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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크리스마스 동화 (73/110)


73. 크리스마스 동화
2023.02.08.



“잠만 자고 가요. 바깥소리 다 들리고, 누구 올 것 같고. 이런 데서 불안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혜윤은 콧등에 땀이 밸 것만 같은 따뜻한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지호가 빌려준 큰 티셔츠로 갈아입고. 그가 내어 준 품으로 퐁당 빠져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분 좋은 바디워시 향기 사이에 옅은 술 냄새. 그때야 회식 내내 지호가 주고받던 술잔들이 떠올랐다. 스태프마다 한두 잔씩만 받았다고 해도 소주 5병은 넘을 것 같은데.


“지호 씨, 술 많이 마셨죠? 괜찮아요?”

“응. 조금 졸리긴 하다.”

 
지호는 그녀가 보이는 걱정이 귀여워, 껴안은 손끝에 조금 더 힘을 줬다. 한번 배운 건, 그게 좋은 거라면 절대 까먹지 않는 건지. 졸린다는 말에 곧장 손을 쏙 빼내어 제 등을 토닥이는 손길.

술에 거뜬하던 몸과 정신이 품 안의 여자에겐 곧장 취하고야 만다. 묵직한 눈이 스르륵 감겼다. 정말 좋은 꿈을 꿀 것 같아 잠이 오는 게 반가웠다.

***

다음 날 아침. 이제 겨우 8시를 넘긴 시간과 달리 지호의 얼굴에 쨍한 웃음기가 돌았다. 어제 다 끝난 줄 알았던 여배우 놀이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남아 있는 것 같았기에.

방을 나설 채비를 모두 끝낸 혜윤이 문 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작은 몸짓과 어울리는 목소리. 이제 막 씻어서 뽀얗게 빛나는 얼굴까지 참 앙증맞았다.


“방에 올라가서 연락할게요.”

“응. 근데 왜 속삭여?”

“아, 나도 모르게.”

 
지호가 똑같이 속닥거리자 혜윤이 키득거렸다. 잠이 덜 깬 보송보송한 얼굴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는 것도 잠시, 혜윤이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목소리를 키운다.

덜컥-


“어! 그럼 나는! 조금 전에 와서!”

“큭큭. 못 살겠다.”

“딱 5분 정도 얼굴 봤으니까! 가 볼게요!”

 
혜윤의 큰 목청에 지호의 웃음이 섞여 들었다. 이방 저방을 향해 쩌렁쩌렁. 나 조금 전에 온 거라며 다 들리냐고 확인시켜주는 듯한 움직임까지. 원래 귀엽게 생기면 생각도, 하는 행동도 온통 귀엽기만 한 걸까.


 
어느 틈에 복도 끝까지 달아난 혜윤이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지호는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문을 닫았다.


“연기 진짜 못하네.”

 
낮은 평가인 것 치고는 목소리가 마냥 즐거웠다. 그리고 닫힌 방문을 등지는 순간, 웃음도 등진 사람처럼 한순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핸드폰을 손에 쥔 순간부터. 일단 도착한 지 한 시간도 더 된 봉기의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크게 거슬리는 기사는 다 내렸고, 자잘한 건 계속 쳐내야 할 것 같은데. (오전 7:06)]

[고마워, 형. 월요일까지 신경 써 줘. 주말 지나면 또 다를지 모르니까. (오전 8:13)]

 
무겁게 끄덕여지는 고개와는 달리 손가락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만큼이나 빠른 답장이 화면 밑으로 금세 달려든다. 봉기는 밤새 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시끄러워질 수도 있겠다. 작품 설정으로 물고 늘어지려는 것 같아서. (오전 8:14)]

 
지호의 입술이 반듯한 치아에 짓이겨졌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 중 하나였다. 아무리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일지라도 종수와 희수는 사촌 관계인 상황. 둘 사이에 이성적인 감정이나 사건이 없었기에 문제 될 건 없지만, 흠을 내고 싶어 안달인 쪽에게는 단연 반가운 이야깃거리일 것이다.

더군다나 종수가 희수와 키스하는 꿈속의 장면이 있으니.

작품을 다 본다면 단순히 사춘기 소년이 꾸는 수만 가지 꿈 중에 하나로 지나갈 일이지만, 흠집 내려는 쪽은 애초에 작품에 관심이 없다.


[응. 일 커진다 싶으면 준비한 입장 내보내 줘. 계속 연락하고. (오전 8:15)]

 
그의 엄지손가락이 전송을 꾹 누른다. 다양한 논란에 대비해 그보다 더 다양한 공식 입장들을 모두 준비해뒀기에, 언론 쪽으로는 큰 걱정이 없었다.

