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언젠가부터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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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언젠가부터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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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언젠가부터 내내
2023.02.19.
혜윤이 느릿하게 핸드폰을 밝혔다. 그곳에는 지켜주고 싶었던 남자가 보낸 사진이 있었다.
노트북 화면을 찍은 사진. 화면 속에서 입장문 속 사라진 문장들이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간 이후 작품에 관한 모든 질타는 작가 장혜윤에게만 향했으면 합니다. 안지호 배우는 이 사태와 관련해 일말의 책임이 없으며, 또한 작가를 넘어 장혜윤이라는 한 사람이 반드시 지켜주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부탁드립니다.]
기분이 오묘했다. 반가웠지만 이런 식으로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기에 씁쓸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달래려는 노력이 제일 아래로 밀려들었다.
[나도 지켜주고 싶은 존재가 있어서. 미안하지만 이건 나만 알고 있을게요. 정말 감동. (오후 4:06)]
“결국 못 지켜줬네…….”
작은 혼잣말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너무 크고 무거워져서 빠른 대답을 전할 수 없었다. 이 순간 지호 역시 같은 메시지를 보고 있단 걸 알면서도.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거란 걸, 너무 잘 알면서도.
곧 그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 역시 그녀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속상했나 보다. 답장도 안 해 주고. (오후 4:07)]
“……그냥 조금.”
닿을 수 없는 대답이라서 솔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닿을 수 없을 거라 믿었던 대답을 그는 느낄 수 있나 보다.
[감동은 나 혼자 잔뜩 받고, 작가님은 서운하게 만들었네. (오후 4:08)]
지호는 보내자마자 사라지는 메시지 앞의 숫자를 봤다. 속상했겠지 싶은 걱정은 몇 번이고 답 없이 사라지고만 마는 숫자 앞에서 그 크기를 키워갔다.
어쩌면 속상한 정도가 아니겠구나. 진심을 다한 노력이 송두리째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겠구나.
그러자 불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의 손가락이 서둘러 통화 버튼을 향한다.
“촬영 다시 들어갈게요! 준비해 주세요!”
하지만 끝내 누를 수는 없었다. 그가 한쪽 입술을 짓이겼다. 자책을 움켜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리고 습한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때, 손안이 뜨겁게 진동했다.
먼 거리를 비웃으며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게, 꼭 그의 재주만은 아니라는 듯 말이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눈을 딱 떴는데, 옆에 내가 없는 거야. 분명 둘 다 늦잠 자고 일어나기로 했는데. (오후 4:11)]
“……응?”
느닷없이 시작된 이야기. 아니, 가만히 살펴보니 지난 주말 그가 들려줬던 크리스마스 동화였다. 뭉개졌던 그의 입술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을 때, 동화 한 장면이 더 이어진다.
[어디 갔지? 놀라서 거실로 나가보니까 요리 중인 거죠. 대충 말고, 지호 씨 따뜻한 음식 먹이고 싶어서. (오후 4:11)]
그리고, 마음처럼 깊어진 눈 속에 끝끝내 보드라운 마음이 읽혔다. 그녀의 입장문처럼 마지막은 제일 진심을 담아, 제일 따뜻하게.
[내가 지켜줄 수 있는 건 그 정도 같아요. 지호 씨 밥 한 끼 정도. 그래도 괜찮다면 열심히 해볼게요. (오후 4:12)]
지호가 감동으로 뻐근해진 가슴을 애써 다잡았다. 해낼 수 없는 건 깔끔히 인정하고, 대신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를 지켜주겠다는 여자. 저 멀리 재촉하는 스태프들을 힐끔거리다 서둘러 손을 움직였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행복이지. 고마워요. 벌써 맛있겠다. (오후 4:12)]
답장을 보낸 뒤에 고개를 털었다. 장혜윤을 가진 안지호 말고, 축구 시합에서 지고 돌아온 김종수가 되어야 했기에. 가벼워져야 했다. 마지막 메시지가 하나 더 남아 있었고, 역시나 그녀만의 방식으로 무게를 덜어줄 줄은 몰랐지만.
