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현실은 동화가 아니에요
(74/110)
74. 현실은 동화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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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현실은 동화가 아니에요
2023.02.12.
“아이고…… 혜윤아, 이 언니 머리 아파서 돌아가실 것 같아요.”
“큭큭. 그러게 적당히 마셨어야지. 몇 시까지 마신 거야?”
혜윤은 운전하는 와중에도 옆자리를 살폈다. 여배우로서의 모든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 민주는 한껏 젖혀진 의자에 앉아 골골거리고 있었다.
“몰라. 기억도 안 나. 그냥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어.”
“하나?”
“응. 남자친구 사라졌다고 뛰쳐나간 장혜윤의 뒷모습?”
“우와! 내가 언제 뛰어나갔다고.”
발끈하는 혜윤을 향해 실실 웃다가도 금세 찡그려지는 미간. 민주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가며 지끈대는 골을 달랬다. 그러면서도 입은 여전히 즐거움을 놓치지 않았다.
“밤새 같이 있다가 아침에도 데이트하고 온 거야?”
“그냥…… 밥 먹고 온 거지.”
“헤어지기 아쉬워서 엉엉 울었어? 대신 우리 크리스마스에는 꼭 붙어 있자고 약속하고?”
“…….”
혜윤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입은 당연히 거짓말을 못 하고, 뜨끔해서 또록또록 눈을 굴리기만 하고 있으니. 민주가 어색한 옆얼굴을 재미있게 지켜봤다.
“큭큭. 맞나보네.”
“……울지는 않았다.”
“아이고, 그러셨어요?”
연인이 크리스마스 같이 보내는 건 너무 당연한 건데. 톱배우를 남자친구로 두면 모든 게 조심스러운가. 그녀가 꿀물로 텁텁해진 입 안을 적셨다.
몸보다 더 큰 혜윤의 여행 가방 안에는, 고맙게도 꿀까지 있었다. 대체 왜 가져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 머리야…… 드라마 반응은 좀 봤어?”
“응. 대충 기사 제목들만. 크게 나쁜 말은 없는 것 같던데.”
식도를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달콤함. 잠시 따끈하게 풀어진 건 속뿐만이 아닌 듯했다. 민주의 입에서 그보다 더 따뜻한 말이 나왔다.
“그런데 혜윤아, 냉정하게 봐도 너무 잘하더라. 연기가 연기 같지 않을 정도로.”
“음…… 서울 도착해서 해장하고 들어갈까? 대접할 기회를 주시겠어요?”
“네, 언니. 감사합니다. 너무 예쁘세요.”
민주가 제일 잘하는 감정 없는 칭찬에 혜윤이 운전대를 괴롭히며 웃었다. 몇 모금 더 마시던 꿀물을 내려놓은 손에 핸드폰이 쥐어진다. 어젯밤 내내 검색했던 이름. 장혜윤이라는 세글자를 누르자 여전히 기사는 쏟아지고 있었다.
화면을 쓱쓱 문지르며 기분 좋게 제목만 훑어내릴 무렵.
“……이게 뭐야.”
“응? 뭐가?”
딱딱해진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화면을 멈췄다. 혜윤이 겨우 옆자리를 힐끔거렸지만, 찡그려진 미간만 보일 뿐이었다.
민주는 화면 속에 거슬리는 기사를 두드렸다.
‘<23센티미터> 장혜윤, 알고 보니 금수저?’라는 자극적인 제목.
내용은 더 했다. 늦은 데뷔에 비해 이전에 뚜렷한 직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현재 운영 중인 카페가 가장 땅값이 비싸기로 손꼽히는 동네에 있다는 것 등등. 재력을 추정하는 내용이었다.
“이 사람들이 헛소리를 그럴듯하게 써놨네?”
“응? 뭔데 그래?”
“이따가 말해 줄게. 지금 언니가 잠깐…… 손가락 운동을 해야겠거든?”
민주가 젖혀놓은 의자를 바르게 세웠다. 빳빳해진 고개를 양옆으로 뚝. 뚝. 그러고는 빠르게 댓글을 적기 시작했다. 운전 중인 혜윤은 민첩한 움직임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큭큭. 손가락 좀 봐. 너무 빨라서 보이지도 않아.”
민주는 혜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눈치였다. ‘제가 건너건너 친구라서 아는데요.’로 시작한 긴 글을 겨우 완성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뿌듯하게 등록 버튼을 눌렀건만.
“뭐야!”
순간, 다음 화면엔 깔끔한 문장만 떠 있었다. 없는 페이지라고.