한없이 고운 마음이 상처를 입을까 봐, 그건 어떻게 막아줄 수가 없어서. 그게 걱정일 뿐이지.


“하아…….”

 
지호가 긴 한숨을 쉬었다. 씁쓸한 상상이 가슴 한구석에 퍼렇게 번져가는 탓에 입가가 딱딱히 굳어갈 무렵.

쿵- 쿵-

우당탕. 복도에 크게 울리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점점 발소리가 선연해지는 게, 아마 목적지가 이곳은 아닐까 싶은 순간. 역시나.

똑똑-

사실 ‘똑똑’이 아니라 ‘쾅쾅’에 가까웠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골이 잔뜩 난 아이가 느껴졌다.

달칵-

천천히 문을 열자 시무룩한 얼굴이 물끄러미 저를 올려보고 있었다. 쓰라린 거 말고, 저렇게 귀엽게만 시무룩했으면 싶은 얼굴이. 제일 지켜주고 싶은 여자가.

지호가 돌아간 지 10분도 안 돼 씩씩거리고 나타난 혜윤을 눈으로 품었다. 마음에 이끼가 낄 새도 없이 햇살을 데려오는 여자.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응? 뭐지?”

“5층까지 복도에 아무도 없어요. 민주도 아무리 흔들어도 안 일어나고. 다들 방에서 기절했나 봐요.”

“아침부터 불꽃 연기했는데 아무도 안 봐줬네.”

“그러게요…….”

 
본인이 햇빛인 줄도 모른 채 저렇게 먹구름 같은 얼굴을 하는 것도 이젠 다 제 취향이었다. 자기 몫은 안 챙기고 다 내어줬구나 싶어, 그가 건네받은 햇살 한 줄기를 돌려보내기로 한다. 눈빛만큼이나 목소리가 달았다.


“그럼 아쉬우니까 우리끼리 아침 먹고 올까?”

“와, 좋다!”

 
혜윤의 얼굴에 쨍하고 빛이 번졌다.

대충 지호의 방에 있는 외투를 하나씩 걸치고,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온통 고요해서 시동을 거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보통 해장은 뭐로 해요? 한식?”

“음, 나는 다 좋아요. 사실 숙취 같은 게 없거든요.”

“큭큭. 응?”

 
액셀을 밟으려던 발이 멈칫. 지호가 잠시 명랑한 목소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잘 마시고, 주사도 없고. 취할 것 같으면 딱 멈출 줄 아는데, 숙취까지 없다는 거지. 쉽게 웃음이 참아지지 않았다.

그러니 혜윤 역시 그를 의문스럽게 바라봤다. 입가에 퍼진 웃음을 가려보려는 손짓이 멋스러웠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당당한 눈빛이 순진한 호기심을 던진다.


“응? 왜 웃지?”

“혹시 부모님께서 밖에 나가면 강한 척하라고 가르치셨어요? 너무 귀여워서 잡아갈까 봐?”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 안에 즐거움과 억울함이 뒤섞였다.

***



“호기심 대장이 하룻밤을 참았으니.”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복국집. 음식 주문을 끝내자 마주 앉아 있던 지호가 혜윤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와 동시에 제 핸드폰을 혜윤에게 건넨다. 화면에는 <23센티미터>의 기사들이 줄줄이 자리했다.


“와아, 나 사실 엄청 궁금했어요.”

 
혜윤은 핸드폰을 받았음에도 지호의 팔에 제 팔을 찰싹 붙였다. 함께 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팔을 넘어 가슴 안으로 들어올 기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마지막 기사가 5분 전인 걸 보면 지금까지도 계속 쏟아지고 있는 듯했다. 스치는 제목마다 ‘호평’ ‘기대 이상’ 같은 기분 좋은 표현들만 가득했다.


“다행이다. 나쁜 말은 없어 보여서.”

“응. 그런데…… 계속 이렇진 않을 거예요. 안 좋은 기사 보이면 마음에 새기지 말고 넘겨요. 댓글도 그렇고.”

 
걱정이 섞인 지호의 목소리가 깊었다. 그 목소리에 혜윤이 눈길을 돌리자 애닳는 진심이 오롯이 짙은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혜윤이 미소로 그를 달랬다.

곧 음식이 나왔지만 혜윤은 먹는 둥 마는 둥 핸드폰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지호가 그 관심을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억지로 데려오는 거 말고, 제 발로 걸어오게 만들려고.


“다음 주가 크리스마스잖아. 받고 싶은 선물 있어요? 하고 싶은 것도 좋고.”

