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이제야 말할 수 있는데
(7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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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이제야 말할 수 있는데
2023.01.29.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입 안에 맴도는 나지막한 혼잣말이 본능처럼 빛을 향해 나아간다. 바로 옆, 눈부신 여자에게.
“……어쩌면 그렇게 예쁜 말만 할까.”
“응? 멋진 걸 멋지다고 말하는 게 뭐가 예쁘지?”
혜윤의 작은 얼굴 가득 다정함이 감돌았다. 되묻는 순진함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미소를, 지호가 제 가슴속에 아로새겼다.
그리고 그를 마주하던 눈은 다시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오늘 제일 많이 한 행동. 하지만 이번엔 다른 이유였다. 자신의 추억 말고, 지호의 추억을 더해 주려고. 조금 전 지호의 아득함이 고스란히 혜윤의 목소리로 옮겨간 것 같았다.
“그럼 이게 종수랑 희수 마지막 촬영이니까…… 난 연기할 때 마음속에서 조금 빠져 있을게요. 이번만큼은 장혜윤은 끼면 안 되겠다. 어른 지호가 꼬맹이 지호랑 같이 걷는 거 구경해야겠어요.”
천천히 주변을 감싸던 시선의 끝은 결국 한 사람이었다. 봄 햇살처럼 화사한 미소 역시 한 남자에게 향한다.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몇 번은 마음속에서 물러나 줬을 텐데. 그래도 한 번의 기회가 남은 것에 감사했다.
“그건 아니지. 여기서 장혜윤이 빠지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응? 내가 그렇게 큰 존재였나?”
하지만 지호는 곧장 반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와 어울리는 깔끔한 고갯짓. 혜윤은 잠시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장난스레 턱을 치켜들기도 했지만 정말 잠시였다.
단호한 진심 앞에서 장난은 우습게 사라지고 마니까.
“세상이 사라지면 구원이 무슨 소용이라고.”
“…….”
빳빳하게 든 그녀의 고개가 쩡 굳어버린다.
조그만 자신을 세상이라고 말해 주는 남자. 꼬맹이 지호의 손을 잡고 제게로 오려는 것 같았다. 그가 조금 더 이 시간의 감동을 느끼길 바랐는데, 온전한 감동과 여운을 누리는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와…… 어쩌면 그렇게 예쁜 말만 할까?”
잔잔한 떨림이 담겨 있는 목소리에 물기가 느껴졌다.
지호가 옅게 미소 지었다. 똑같이 되돌려 받은 말이 제 입에서 나올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저대로 두면 진짜 울지도 모를 것 같은 눈을 보며, 그가 슬슬 장난을 섞었다. 물론 모두 진심이었지만.
“예쁜 사람한테는 예쁜 말만 하고 싶으니까?”
“……큰일 났다.”
“뭐가?”
당연히 혜윤의 말에도 거짓은 없었다.
“촬영이고 뭐고, 서울 갈 때 데려가고 싶어서.”
“와…… 이건 진짜 큰일이다.”
“큭큭. 작가가 너무 무책임해서?”
“아니. 가자고 하면 거절 안 할 거라서.”
두 사람은 짧게 키득거렸다. 무겁고 깊어지려는 마음은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
<씬 32. 저녁. 횡단보도 앞.
종수. 한 손에 장 본 비닐봉지를 든.
희수. 나란히 서 있는.
희수 : (빨간 신호등을 보는.) 너는 꿈이 뭐야?
종수 : 꿈? 그런 거 없는데.
희수 : (작게 웃으며.) 한번 생각은 해 봐. 대단한 게 아니어도 좋으니까.
종수 : (생각하는.) 멋진 어른이 되는 거?
희수 : (종수를 보는.) 삼촌 같은?
종수 : (희수를 보는. 웃으며.) 네. 우리 아빠 같은 어른. (망설이며. 정면 보는.) 누나 같은 어른.
횡단보도 신호 바뀌는.>
“컷! 오늘 촬영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장혜윤 작가님,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민우의 큰 목소리와 함께 이곳저곳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짧은 인사와 웃음, 박수 소리가 화음처럼 섞여 들자 혜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잠시 숙여진 시선이 제 몸을 훑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이렇게 익숙해지다니. 두 달 동안 함께 했던 희수에게도 속으로나마 인사를 전했다. 자신이 더 만들어주지 못한 너의 세계는, 분명 네가 원하는 대로 꾸며갈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땐 지호를 마주할 수 있었다. 겨울도 잊게 할 만큼 그의 시선이 따스했다.
