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잘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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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잘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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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잘 부탁해요
2023.02.01.
‘나 정말 억울해요.’라고 진득한 눈길을 보내고 싶었지만, 빠르게 이어지는 대화는 그럴 틈조차 주지 않았다.
“그날 온 배우 중에 한 명이 계속 들들 볶는 거야, 나를.”
“……왜요?”
결국 그녀는 해명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혜윤이 단숨에 비워진 조연출의 맥주잔을 다시 채우려 들었다. 잔을 받아 드는 그의 두 손만큼이나 이어지는 대답 역시 날쌨다.
“자꾸 작가님 좀 소개시켜 달라고. 몇 살이냐, 번호 좀 알려달라…… 아니, 작품 이야기할 거라면서 나이는 왜 물어? 그래서 나도 연락처 모른다고 했는데 믿어주지도 않고. 그날 갈 때까지 그러더니만 며칠 동안 전화 왔었다니까요?”
“와…… 몰랐어요. 말씀하시지.”
혜윤은 몰랐던 이야기들에 곧장 빠져들었다. 술의 힘을 빌려 커진 목소리가 작은 감정조차 크게 부풀려 전달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혜윤 역시 난처하고 미안한 마음이 부풀고 있었다.
“에이, 남자친구 떡하니 있는데 무슨. 그리고 감독님이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작가님 그런 거 진짜 싫어하신다고.”
“싫어하긴요. 괜히 혼자 고생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작가님이 죄송할 건 없지.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해 주는 거예요. 이제 마지막이니까…… 아쉬워서?”
쩌렁쩌렁 크던 목소리가 어색한 진심 앞에 폭삭 가라앉는다. ‘아쉬워서.’라는 4글자가 너무 작아서,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웃으며 맥주잔을 부딪쳤다.
한 모금을 넘기는 중에 눈이 또르르 굴러가 닿은 곳. 지호와 다시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가에 흐르던 미소가 걷힌다. 떨어진 거리에서 그의 얼굴이 멋지게 빛나고 있었다.
은은한 눈웃음 아래 보기 좋게 휘어진 입매가 소리 없이 말을 걸었다.
‘싫어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녀도 속닥이듯 얼른 입술을 움직였다.
‘죄송해서 한 말.’
혜윤이 말로 다 못 보일 감정들을 온 얼굴에 실어 보내려던 참이었다. 순간 반대편에 앉은 여자 스태프들이 몇 분 전에 끝난 조연출의 말꼬리를 뒤늦게 부여잡았다.
“맞아! 나한테도 혜윤 씨 소개시켜 달라는 사람 두 명이나 있었어. 혜윤 씨 실물이 사진이랑 많이 달라서 지호 씨 여자친구인 거 몰랐다더라고. 알려주니까 바로 꼬리 내렸지만.”
“혜윤 씨 은근히 인기 많아요.”
“세상에 귀여운 여자 싫어하는 남자는 없으니까?”
깔깔거리는 소리에 그녀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퍼뜩 다시 바라본 근사한 얼굴에는 미소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겨우 스며 있는 희미한 웃음기와 함께 지호가 고개를 설설 저었다.
지호는 조금 짜증스러웠다. 혜윤이 눈만 마주치면 세상 보송한 얼굴을 보여서. 그렁그렁한 눈이 ‘나 억울해요.’를 외치는데, 제 눈에만 귀여울 리 없었다. 마침 사방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완벽하게 일깨워주고 있었으니 괜한 걱정도 아니었고.
“지호 씨, 덕분에 그동안 너무 편하게 일했어요.”
“그건 제가 해야 될 말이죠. 정말 감사했습니다.”
“지호 씨는 아직 일주일 더 남았죠? 그것까지 잘 마무리해봐요, 우리.”
지호가 또 한 명의 새로운 스태프에게 술병을 기울였다. 공손히 예의를 갖추며 함께한 두 달의 시간을 기념하는 일. 지금은 이것에 더 집중해야 했다. 그가 혜윤에게 보내던 시선을 완벽히 거둬들인다.
마음 졸이고 전전긍긍 눈치 보는 쪽은, 항상 별것 아닌 행동도 크게 해석해서 문제였지만.
그의 시선이 머물다 떠난 자리. 혜윤의 얼굴 여기저기에 불안과 조바심이 자라나고 있었다.