 
문득 혜윤의 집 거실에 있던 트리가 생각났다. 11월부터 꼬마전구가 알록달록 빛을 뽐내던. 그리 한참 전부터 기다린 날이었으니, 쫄래쫄래 제 말 쪽으로 따라올 것 같았다.


“맞다, 지호 씨는 촬영 24일까지죠?”

 
그리고 쫄래쫄래 말고 후다닥 제 쪽으로 달려오는 것 같았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혜윤의 눈이 초롱초롱 지호를 본다.


“아니. 하루 당겨졌어요. 23일 밤까지. 감독님이 베려해 주신 거죠. 다들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이랑 보내라고.”

“그렇구나…….”

“응. 그래서 받고 싶은 선물은?”

 
꼭꼭 복국에 말아놓은 밥을 씹는 입이 천천히 올라선다. 어떤 선물을 떠올린 건지 참 예쁘게도 웃네 싶은 순간, 꿀떡 밥을 삼킨 입이 귀여운 목소리를 냈다.


“……그날 같이 있는 거. 지호 씨는요?”

 
그래서 그 역시 빠르게 답을 이었다.


“난 그 전날부터 같이 있는 거.”

 
다시 밥을 뜨려던 손이 똑 멈췄다. 똘망똘망 부끄러운 눈이 쳐다보기에 그가 혜윤이 떠 놓은 밥 위에 김치 한 조각을 올렸다. ‘얼른 먹자.’라고 입만 벙긋거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지호가 그 작은 얼굴을 꾹 누르듯이 바라봤다. 꼭꼭 씹는 게 기특하고 예뻐서, 오늘 헤어지면 일주일쯤은 또 못 만나서. 그 일주일 동안 제가 지켜줄 수 없는 곳에서 어쩌면 상처받을지도 몰라서, 아니 분명 받고도 안 받은 척할 것 같아서.

잠깐이나마 현실 말고 동화를 들려주기로 했다.

그의 목소리가 꿈을 그리는 듯 감미로웠다.


“음…… 크리스마스에 둘 다 늦잠 자고 일어나는 거지. 집에 있는 음식 대충 챙겨 먹고, 소파에서 꼭 붙어 누워서 영화도 보고. 난 밀린 독후감 써야 하니까 동화책 읽다가…… 궁금한 거 생기면 곧장 작가한테 물어보고? 남자 친구 찬스로?”

 
혜윤이 빠르게 음식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갈색 눈이 오직 한 사람만 담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지호가 반짝 그 눈을 마주하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한 입 더 먹어야지.’ 또 한 번의 반찬을 올려주며 재촉하자, 그녀가 얼른 음식을 입에 넣고는 다시 시선을 올렸다. 다음 이어질 동화 속의 장면을 고대하면서.


‘밤새 자는 것 같더니, 눈에 별을 숨겨놨네.’

 
지호가 찬란히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어렵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 저녁은 맛있는 거 먹자고 밖에 나가보는데…… 사람 많겠죠? 크리스마스니까. 아쉽지만 포장해 가는 길에 산책 조금 하다가. 길 건너에 사람들이 잔뜩 줄 서 있는 음식점이 보이는 거야.”

“응응. 그래서?”

“그래서…… 저 집은 뭐 하는 집일까? 다음에 꼭 같이 가보자,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거죠. 날이 추우니까 손 꼭 잡고.”

 
혜윤의 두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점점 동그란 모양이 갖춰진다 싶은 순간, 그 틈으로 가라앉히지 못한 감탄이 터졌다.


“와…… 상상했어요. 너무 좋다.”

 
너무 감동하면, 또 못 보는 동안 애틋한 마음이 생겨버릴지도 모르니까. 지호는 감동을 조금 빼앗아 가기로 했다.


“응. 꼬시려고 한 말이니까.”

“우와아아!”

“큭큭. 장난이지.”

 
지호는 예상한 대로 딱딱 반응하는 혜윤이 깜찍했다. 뒤늦게 밥을 뜨려는데 그녀가 얼른 제 밥 위에 반찬을 올려준다. 밥을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기에 이때다 싶어 조금 솔직한 마음도 툭 보여주었다.


“크리스마스는 정말 저렇게 해 줄 수 있어요. 대신 이브는…… 침대 밖으로 안 나갈 거고.”

“음, 역시…… 우리 지호 큰일이다.”

“큭큭. 혜윤아, 너…… 내 이름 툭 부를 때마다 엄청 어색한 거 알지?”

 
두 사람의 웃음소리와 함께, 행복으로 배부른 아침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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