[따뜻하다고 다 맛있는 건 아니에요. 내가 보여준다. (오후 4:13)]
지호가 짧은 문장을 보며 실실 웃었다.
***
“와, 사람 한 명 없다고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다음 날 저녁. 7시라고는 믿기 힘든 어둠을 뚫고, 조연출이 민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과 발 모두 민우를 향했지만 눈은 카메라 앵글이 주시하는 남자에게 멈춰 있었다. 민우가 그의 시선을 쫓았다.
“뭐가?”
“지호 씨 말이에요. 진짜 일만 하잖아요.”
“여기 오래 있고 싶겠어? 빨리 끝내고 서울 갈 생각뿐이겠지.”
두 사람은 다음 촬영을 준비 중인 지호를 살폈다. 그의 주변으로 다가간 남자 스태프가 가벼운 농담을 한 것 같았다. 지호 역시 스태프에게 옅은 미소를 보인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조연출이 고개를 설설 저었다.
“응. 저 웃음은 진짜가 아니야. 진짜 웃음은 지난주 금요일까지였어.”
“큭큭. 혜윤이랑 촬영할 때까지?”
“네. 진짜는 분위기부터 달라. 지난주까지는 가까이 가면 주변 공기가 끈적거렸다니까요? 달아서?”
과장이 심하다며 타박했지만, 민우 또한 크게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4시간 뒤, 진짜는 꼭 지난주까지가 아니었다. 한 여자의 목소리만으로도 그는 어디서든 진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지호가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핸드폰 속 이야기가 자장가처럼 마음을 녹였다.
-……그래서 오늘 서점 가서 책도 몇 권 사고, 민주랑 저녁도 먹고.
“응.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일상이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나.
쫑알쫑알. 신나서 떠드는 작은 목소리가 새의 지저귐처럼 듣기 좋았다. 그의 광대가 사뿐히 올라붙는다. ‘응. 그리고?’라고만 하면 또 쫑알쫑알. 혜윤은 행복을 들려주느라 신나 보였다.
-아! 오는 길에 지호 씨도 봤어요. 엄청 큰 전광판에서.
“진짜? 무슨 광고지?”
-화보 같았는데…… 아무튼 엄청 멋있었어요! 진짜 진짜.
“큭큭. 고마워요.”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에 그 역시 키득거렸다. 하지만 문득 걱정스럽기도 했다. 연예인과 비연예인, 그 어딘가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것 같아서.
“그런데…… 밖에 다니는 건 괜찮아요? 불편하진 않고?”
-응. 아무도 몰라봐요. 정말 화면이 똥글똥글해 보이나 봐요.
“오, 좋다.”
-뭐가? 똥글똥글한 게?
“큭큭. 둘 다. 똥글똥글한 것도, 몰라보는 것도.”
혜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콧소리를 냈다. 샐쭉거리는 입술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정말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이틀 뒤면 만날 텐데도 조바심이 났다. 원래 가까울수록 더 애가 타는 법이니까.
-교복도 벗고, 화장도 하고. 나름 꾸며서 그런가 봐.
“……너무 꾸미지는 말자.”
더더군다나 넘치게 예쁜 얼굴을 꾸미기까지 하고 다닌다는데. 마음이 끓지 않을 리 없었다.
“아…… 보고 싶어 죽겠네.”
그러니 막을 새도 없이 본심이 터져 나가는 것도 당연했고.
-음…… 그럴 줄 알았어.
“큭큭. 자신감?”
서로의 귓가에 비슷한 웃음소리가 스며들었다. 미세하게 전해지는 숨소리까지, 이렇게나 작은 것도 행복으로 다가올 수 있구나. 그 호흡마저 좋아서 지호는 핸드폰을 귀로 바짝 붙였다.
그리고 좋다 좋다 하니까, 정말 좋은 말들만 들려주는 혜윤이었다.
-에이, 그건 아니고. 나도 엄청 보고 싶으니까, 지호 씨도 조금은 보고 싶어 하겠지? 싶었어요. 안 그럼 내가 억울하잖아.
“…….”
-응? 왜 말이 없어요?