“왜 그러는데. 나 궁금해 죽겠네 진짜! 차 잠깐 세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열심히 작성한 댓글이 사라진 게 억울해 얼른 이전 화면으로 돌아갔지만, 댓글만 사라진 게 아니었다. 기사 자체가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멀뚱멀뚱. 민주가 새하얀 화면을 뚱한 얼굴로 바라봤다.
“어쨌든…… 내가 이긴 거지?”
찝찝하지만, 무찌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아, 집 근처에서 카페를 하고 계셨구나?”
같은 시간, 봉기는 노트북 속의 기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민주가 열을 냈던 그 기사였다.
Rrrr- Rrrr-
“응. 확인했어. 작은 거라도 다 내리고 싶거든? 특히 사생활 관련된 건 싹 다.”
-네, 대표님. 그럼 주말에도 계속 모니터링 할까요?
“그래야 할 것 같아. 뭐든 이슈 커진다 싶으면 바로 연락하고. 나도 수시로 보고 있으니까.”
-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짧은 통화를 끝낸 그의 얼굴이 여전히 노트북을 바라본다. 터치패드를 슬근거리는 손끝만큼이나 눈동자 역시 느릿느릿 문장을 읽었다.
“근데 나도 궁금은 하네. 진짜 금수저신가? 더 잘해드릴 걸 그랬나…….”
혼잣말과 어울리는 입꼬리가 한쪽만 쓱 올라붙는다. 이쯤이면 됐으려나.
딸깍- 딸깍-
잠시 후, 손가락이 새로고침을 누르자 기사는 완벽히 사라진 상태였다.
이렇게 통화 한 번, 손가락 하나로 없앨 수 있는 기사는 조금 흥미롭기도 했다. 하지만 부득부득 몸부림을 쳐도 막을 수 없는 기사는, 제목만 봐도 심장이 내려앉기 마련이다.
***
월요일 아침. 일요일은 늦게 일어나 짐 정리를 핑계로 뒹굴뒹굴했지만, 오늘은 평소처럼 일찍 하루를 시작한 혜윤이다. 화분에 물도 주고, 아침 뉴스도 보고. 이렇게 9시가 오기도 전에 지호의 목소리까지 듣고 말이다.
“지금 촬영 중 아니에요?”
-네. 잠깐 멈춘 거라 다시 들어가야 돼요.
“피곤하겠다. 며칠만 더 힘내요.”
-뭐가 피곤하다고. 그런데…….
“응?”
지호는 오늘도 새벽부터 촬영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건 평소와 같았는데 한창 일할 시간에 전화가 온 건 조금 의문스럽긴 했다. 낯선 시간에 말끝을 길게 늘이는 묵직한 목소리는 더더욱.
조금 기다려도 전혀 이어지지 않는 대답. 혜윤이 이 모든 의문을 풀어달라며 재촉했다.
“……지호 씨?”
-네. 이따가…… 9시 넘으면 기사 하나 터질 거예요.
“기사?”
-응. 막아보려고 했는데 저쪽도 워낙 큰 회사라. 잘 안됐네.
혜윤은 TV 소리를 줄였다. 고개가 고장이라도 난 듯 자잘하게 끄덕끄덕 움직였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녀의 행동을 다 본 것처럼, 지호는 그녀를 달랬다.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별 건 아니에요. 예상했던 거라 우리 쪽도 바로 대응할 거고.
“그렇구나…….”
-응. 새 작품에 딴지 거는 건 흔한 일이니까 놀라지 말라고. 상처받지 말고.
“상처 안 받아요. 부족한 부분은 지적받는 게 당연하지.”
그래서 혜윤도 씩씩한 목소리로 화답했는데, 상대는 그게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그런 생각도 하지 마요. 절대 부족하지 않으니까.
곧장 이어지는 목소리가 무서우리만큼 단호했다. 조금 전의 온화함이 싹 가신 채 화를 누르려는 그의 노력이 여실히 느껴졌다. 혜윤이 동그랗게 눈을 키웠다.
“와, 목소리가 무섭다.”
-당연하지. 장혜윤 건드리는 건…… 참을 수가 없으니까.
그녀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서슬 퍼런 경고. 날이 바짝 서 있는 말투만 들어도 그의 눈빛이 얼마나 날카로워졌을지 그려졌다. 혜윤은 그 애틋함을 가만히 느꼈다. 그리고 저를 지키려는 지호의 마음에 솔솔 온기를 불어주기로 했다.
걱정 말라고. 괜찮다고.
“음…… 우리 지호 화 많이 났네.”
