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거짓말
(72/110)
72.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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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거짓말
2023.02.05.
“정말 미안한데…… 나 혜윤이 우는 모습도 궁금하긴 하다.”
민우가 히죽거리며 짓궂은 호기심을 뱉었다.
“꼭 한번 보고 싶어. 울 때도 저래요? 어린애처럼?”
“의외로 잘 울지 않아요. 지금처럼 잘 참거든요. 그런데 저러다 울면…….”
민주가 깨끗이 비운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동시에 얼른 말해 달라고 재촉하던 눈빛이 결국 목소리까지 낸다. 민우의 말투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으앙! 하면서 우나?”
“네. 뿌애애앵! 하면서.”
“큭큭. 아, 누가 혜윤이 조금만 울려줬으면 좋겠다! 너무 궁금해.”
술이 들어간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유독 컸다.
***
두리번두리번. 혜윤은 벌써 몇 번째 숙소 복도를 살폈다. 이 층이 남자들만 머무는 3층이라는 것, 지금 시간이 새벽 2시 반이라는 것. 모두 눈치를 보게 할 만했다.
몇 분 동안 방을 나서거나 들어서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후다닥 303호 문 앞으로 뛰었다.
[지호 씨, 자러 갔어요? (오전 2:06)]
그리고 다시 한번 답이 없는 메시지를 읽었다. 회식 내내 이곳저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지호를 힐끔거렸건만, 10분 새에 놓치고 만 것이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어? 지호 씨 조금 전에 갔어. 매니저님이랑 심각하게 얘기하다가 나가는 것 같던데.’
‘언제요?’
‘10분 정도 됐나?’
20분 전, 민우와의 대화. 여전히 시끌시끌한 분위기 속에서 기운이 쪽 빠져버렸다. 놀 사람은 놀고, 쉴 사람은 또 알아서 쉬는 분위기. 결국 그녀도 조용히 숙소로 돌아왔다.
혜윤은 지호의 방 앞에서 잠시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멀찍한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던 몇 번, 그때마다 지호는 희미하게 웃다가 스태프들 쪽으로 관심을 돌려버렸다.
“응. 작가님은 차도혁 씨랑 따로 자리 잡고 술 마시던 날.”
“네?!”
그 얼굴도, 그가 듣게 된 이야기들도, 모두 마음에 걸렸다. 더불어 답이 없는 메시지와 받지 않는 전화까지 더해지면, 이렇게 새벽 2시 반에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똑똑-
텅 빈 복도에 작은 두드림이 유독 크게 울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별 기척이 없었다.
똑똑-
진짜 자는 건가. 그럼 깨우면 안 되니까, 싶은 순간.
달칵-
열린 문틈으로 지호의 얼굴이 빼꼼 드러났다. 물기로 더 짙어진 머리카락 끝에 작은 물방울이 톡. 톡. 말간 피부 빛이 이제 막 씻고 나온 듯했다. 지호가 혜윤을 내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회식 내내 마음에 걸렸던 그 미소였다.
“내가 전화 두 번이나 했었는데…….”
“아…….”
혜윤의 입에서 서운함이 졸졸 새어 나온다.
지호는 그 말에 슬쩍 뒤돌았다. 화장대 위에 올려진 핸드폰. 아마 샤워하는 동안에 한 것 같았다. 그래서 대답을 해 주려던 참이었다. 안 그래도 봉기와의 대화 때문에 급히 회식 자리를 나설 때, 얼굴을 못 본 게 마음에 걸렸기에.
하지만 상대가 더 빠른 게 문제였다.
“혹시 화났어요?”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억울하고, 서운하고. 여리여리한 감정들이 넘실거리는 눈은 너무 예쁘다는 것. 지호가 입 안의 살을 꾹 깨물었다.
‘이건 너무 못된 짓 같은데.’
이런 생각도 정말 생각으로만 끝나고 마는 것 또한 큰 문제였고.
곧장 얼굴 위에 떠오르려던 웃음을 다스리고는 끄덕끄덕. 느리게 고개를 움직였다. 혜윤이 그 긍정에 바싹 조바심을 냈다.
“나…… 잠깐 들어가서 얘기해도 돼요?”
지호는 표정이 지워진 얼굴로 혜윤을 빤히 내려봤다. 누가 올까 봐 눈치, 제 눈치. 주변의 모든 공기가 그녀를 짓누르는 게 분명했다. 큰 눈이 깜빡임도 없이 저를 올려봤다. 참 간절하게.