“세 잔 다 받으신 것 같은데, 보너스로 제 술도 한 잔 받으세요. 일어나기 전에 작가님은 꼭 드리고 싶네.”
“아, 매니저님.”
턱으로 도톨도톨 서운한 마음이 돋아날 무렵, 어느 틈에 봉기가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서글서글 웃는 얼굴에 다양한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는 눈. 혜윤은 그를 향해 엷게 웃어 보였다.
두툼한 손에 들린 맥주병이 유독 작게 느껴졌다. 쏴아. 쏟아지는 맥주 소리 사이로 봉기가 처음 건네는 마음이 들렸다.
“고생하셨어요. 어쩌다 보니까 참…… 카메라 안팎으로 고생 많이 하셨지, 정말?”
두 사람은 비슷하게 웃었다. 마주한 시선 사이로 지호까지 단 세 사람만 아는 이야기들이 소리 없이 오갔다. 혜윤도 냉큼 봉기의 잔을 채웠다.
“차기작 생각은 없으신 거예요? 대충 계획이라도?”
“네. 지금은요.”
1초의 고민도 없는 대답에 봉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그녀를 향한 모든 컨택을 자신이 관리하고 있었기에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다.
“……그럼 지호랑 둘 다 놀 생각인가 보네.”
이 말이 하고 싶어서. 그가 맥주를 가볍게 넘겼다.
“아, 지호 씨는 드라마 끝나면 여행 갈 것 같다고…… 예전에 들었던 것 같아요.”
“누가 그래요? 지호가?”
“네.”
하얀 흔적만 남아 있는 텅 빈 맥주잔. 봉기는 가만히 그 잔을 바라보다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여행은…… 돌아와야 여행인 거지.”
말끝에 어렴풋이 한숨 소리가 들렸다. 혜윤은 그의 말을 곱씹으며 다시 맥주병을 들었다.
무슨 말이지. 그럼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 건가.
그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오래된 세트장에서의 기억을 끄집어냈을 뿐인데, 이런 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복잡한 마음이 유독 거품을 많이도 만들어 냈다.
“으아, 제대로 못 따른 것 같다.”
“큭큭. 괜찮아요.”
짠. 두 잔이 마주치는 소리를 내며 또 한 번 각자 목을 축인다. 그리고 봉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따끔따끔한 목을 타고 온 목소리가 많이 습했다.
“지호 위치에서 9년 동안 이 정도 필모 가진 배우 없어요. 진짜 미친 듯이 일만 한 거지…… 맞아, 개처럼 일만 했어.”
혜윤은 그 눅눅한 목소리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 마음도 기우는 건 당연했다.
“저러다 애 잡겠다 싶어서 말리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어요. 본인이 원하는데 어떡해. 그래서 처음엔 돈 버는 게 행복한가 보다 했거든요? 그런데…….”
혜윤은 마음이 기우는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늘 무섭기만 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저렇게 눈이 젖어드는데 어떻게 무서울 수 있을까. 달래주고 싶지.
그녀의 애틋한 시선이 봉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상냥한 기다림에 보답하려는 듯이 말이 이어진다.
“응. 그런데 돈더미에 파묻혀서도 새끼가 일을 안 쉬네?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계속하길래…… 아, 돈이 아니라 연기하는 게 행복한 거였구나 했지.”
“…….”
“아이고…… 그러다 작년쯤 알았네.”
말을 하면서도 그의 목이 훅훅 잠겨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슬픔이 그녀에게 번지는 건 찰나였다.
“그냥 집중할 게 필요했던 거구나. 연기하면서 다른 세상에 들어가 있고 싶었나 봐요.”
비슷하게 물기가 밴 눈동자들이 서로를 마주한다.
“자기 세상은…… 별 재미가 없었나 봐.”
그 한 문장과 함께 먼저 시선을 떨군 건 봉기였다. ‘형이란 게 그걸 9년이나 몰랐으니.’ 같은 자책이 혜윤의 귓가마저 어지럽혔다.
혜윤은 조용히 밭은 한숨을 쉬었다. 지호의 깨끗한 미소를 담아뒀던 가슴 속 어딘가가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코끝이 찡하게 아려서 그저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이유도 모른 채 펑펑 울 것 같아서.
펑-
밀려드는 슬픔을 잠시 외면할 수 있었던 건, 경쾌한 맥주 소리 때문이었다. 봉기가 반 넘게 비워진 혜윤의 맥주잔을 채우고 있었다. 새로운 감정과 함께.