“진짜 수고 많았어요. 괜히 아쉽네.”
“네. 이제 정말…… 여배우 놀이 끝.”
혜윤의 산뜻한 말투를 그가 흐뭇하게 바라봤다.
***
“드라마 스페셜에 이렇게 광고 많이 붙은 건 처음 본다.”
“실시간 댓글 쏟아지는 건 본 적 있고?”
9시부터 시작된 회식은 눈 깜짝할 사이에 10시로 넘어와 있었다. 서너 편의 광고 뒤에 시작되는 보통 때와는 너무나 다른 오프닝. 다닥다닥 달라붙은 광고들이 드라마에 앞서 속속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옆 채널에는 몇 달째 시청률 1위인 드라마가 있었다. 그랬기에 사실상 경쟁은 말이 안 됐다. 그저 금요일 10시에 이런 저예산 드라마로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것, 모두가 이것만 해도 축배를 들 만하다고 여겼다.
물론 화제성으로는 압도적인 1위였다. 이 시간 모든 SNS를 지호와 혜윤이 장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들여다보지 말자.’
‘뭐를?’
‘뭐든. 일단 방송만 보고 반응은 나중에 봐요.’
혜윤은 조금 전 지호의 말을 생각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나란히 앉아 떠드는 민우와 민주를 바라봤다. 친화력 대장은 어느 틈에 모든 여자 스태프들을 섭렵하고, 마지막 남은 하루도 허투루 날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어어, 시작한다!”
“와, 떨려 떨려.”
그리고 TV 화면 속 귀퉁이에 적혀 있던 <23센티미터>가 스르륵 사라진다. 모두가 젓가락과 술잔을 내려놓은 채 온 집중을 쏟았다.
요란했던 광고 화면이 잔잔하게 바뀌면서, 드디어 드라마가 시작됐다. 아침을 담은 몇 장면이 스친 뒤 나온 종수의 집. 그리고 그 사이로 혜윤이 적어놓은 글자들이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지호의 내레이션과 함께.
“20살이 될 때까지, 나는 게의 다리가 8개인 줄 알았다.”
혜윤은 목뒤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동화 속 세상은 감히 흉내 낼 수도 없을 만큼의 생동감이 제 온몸을 덮치는 느낌이었다. 단 한 문장의 내레이션으로 곧장 그 세계에 빨려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옆자리의 지호를 살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날카로운 눈매가 화면을 샅샅이 훑는 게 보였다. 그건 종수가 아니라 배우 안지호를 점검하는 눈이었다.
화면을 보다가, 옆자리의 지호를 보다가. 몇 번의 반복이 멈춘 건 제 옆의 지호를 볼 때였다. 날카로움이 거짓말처럼 걷히고 입가에 사르르 녹아내린 미소. 그리고 작은 혼잣말.
“……예쁘네.”
그 수려한 얼굴에 흠뻑 감탄한 뒤, 뭐지 싶어 화면을 들여다봤다. 동글동글한 제 얼굴이 화면에 하얗게 떠올라 있었다.
***
첫 방송은 작은 환호와 함께 끝이 났다. 여자 스태프들은 핸드폰으로 실시간 반응을 살피는 듯했지만 혜윤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한 사람씩 찾아다니며 술을 따라주고 또 받고. 그 와중에도 지호는 저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저었다.
꼭 ‘나중에.’라고 저를 달래는 것 같았다.
“작가님, 제 술 한잔 받으셔야죠. 이제 마지막인데.”
툭툭. 혜윤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조연출이 그녀의 빈 잔을 가리키고 있었다. 입가에 방긋 미소를 올리며 컵을 들 때였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지호의 목소리가 이쪽을 향했다.
“앞으로 작가님은 3잔만 받고, 나머지는 제가 대신 마실게요.”
처음이 어렵지, 한 잔이 다음 잔을 줄줄이 불러들일 걸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마지막’이란 감성까지 더해지면 답도 없지.
주변의 많은 시선들에 지호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작가님이 술이 약해요.”