그가 늘 어색하다고 놀리는 말투에 일부러 더 어색함을 더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작은 콧바람이 들렸다.
지호는 혜윤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노력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호칭을 똑 떼어내고 제 이름을 부를 때면, 그때마다 구연동화 하듯이 말하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고.
-내 이름 부를 때마다 어색하게 음 타는 거 알죠? 그래서 귀엽지만.
“응. 왜 그런지 알아요?”
-갑자기 반말하려니까 낯설어서?
그가 걱정을 미루며 혜윤이 건넨 웃음을 누렸다. 하지만 곧 웃음이 싹 사라지기도 했다. 이어지는 대답에 티끌만큼의 망설임도 없어서.
“아니. 이름 부르는 것도 떨릴 만큼, 너무 좋아해서.”
-…….
이 순간에 상상도 못 한 단호함이었다. 지호는 너무 놀라 숨이 덜컥 멈춘 기분이었다. 그에 비해 수화기 너머의 혜윤은 가뿐한 목소리를 냈다. 이럴 땐 정말이지, 그녀가 귀엽게 강조하던 누나라는 말이 확 와닿았다.
“내가 전에도 말했죠? 나를 너무 귀여워하는 경향이 있어요, 지호 씨는.”
-아…… 조금 전에 너무 놀랐다.
“큭큭. 나 지켜주려고 애쓰는 거 알아요. 그런데 나도…… 지호 씨 건드리면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와, 가만 안 있으면?
“조목조목 입장을 내든, 회견을 하든. 하다못해 주먹으로 때리든지 할 거예요. 걱정 마요. 이제 시간 많아서 운동 배울 수 있으니까.”
듣기 좋은 남자의 웃음이 부산에서 저 먼 서울까지 흘러갔다. 그리고 곧 듣기 좋은 수준을 넘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큰 웃음이 터졌다.
아이 같은 여자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로 인해.
“지호 씨, 현실은 동화가 아니에요.”
큰 웃음소리에 모두 지호를 돌아봤지만 지호의 귓가엔 서울에서 전해진 작은 혼잣말만 들릴 뿐이었다.
‘건드리기만 해, 아주. 무서운 현실을 보여줄 거니까.’ 같은.
그가 손가락을 접어 눈가를 눌렀다. 너무 웃어서 눈에 물기가 맺힌 것 같았다. 늘 작은 위로를 주려 하면, 어디서 꺼내 온 건지 집채만 한 애정을 제 온몸에 쏟아주는 여자.
고맙고, 사랑스럽고.
-큭큭. 우리 혜윤이 진짜…….
“보고 싶다고?”
-……응. 보고 싶다.
매 순간 보고 싶은, 유일한 사람.
9시를 10분 앞둔 시간, 폭풍이 코앞에 다가온 걸 훤히 알면서도 두 사람은 짧은 통화의 즐거움을 누리기로 했다. 9시의 걱정은, 8시 50분의 행복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그리고 9시가 20분이 지났을 무렵, 각자 홀로 남겨진 곳에서 더 이상 웃을 수만은 없었다.
***
<23센티미터> 입양된 사촌과의 사랑?
누구나 알 만한 유명 언론사를 통해, 누구나 호기심을 가질 법한 제목이 인터넷 페이지 상단에 걸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누구나 인상을 찌푸릴 만한 표현이었다. 그 기사를 필두로 쏟아지는 공격들.
오후 1시가 되자 방어전까지 거세졌다.
<23센티미터> 안지호 “잘못된 작품 해석이 부른 오해”
안지호 공식입장 “모든 의혹에 관한 대답은 작품으로써”
<23센티미터> 김민우 PD “흠집 내기에 대응할 가치 없어”
평균 시청률 2%인 드라마스페셜이 12%의 기적을 만들었음에도 모두 묻히고야 말았다.
부동의 1위였던 옆 채널의 드라마 시청률이 29%에서 23%로 곤두박질친 것 또한. 오후 4시, 그제야 숨겨뒀던 본색들이 기사 제목으로 떠오르고야 만다.
<23센티미터> 작가 장혜윤은 묵묵부답
작품성 논란, 장혜윤 여전히 침묵
그리고 5시인 지금. 노트북 화면 속에 적힌 기사 제목이 혜윤의 눈가를 할퀴었다.
장혜윤은 언제까지 안지호 뒤에만 숨어 있을 건지?
글자가 아니라 화살이었다. 가슴에 정통으로 맞기 싫다면 이제 그만 나오라고. 혜윤이 주먹을 꼭 쥐었다.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한 것도 그와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