다시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산뜻했다.
“그런데 작가님이랑 있는 걸 보니까 알겠어. 아, 이건 모를 수가 없어.”
젖은 눈을 채 말리지도 못했으면서 봉기의 입이 방긋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 좋아서 혜윤도 시큰한 마음을 무르고 그를 흉내 냈다.
“뭘요?”
“저 자식 지금 진짜 행복하구나. 이젠 다른 세상 말고 자기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하는구나…… 같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놈이었네, 싶었다니까요?”
그리고 봉기가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한참 즐겁게 떠들던 마음을 가다듬는 게 혜윤의 눈에도 또렷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고개가 실긋 그녀를 향해 기울었다.
끝끝내 하고 싶었던 말과 함께.
“정말 괜찮은 놈이에요. 내가 작가님이 조금이라도 별로인 것 같았으면 이런 말 안 해 주는데. 작가님도 좋은 분이신 것 같아서.”
앞의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 이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는 눈빛과 함께.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우리 지호.”
“……네.”
“다 그만두려는 건…… 작가님이 설득 좀 해 주세요. 너무 아깝잖아.”
혜윤은 애매한 곳에 시선을 둔 채 겨우겨우 목소리를 냈다. 봉기가 제 코끝을 손등으로 쓸며 그 얼굴을 살폈다. 제 쪽은 낯부끄러운 진심을 겨우 쏟아내서 마음이 뿌듯한데, 그녀는 영 아닌 것 같아서.
대답이 작다 싶었는데 일순간 작은 턱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꿀꺽꿀꺽. 샘솟는 슬픔을 삼키려는 노력이 너무나 잘 보였다. 입꼬리가 축축 처지고, 아랫입술이 오리처럼 튀어나오고.
설핏 보인 작은 두 손은 마디마다 하얗게 돋아날 정도로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작가님, 혹시 울어요?”
봉기가 깜짝 놀라 고개를 훅 숙였다. 여배우들의 우는 모습만 봐서 그런 건지 슬픔을 이겨내려는 그녀의 방식이 당혹스러웠다. 유리구슬 같은 눈물만 또르르, 이런 것만 봐오다가 이렇게 전투적으로 눈물을 참는 여자라니.
“아니요. 울진 않는데요…….”
“진짜죠?”
“……아니요. 금방 울지도 몰라요.”
아이처럼 힘차게 쓱쓱. 소매로 눈가를 닦는 여자의 모습도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눈물도 당혹스러운데.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아니, 왜 그렇게 서럽게 울려고 해. 울지 마요.”
혜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또 소매로 눈을 비볐다. 슬픔을 억누르느라 뜨거우리만큼 제게 꽂힌 지호의 시선을 알 수 없었다. 대신 봉기가 눈치챘지만.
지호가 커진 눈으로 봉기를 쳐다봤다.
“아니야! 내가 안 울렸어! 아니, 내가 울린 것 같긴 한데. 진짜 내가 안 울렸어.”
당황으로 횡설수설하는 목청이 적잖이 컸다. 봉기는 사람들의 관심이 더 늘기 전에 혜윤을 달래고 싶었다.
어찌나 세게 비볐는지 눈가가 붉게 부풀어서는, 본인도 참아보려 애쓰는 게 보였다. 맥주를 들이켜는 얼굴 위에 젖어 든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고는 또 내려놓자마자 눈가로 팔을 가져가고 있으니.
“작가님, 눈 그만 비벼요. 새빨갛네.”
끄덕끄덕. 그 와중에 말은 어찌나 잘 듣는지. 혜윤은 눈앞까지 가져간 팔을 도로 제자리에 내려놓고 있었다. 저렇게 아이처럼 우니까, 아이처럼 달래면 되려나.
봉기가 대뜸 제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뱉었다.
“작가님, 뚝!”
“……뚝.”
조금씩 제자리에서 안정을 찾는 이목구비들. 그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제 입에서 ‘뚝.’이란 말을 하는 날이 올 줄도, 그 한 글자가 만병통치약처럼 우는 여자를 달랠 수 있으리란 것도 상상하지 못했기에.
그리고 맞은편에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두 사람.
“뚝 하란다고 또 뚝을 해요.”
민주가 이제 막 민우가 따라 준 맥주를 들이켰다. 민우의 눈가에 술기운을 이겨낸 호기심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