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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기술 vs 진심 (75/110)


75. 기술 vs 진심
2023.02.15.



 


-매니저님!

“큭큭. 이렇게 반가워해 주실 줄 알았으면 전화 더 빨리할걸.”

 
봉기가 핸드폰 너머의 삐약거리는 목소리에 키들댔다. 늘 제 앞에서는 긴장으로 움츠러든 몸짓과 작은 목소리가 전부였던 혜윤이었기에 더 웃음이 났다. 매니저님, 4글자만 들어도 지금 그녀가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한지 알 것 같았다.

얼마나 전면으로 나서고 싶어 하는지도.

그래서 이어질 말을 기다려주지 않은 채 곧장 치고 나갔다.


“작가님, 배고프다고 찡찡거려서 밥 주잖아요? 그럼 계속 온다? 더 달라고. 거기다 다음부터는 혼자 오지도 않아. 자기 친구들 다 데리고 오지.”

-…….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하고 싶은 게 뭐든,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봉기는 가만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실 제 나름대로 입장문을 쓰긴 했어요. 그걸 올릴까 했었는데.

“아이고, 그런 걸 또 언제 쓰셨어?”

-조금 전에요. 너무…… 화가 나서.

 
봉기는 또 한 번 웃을 수밖에 없었다. 화를 낼 줄도 모를 것 같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고 있으니, 혜윤의 감정이 더 와닿았다. 하지만 받아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일은 이성으로 해야 하는 거니까.


“그런데 입장문은 정말 잘 써야 돼요. 너무 숙이면 다 인정하는 꼴이고, 그렇다고 고개 조금 들면 건방지다고 욕먹거든. 대중 기만한다고.”

-……그렇구나.

“네. 그래서 기술적으로 써야 돼. 일단…… 제 메일로 보내주세요. 필요할 때 작가님이 써주신 내용을 참고할게요.”

 
타닥타닥.

봉기가 제 메일주소를 혜윤에게 보내자, 상대에게도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타닥타닥. 아마 혜윤 역시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터치패드를 문지르는 투박한 손가락이 편지 모양을 향했다.

손가락의 움직임만큼이나 말투 역시 느긋했다. 억울함과 분노에 휩싸인 여자를 쉽게 달랠 수 있을 만큼의 여유였다.


“그리고 당분간은 매니저를 붙여드릴까 하는데 어때요? 지금 나랑 지호가 서울에 없으니까.”

-으아, 전혀 필요 없어요.

“아…… 매니저는 불편하시구나…….”

 
봉기가 조금 전보다는 살짝 높아진 목소리를 냈다. 느리게 주억거리는 고개가 슬쩍 옆을 향한다. 그러자 그의 노트북이 대뜸 옆자리로 끌려갔다.

타닥타닥. 곧이어 다시 봉기에게로 돌아온 노트북 화면.


[안 돼. 설득해 봐.]

 
화면을 본 봉기의 고개가 깔끔하게 끄덕여졌다. 그와 비슷한 군더더기 없는 질문이 혜윤을 향했다.


“보통 하루 일정이 어떻게 돼요? 카페 운영하신다고 들었는데. 출퇴근하시는 건가?”

-아니요. 카페는 일주일에 한두 번만 가요. 그것도 잠깐.

“그건 잘됐네. 글 작업은 집에서 하시고?”

-네. 그런데 이틀에 한 번씩 서점에 가거든요. 그날은 서점 주변 카페에서 해요. 날씨 좋으면 동네 놀이터에서도 하고.

“……놀이터?”

 
혜윤에게서 온 메일을 두드리려던 손가락이 멈칫한다. 봉기는 저도 모르게 놀이터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 같아서 생소했다. 아마 그녀가 언급하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잊고 살았을지도 모를 단어였다.


-네. 글도 쓰고 아이들 노는 것도 구경하고. 그러다 운 좋게 아무도 없으면…….

“……없으면?”

 
첨부 파일을 다운 받으려던 손가락이 또 한 번 멈칫. 혜윤이 말끝을 길게 늘였는데, 마치 콧노래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핸드폰으로 꽃향기가 넘어올 것 같은 희한함. 오늘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싶었다.

그리고 꽃향기 대신 부끄러운 고백이 전해진다.


-……몰래 놀이기구도 한번 타 봐요. 진짜 재밌는지 궁금해서.

“아…… 그러시구나…….”