아, 너무 예쁘네.
그래서 불안을 뺏어오기는커녕 더 돋아나게 만들고야 만다.
“그냥 여기서 해요.”
“아…….”
살짝 벌어진 입매가 어색한 모양새를 띤다. 저런 얼굴도 가끔은 보고 싶은 걸 보면, 점점 못된 놈이 돼가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녀의 작은 입에서 훨씬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진짜 진짜 오해예요. 나 그날 술 안 마셨어요. 둘이 딱 붙어서 놀지도 않았고.”
“…….”
“차도혁 씨랑 따로 앉아서 얘기한 건 맞는데…… 정말 그게 다예요”
“……그렇구나.”
“응…… 거짓말한 적 없어요.”
지호는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주억댔다. 더 긴 대답을 하자니 웃음이 터질 것 같아 무리였다. 그래도 저런 눈빛이라면 한 번쯤 무리를 할 만했다. 그가 혀끝으로 한쪽 볼을 꾹 찌른다. 어렵게 만든 무감한 얼굴이 문밖을 향했다.
저렇게 애절하게 보는데, 딱 한 번만 더 놀리고 끝내야지 싶어서.
“알았어요. 더 할 말 있어요?”
“…….”
표정과 어울리는 대답이 툭 던져지자 혜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래서 지호도 딱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이런 얼굴도 예쁘지만, 불안이 걷힌 얼굴도 맑고 귀여우니까.
그가 천천히 미소를 지으려던 순간이었다.
탁- 탁-
갑자기 거칠고 정신없는 소리가 몰아쳤다. 동시에 두 사람은 계단 쪽을 쳐다봤다. 여러 명의 발소리가 아주 가까워지고 있었다. 술 냄새가 날 것 같은 남자들의 시끌시끌함까지.
지호가 빠른 상황 파악을 끝내고 혜윤을 내려 봤다. 그녀의 표정 역시 다르지 않았다. 요리조리 다음 장면을 그리는 눈. 그리고 똑같이 상황을 파악했지만, 다른 선택을 한 모양이었다.
“그럼 나 갈…… 엇!”
짧은 인사와 급한 움직임. 하지만 그보다 빠른 건 지호의 손이었다. 한 손이 문틈을 벌리는 것과 동시에 반대편 손으로 혜윤의 팔을 잡아당겼다.
훅- 달칵-
1초 뒤. 4명의 남자가 도착했을 때,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나 지금…… 뭐 움직이는 거 봤는데?”
“뭐가 움직여? 아무것도 없구만.”
“방금 뭐가 홱…… 저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어? 여자 같았는데.”
여전히 문 안쪽에 서 있는 지호는 밖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얼른 가서 자라. 헛소리 그만하고.”
“아, 그러지 말고 방에서 딱 한 잔만 더 하자! 소주 한 병! 깔끔하게.”
저벅- 저벅- 달칵-
요란한 발걸음들이 방문 소리 하나에 모두 사라진다. 한방에 다 같이 들어갔구나 싶었다. 그제야 그가 몸을 돌렸다. 원래의 다정함과 함께.
“들어올 생각을 해야지, 계단 쪽으로 갈 생각을 하면…… 응?”
그리고 그 다정함은 곧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돌아본 혜윤이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기에. 푹 숙여진 고개 밑으로 작은 두 손바닥이 눈을 꾹 누르고 있었다. 그의 눈이 단숨에 커졌다. 크게 놀란 목소리가 스스로도 낯설 정도였다.
“왜 그래요?”
“…….”
“울어?”
“……아니요.”
겨우 들리는 속삭임. 지호는 곧장 혜윤을 감싸 안았다. 정말 울리려고 했던 게 아닌데. 제 품에 안긴 작은 몸짓이 여전히 두 눈을 꾹꾹 누르는 게 느껴졌다.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기분.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최악인 것 같았다. 다급한 목소리에 그와 어울리지 않는 불안함이 그득했다.
“울지 마요. 장난친 거야. 화 안 났어요.”
“……진짜?”
“응. 진짜.”
그가 혜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은 머리 위로 서늘한 한숨이 툭 떨궈진다. 혜윤은 너른 품속에서 그의 애끓는 마음을 고스란히 주워 담았다. 그래서 광대가 슬금슬금 올라붙었다.
사실 혜윤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이유는 단순했다. 지호가 제 손을 힘껏 끌어당길 때, 그의 옷이 눈가에 스친 탓이었다.
