….”
“와, 씨…… 연기를 저렇게 잘했다고? 이번 영화 챙겨봐야겠네.”
“……연기 아닌 것 같은데.”
황당함이 금세 흥분으로 번진 봉기와 달리 지호는 차분히 화면을 바라봤다. 늘 자신만 지호를 의식하는 것 같아 서러웠던 도혁이었지만, 이 순간은 누구보다 지호가 그를 읽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걸 알 리 없는 도혁은 여전히 화면 속에서 인터뷰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머, 도혁 씨 마음이 정말 넓으시다. 그런 마음 갖기 쉽지 않잖아요.”
“아니, 뭐…… 썩 좋아하는 귀인은 아니긴 한데.”
“와,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니에요?”
“하하. 농담이죠. 제가 안 선배님 많이 좋아합니다.”
그리고 도혁의 마지막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면 밖 두 남자의 말이 터진다.
“이건 연기다!”
“이게 연기지.”
동시에 나온 반응에 지호가 피식거렸다. 황당하게도 작은 한숨과 함께 안도를 보이는 봉기 때문에 더 그랬다.
“깜짝이야. 언제 저렇게 연기력이 늘었나 했다. 계약서 들이밀 뻔했네.”
실실 웃던 봉기가 다시 TV 소리를 낮췄다. 지호는 잠시 도혁의 얼굴을 되새겼다. 눈빛을 보니 마지막 한 문장을 빼면 진짜라는 건데. 어떻게 자신과 날을 새운 지 한 달도 안 돼서 정반대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된 걸까.
‘어제 회식은 잘했어요?’
‘네. 그리고…… 차도혁 씨도 다녀갔어요. 지호 씨한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전해달랬어요. 이렇게 말하면 알 거라고.’
불현듯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부산의 소식들을 조곤조곤 속삭여주던 목소리. 제겐 서울에서의 기억.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누구 때문인지는 알겠네.
“혜윤이가 또 동화 놀이 했나 보네.”
“뭐? 무슨 놀이?”
TV를 끈 봉기가 지호의 작은 혼잣말에 반응했다. 문을 나서려다 돌아본 지호의 몸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아니야, 아무것도.”
누구를 생각하는 건지, 그 위에 떠 오른 미소까지. ‘저 사람이 내 배우입니다!’라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누를 수 있었다. 요즘 지호의 얼굴은, 그 충동을 자주 일게 만들어서 문제였다.
***
“컷! 5분 정도 세팅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게요!”
다음 날. 혜윤은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 촬영 내내 해왔던 행동이었다. 컷 소리가 나면 얼른 현실로 돌아와 주위 사람들을 살펴보는 일. 이곳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을 마음에 담아두고 싶어서.
드디어 첫 방송일이었지만, 그녀는 마지막 촬영일에 더 의미를 뒀다. 처음은 다음이 있지만, 마지막은 정말 마지막이니까.
점심시간에도 대충 밥을 먹고는 한 사람씩 찾아가 인사를 나눴다. 저녁에 다 같이 회식 겸 첫 방송을 보기로 했지만, 그곳엔 철저히 장혜윤만 있을 것이다. 아직 여기엔 김희수도 함께였다.
마지막 한 장면을 앞둔 지금, 혜윤은 아직까지 인사를 나누지 못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쏟았다. 바로 제 옆에서, 제 글을 읽고 있는 남자에게로.
“음, 나랑 대본이 다른 건가?”
“……응?”
“너무 재미있게 보는 것 같아서요. 옆에서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이젠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지호의 대본. 그가 제 글에 보이는 애정은 늘 넘쳤지만 유독 오늘은 더 그랬다. 귀여운 질투에 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소를 가르고 나오는 목소리가 꽤 낮았다.
꼭 그의 가슴을 가르고 나오는 소리처럼.
“내가 이 드라마 왜 출연하려고 했는지…… 말했었나?”
“응. 장혜윤 만나려고.”
“큭큭. 그렇지. ……장혜윤 만나고 싶어서.”
그녀의 당당한 말투에 지호가 웃었다. 다 털어내도 어디서 또 묻혀 왔는지, 꼭 작은 불안을 안고 있더니만. 이제 그런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온전히 씩씩하고 맑은 빛으로만 물든 얼굴이 참 예뻤다.
지호가 혜윤의 잔머리를 살살 어루만졌다.
물론 그가 혜윤에게서 떨어져 나간 불안을 쉽게 알아채듯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지호의 입 속에, 나중으로 미뤄둔 이야기들이 조심조심 문을 나설 준비를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큰 눈망울 속에 한 남자만 가득 담았다.
“그럼 장혜윤은 왜 만나고 싶었을까? 이 글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늘 감정의 순서조차 엉망으로 만들어 놓던 남자는, 작가로서 제일 처음 했어야 할 질문을 마지막에 하게끔 만들었다.
“종수가 나 같았거든요. 어릴 때 나랑 너무 똑같아서. 그런데…… 희한해.”
“뭐가?”
“내가 점점 희수를 이해하고 있는 게.”
“…….”
“갈수록 희수가…… 나 같아서.”
자신을 보던 그의 눈이 아득해졌다. 혜윤은 그가 들려준 말을 한 글자씩 쓰다듬었다. 그렇게, 여리고 무른 감성들이 쓸쓸히 내려앉으려는 순간.
“……그럼 지호 씨는 스스로를 구원했나 보다.”
그녀가 씩씩한 목소리를 냈다. 지호가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빠르게 현실을 찾았다. 아득함이 사라진 눈이 또렷하게 혜윤을 향한다. 조금은 놀란 건지 긴 눈매가 커져 있었다.
“희수가 종수를 새로운 세상으로 꺼내줬듯이요. 어린 지호를 더 좋은 세상으로 데리고 나와준 건…… 어른이 된 지호인가 보다.”
“…….”
“어린 지호의 시간들이 전부 다 최선이었다고 편들어주고 토닥여주는 것도…… 어른이 된 지호고.”
혜윤은 말에 막힘이 없었다. 이거야말로 확신이 가득했다. 연인으로서 만큼이나, 이 세계를 만든 작가로서. 안지호에 대한 확신만큼이나, 종수와 희수에 대한 확신. 모두 넘쳐흘렀으니까.
지호는 멍하니 그 말들을 되감았다. 마주한 갈색 눈동자 속에 잔잔한 물결, 그 물결마다 지금까지 촬영했던 <23센티미터>의 여러 장면이 스쳤다.
12살까지의 기억이 종수에 닿아 있었다면, 그 이후 자신의 삶은 희수와 같았다. 새로운 가족을 만나고, 함께하고. 더 넓은 곳으로 떠나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엔 가족을 두는.
생각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은 것만으로도 조금 벅찼지만, 혜윤은 한마디를 더 보탰다. 거기에 자기 마음도 얹어 달라는 듯이.
“내가 나를 구원해 주는 것만큼 완벽한 게 어디 있어요.”
“…….”
어른스럽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호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울컥 치미는 마음이 밖으로 새어 나갈 것 같아서.
그리고, 그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혜윤은 싱긋 웃었다. 어린 지호는 구원을 얻었으니, 어른이 된 지호는 자신이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나 진짜 멋진 남자랑 만나고 있구나. 더 친해져야지.”
지호의 눈가가 촉촉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