 
아, 그게 궁금하시구나. 왜 그런 게 궁금하실까.

봉기가 다운 받은 첨부 파일 위에 메모장을 띄웠다. 조금 전, 그녀를 설득하라는 명령이 적힌 메모장이었다. 톡톡. 명령을 지운 새하얀 바탕 위로 빠르게 타닥타닥. 그가 문장 하나를 완성해 옆 사람에게 슬쩍 보인다.

[작가님 진짜 너보다 2살 많은 거 맞지?]
 

곧 옆자리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서울까지는 닿을 수 없어 아쉬운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을 혼자만 누린 봉기가 다시 노트북을 제게로 돌린다. 그리고 혜윤이 보낸 글을 눈으로 읽어내렸다.


-매니저님, 그런데 지호 씨는 괜찮은…….

“세상에…….”

-네? 왜요?

“작가님…….”

 
통화 내내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봉기의 머뭇거림. 제 말까지 뚝 잘라버리는 행동에 혜윤은 조바심이 났다.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오래 기다려줄 수가 없었다.

또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매니저님? 왜 그러세요?

“아니, 글을 너무…… 너무 잘 쓰셨네. 이거 그냥 바로 배포할까?”

-아, 놀래라.

 
봉기는 혜윤의 기척이 귀에 닿지 않았다. 오직 눈에만 온 집중력을 쏟아냈기에. 정확히는 눈이 읽는 혜윤의 글에만.

‘<23센티미터> 작품 논란에 관해 알려 드립니다.’ 로 시작하는 혜윤의 글은 명료하고 따뜻했다.

뒤늦은 입장 발표에 대한 사과, 작품 설정에 관한 깔끔한 설명, 그럼에도 오해할 만한 설정을 채용한 건 오롯이 작가의 부주의와 부족함 때문이라는 반성.

또한 위에서 말한 작품 설명이 한 치의 거짓과 꾸밈이 없다는 건, 앞으로 남은 세 번의 방송으로써 모두 입증될 거라는 확신까지. 문장마다 길지 않았기에 읽기가 쉬웠고, 그에 반해 알찼다.


“와…… 아까 내가 건방을 떨었네. 이렇게 완벽하게 쓰셨는데. 미안해요.”

-에이, 말도 안 돼요.

 
그리고 위의 모든 명료함을 품어내는 마지막 문단의 따뜻함.


“기술보다…… 진정성이 중요하네.”

 
봉기는 입장문의 제일 끝 문장들을 유심히 눈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이 시간 이후 작품에 관한 모든 질타는 작가 장혜윤에게만 향했으면 합니다. 안지호 배우는 이 사태와 관련해 일말의 책임이 없으며, 또한 작가를 넘어 장혜윤이라는 한 사람이 반드시 지켜주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와, 진짜 감동이다…….”

-저는 기술은 없으니까요. 대신에 정말 진심으로 썼어요.

“……좋냐?”

-네?

“아! 아니에요. 작가님한테 말한 거 아니야. 어휴, 놀라셨겠네.”

 
화들짝 놀란 봉기가 우왕좌왕 실수를 덮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옆 사람을 흘기고 있었다. 제 옆에 앉아 글자를 마음에 새길 듯이 보고 있는 사람, 지호에게. 눈꼴시다는 생각은 정말 잠시였다. 다시 들여다봐도 마음이 동하는 문장이었다.

끄덕여지는 고개 위로 다시 봉기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럼 앞으로 돌발행동은 하지 않는 걸로. 궁금한 거나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나한테 편하게 연락하시고.”

-네.

“옳지, 착하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귀여워서, 봉기는 무례한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혜윤을 귀여워했다. 의외로 강단이 있다는 것도 확실히 알았으니, 이제 통화를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놀이터보다 더욱, 자신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은 말 때문에 미뤄졌지만.


“응.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으시고?”

-……귀여워요.

“뭐가? 작가님이?”

-아니요. 매니저님이.

 
끔뻑끔뻑. 봉기가 옹골진 눈을 멀뚱멀뚱 감았다 떴다. 살면서 들어본 적도, 죽어서도 들어볼 일이 없을 것 같은 감상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다시 또 끔뻑여지는 눈이 노트북 위에 올려진 제 손에 닿았다.

두툼하고 묵직한 손가락마다 검은 잔털이 송골송골. 조금 더 턱을 당기자 몸통은 더 두툼하고 우락부락했다.