먼지가 들어간 모양인데 좀처럼 눈이 떠지지 않았다. 따가워서 빨리 빼내고 싶은데, 못 봤던 그의 모습은 조금 더 보고 싶고.
아니, 사실은 조금 많이. 당황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더 그랬다. 역시 장난기라면 그녀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
어떤 대답도 들리지 않자 지호는 점점 애가 탔다. 우는 여자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몰라서 더 그랬다. 그저 끌어안은 손에 힘만 실릴 뿐.
“내가 잘못했어요. 눈치 보는 거 너무 예뻐서 그랬어. ……그러니까 울지 마요.”
“…….”
“응? 다시는 안 그럴게.”
“……알았어요. ……더 할 말 있어요?”
눈은 따끔따끔, 마음은 간질간질. 혜윤은 마지막 장난으로 몇 분 전에 받았던 그의 말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저 말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던 걸 생각하면, 분명 지호도 같은 기분을 느끼겠지 싶었다.
그 예상에 맞아떨어지는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낮고, 묵직하고, 자책이 섞인.
“……없어요. 울지만 마.”
“응. 그럼…….”
그래서 그만하기로 했다. 스스로를 미워하게 두기는 싫으니까. 정말 장난이니까.
혜윤이 그의 품에서 한걸음 물러선다. 그게 또 마음을 보이는 행동인 것 같아, 지호는 또 한 번 놀랐다. 양쪽 어깨 끝을 꾹 쥐고 시선을 내리자 그녀가 슬슬 얼굴에 붙인 손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빨개진 눈이 그를 올려봤다. 뒤뚱뒤뚱 걸어 나오는 귀여운 말투와 함께.
“그럼 나 눈 좀 봐줘요. 뭐 들어갔어요.”
치켜든 턱 위로 배시시. 제대로 뜨기 힘든 눈이 금세 찔끔찔끔 덮인다. 윙크하듯이 한쪽을 꼭 감고는 재촉하는 입 모양이 통통거렸다.
“하아…….”
큰 손이 가녀린 어깨 위에서 스르륵 떨어졌다.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입가에 엷게 미소가 보였다. 황당함보다 안심하는 마음이 더 커 보였기에 혜윤도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흐흐, 이번에도 거짓말한 적 없어요. 그냥 가만히 있었던 거지.”
“와…… 제대로 당했네.”
하지만 곧장 눈을 찡긋거리며 혜윤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지호 역시 얼른 그녀의 얼굴부터 감쌌다. 장난치고 싶어서 따가운 것도 참았을 텐데. 양손이 귀여운 두 볼을 조심조심 올렸다.
“나 봐봐. 눈 빨갛다.”
“응.”
그가 서둘러 입바람을 불자 바들바들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툭 떨어진다. 얼른 엄지손가락으로 볼에 흐른 물줄기를 닦아주었다.
후후. 한 번 더 바람을 불어 모든 먼지를 날리고, 다시 반복하는 척 가볍게 입술로 눈가를 꾹 눌렀다. 어떤 이유로든 울지 말라고.
쪽-
곧 혜윤의 발끝까지 진한 행복이 번졌다. 그 부끄러움이 배인 얼굴을 눈에 꾹 눌러 담은 뒤에 지호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동그란 도어 뷰에 눈을 바짝 가져가자 텅 빈 복도가 보였다. 인기척도 전혀 없었고. 눈과 귀가 감시에 열중인 사이, 입은 한 사람을 향했다.
“이제 나가도 되겠다. 밖에 아무도 없…….”
그 순간 등 뒤에 딱 달라붙은 온기. 고개를 내리자 제 몸을 꼭 끌어안은 두 손이 사부작거리고 있었다.
가슴 언저리에서 살랑살랑. 옷 위를 스치는 두 손바닥이 ‘나 지금 행복하고 부끄러워요.’라고 연주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행복이 그의 목소리를 적시는 건 당연했다.
“뭐지? 이번엔 옷에 뭐 들어갔어요?”
“아니요. 마음에.”
혜윤 역시 가라앉지 않는 행복이 글자마다 음을 만들었다. 파닥파닥. 들뜬 손끝도 끊임없이 그를 간지럽혔다.
그래서.
“……지금 복도에 사람 엄청 많아요. 아침 돼야 나갈 수 있겠는데.”
그녀는 속이 훤히 보이는 거짓말을 들어야 했고,
“큭큭. 거짓말.”
“그래도 속아 줄 거잖아.”
그는 등에 딱 붙은 뺨의 끄덕임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