“와, 혜윤이가 약한 게 아니라 지호 씨가 센 거예요! 나 알잖아, 저번 작품 때 같이 마셔봐서.”
그러자 민우의 입에서 거센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고개를 좌우로 휘젓는 움직임마저 평소보다 거칠어져 있었다. 곳곳에서 풍기는 취기가 민우만 비껴갈 리 없었다.
“아, 지호 씨 술 잘 마셔요?”
“장난 아니야. 다 기절하면 지호 씨가 회식 자리 싹 정리해 주고 가. 말술인 애들도 다 뻗었어.”
“지호 씨는 못 하는 게 뭐예요?”
“못 하는 걸 못 하나 봐.”
두 사람끼리 주고받은 대화라기엔 술기운이 들어찬 목소리가 제법 컸다. ‘어떻게 사람이 다 잘해?’라는 혼잣말까지도 너무나 커서, 지호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 모두 실실 웃었다.
“그럼 3잔 중에 첫 잔은 내 걸로.”
그리고 3번이라는 작은 기회를 뺏길까, 조연출은 서둘러 맥주병을 들었다. 혜윤도 명랑하게 잔을 내밀었다. 맥주라면 혜윤도 나름 즐기는 술이었다. 지호는 여전히 믿어주지 않았지만.
“나 이제야 말할 수 있는데. 사실 그동안 힘들었어요.”
“네? 저 때문에요?”
그런데 대뜸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들렸다. 조연출은 혜윤의 잔만 채워주려는 게 아니었나 보다. 뽀글뽀글 하얀 거품이 잔 위로 솟아오르는 속도만큼이나 혜윤의 의문도 키를 높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호 역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네. 그날 기억해요? 우리 비 오는 날 회식할 때. 그때 배우들 엄청 왔었잖아.”
“그럼요. 기억하죠.”
“응. 작가님은 차도혁 씨랑 따로 자리 잡고 술 마시던 날.”
“네?!”
혜윤이 막 입술에 닿으려는 맥주잔을 똑 떼어냈다. 동그랗게 커진 눈 속에 황당한 마음이 퐁퐁 터져 나왔다. 또한 황당함이 억울함으로 바뀌는 건 매우 빨랐다.
그 순간 지호와 눈이 마주쳤기에.
지호는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아.’라며 동그랗게 입을 벌린 채 느릿느릿 끄덕. 끄덕. 그렇게만 해도 충분했지만 그는 너무나 쉬운 한 문장을 눈빛에 실어 보냈다. 은은한 장난기와 함께.
‘안 마셨다더니?’
혜윤의 고개가 빠르게 도리도리 움직였다. 얼굴 곳곳에 매달려 있던 억울함이 톡톡 그녀의 주위로 떨어져 나갔다. 곧 그 감정들이 떼굴떼굴 굴러 조연출에게로 향한다.
“아니에요! 저 그날 술 안 마셨어요.”
“에이, 뭐가 아니야. 둘만 사람들 없는 테이블 쪽으로 멀찌감치 갔잖아요. 내가 다 봤어. 딱 달라붙어서 술 마시고, 꼼지락꼼지락 손가락으로 장난치고 아주…… 그 테이블만 분위기가 몽글몽글하던데요?”
“우와…… 말도 안 된다!”
작은 주먹이 제 허벅지를 쾅 내리쳤다. 그녀 딴에는 매우 격정적인 의사 표현이었지만 술기운이 짙어진 공간에서는 그리 큰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당장 옆에 앉은 조연출만 해도 그 거센 항의를 가볍게 무시하는 눈치였다.
“뭐, 그냥 둘이 진짜 친한가 보다 했어. 아무튼.”
“아무튼? 조감독님, 아무튼으로 끝내면 정말 안 되는데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왜 계속 봤냐면요.”
혜윤은 아랫입술이 댕댕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게 왜 안 중요해요. 저렇게 보고 있는데…….’
차마 할 수 없는 말만 입 안에 가득 넣어둔 채, 제게 쏟아지는 뜨거운 눈빛을 마주했다.
꿈틀거리는 한쪽 눈썹 밑으로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붙는 얼굴. 낮게 가라앉는 지호의 눈빛 속에 장난기가 빠르게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