‘귀엽다는 뜻이…… 바뀌었나?’

 
말을 뚝 끊고 계속 몸을 훑고만 있는 봉기. 지호가 그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봉기의 기이한 행동은 혜윤의 목소리로부터 멈출 수 있었다.


-지호 씨 잘 지켜주세요. 저는 조금도 걱정 마시고요. 내일부터 운동 시작할 거라서.

“……그러시구나.”

 
그리고 기이한 행동을 멈춰 주기도 했지만, 알 수 없고 헷갈리는 말을 하나 더 얹어주기도 했다. 운동은 또 무슨 말일까. 무슨 상관이지.

그 순간 지호가 노트북을 홱 뺏어 들었다. 타닥타닥. 내내 봉기의 이상행동을 지켜봤기에, 지호 역시 궁금한 모양이었다. 화면 위엔 새로운 문장이 적혀 있었다.

[둘이 계속 무슨 말 하는 중?]

봉기도 곧장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끔뻑이는 눈과 함께 노트북 화면이 지호를 향한다. 들은 그대로 전할 테니, 이 말을 해석해 달라고.

[내가 귀엽대.]

일순간 지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을 보던 봉기가 빠르게 글자를 덧입혔다.

[너 잘 지켜달래. 자기는 운동할 거라고. 무슨 소리냐?]

그제야 지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지호는 알고, 봉기는 모르는, 혜윤의 주먹다짐을 향한 열정이었다.


“아무튼, 그럼 끊을게요. 연락 꼭 하세요.”

-네. 감사해요.

 
봉기가 적당히 따뜻해진 핸드폰을 얼굴에서 뗐다. 힐끔 바라본 지호는 여전히 노트북 속에 담긴 혜윤의 글을 읽고 있었다. 뭐 저렇게까지 멋있게,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미소였다. 고고한 얼굴 여기저기에 행복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러니 볼멘소리가 튀어나오는 건 쉬웠다.


“그렇게 애가 타면 직접 챙기지, 뭘 나까지 끼워 넣어.”

“나한테 하기 힘든 말도 있을 테니까.”

“그거야…… 그렇긴 하지.”

 
봉기의 눈 역시 혜윤의 문장들을 어루만졌다. 특히나 처음부터 눈이 갔던 마지막 문장들을. 저렇게 지켜주고 싶다는데, 이 상황이 조금은 두렵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지호는 그런 속마음까지 헤아리고는 그녀의 버팀목으로 자신을 집어넣은 것이다. 봉기는 이럴 때마다 믿기 힘들었다. 정말 지호가 자신보다 12살이 어린 게 맞는지. 특히나 오늘은 또 다른 사람의 나이마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호에게 향하는 그의 말투에 의심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너 서울 가면 다시 확인해봐.”

“뭘?”

“작가님 나이 말이야.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으니까.”

 
지호가 피식거리며 봉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요즘도 가끔 놀이터를 가신대.’라는 걱정스러운 말투 앞에서는 그 웃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혜윤의 동화 작가 생활을 모르니, 아이들과 가까이하려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

<23센티미터> 작가 장혜윤, 입장문 발표

장혜윤 “모든 오해는 작품으로 풀어갈 예정”

<23센티미터> 장혜윤 “마지막 방송 뒤엔 논란도 사라질 거라 확신”

다음 날 오전. 주요 포털 사이트를 통해 혜윤의 입장문이 공개되었다. 확산의 속도가 놀라우리만큼 빨랐지만, 봉기가 오늘의 상황을 예고했기에 혜윤은 조금 덤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후 3시를 넘어섰을 땐.

<23센티미터> 논란 잠재운 장혜윤 작가의 진심

드라마스페셜의 새 역사, 12%의 기적

기사와 댓글을 일일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론이 어느 방향으로 발을 틀었는지. 봉기와 민우가 수시로 상황을 들려줬기에 그들 또한 얼마나 안도하는지도 잘 알 수 있었고.

하지만 그녀는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공개된 입장문에서 제일 중요한 마지막 문단이 빠져있었기에. 그래서 남은 질타는 여전히 지호가 감당하고 있었고, 오히려 그럴싸한 입장문으로 재평가를 받은 건 혜윤이었다.

띠리링-

혜윤이 뚱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었다. 또 민우 아니면 봉기겠거니 싶은 알림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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