“잠깐 시계 봤어요. 지금 출발하면 서울 몇 시쯤 도착하려나 궁금해서.”
-와! 절대 그러지 마요!
대뜸 누나처럼 타이르는 목소리. 그 뒤엔 또다시 부끄러운 속삭임이 이어졌다. ‘넉넉히 두 밤만 자면 볼 수 있으니까.’ 같은. 빈틈없이 행복만 채워주려는 것 같아, 지호도 입술을 달싹거렸다.
언젠가부터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이, 그녀에게도 빈틈없이 행복을 줄 수 있길 바랐다. 한순간 지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는다. 엷은 장난기 속에 짙고 빽빽한 진심이 들어차 있었다.
“그럼 이것도 눈치챘을 텐데. 한번 짚고는 넘어가야겠다.”
-뭘?
“……사랑한다고.”
재잘대던 수화기 너머로 조용한 감동이 흘렀다. 건넨 사람도, 받은 사람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내 여운이 넘쳐서 상대에게 나눠 줘야지 싶어도 그뿐이었다. 저쪽도 이미 그득그득해 보여서.
이대로 있으면 한없이 빠져들 것만 같았기에, 지호가 입을 열었다.
“일할 때 빼고는 태어나서 처음 해보네.”
-……진짜?
“네. ……고마워요.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게 만들어줘서.”
이 말이 뭐라고, 눈가가 촉촉해지는 기분이었다. 애매한 곳에 멈춰 있던 지호의 시선이 화장대 위에 닿는다. 화장대 위에 놓인 <23센티미터> 대본에. 애정을 듬뿍 받아 여기저기 헤졌지만, 대본 위에 적힌 혜윤의 이름은 처음처럼 선명했다.
눈에 담은 그 이름이 귓속을 간지럽혔다.
-어디 보자…… 지금 출발하면 부산에 몇 시 도착이라고요? 내가 가야겠네.
“큭큭. 못 멈춰서 쭉 오긴 하겠다. 브레이크 제때 못 밟던데.”
-우와아아! 나 자꾸 억울하네!
가슴마저 간지럽혔다.
***
“컷! 끝!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함께 모든 촬영이 끝났다. 내일까지였던 마지막 촬영을 하루 당기기 위한 노력은 굉장했다.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40분씩 두 번의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만 했다.
불만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하나같이 크리스마스이브는 서울에서 보내길 원했기에. 정확히는 사랑하는 사람과.
장비를 정리하는 손과 입들이 돌덩이 같은 피로도 이겨낸 것 같다. 모두가 내일 아침 일찍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한 사람만 빼고. 민우가 한 명 한 명의 어깨를 꾹꾹 눌러주며 지호의 옆자리까지 다가왔다.
“지호 씨, 지금 바로 서울 가요?”
“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서울 가면 연락할게요. 혜윤이랑 다 같이 밥 한번 먹자, 진짜로.”
비슷한 감정이 배인 눈들이 서글서글했다. 대작 아니면 크게 흥미를 못 느꼈던 스타 PD와 정말 초대작 아니면 감히 캐스팅할 엄두도 못 내는 톱배우. 그리고 이 둘을 커피값도 안 나오는 저예산 드라마에 묶어준 신인 작가.
여러모로 오래 기억에 남을 조합이었다.
더 긴 인사는 서울에서 이어가기로 한 뒤, 두 사람은 함께한 스태프들과 1시간쯤 더 인사를 나눴다. 지호도 11시가 돼서야 차로 향할 수 있었다.
탁-
“하…….”
뒷좌석에 몸을 기대자 20시간 가까이 쌓인 피로가 절로 튀어나왔다. 질끈 감으려던 눈이 반짝 떠진 건, 가장 보고 싶은 사람 때문에. 종일 이어지는 촬영으로 혜윤과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힐끔 올려다본 차 안의 시계가 11시 5분을 가리켰다. 빨리 도착해도 3시는 넘을 텐데.
[자요? 난 촬영 끝. 이제 서울 올라가요. (오후 11:05)]
메시지를 보낸 지호의 손이 쉽게 핸드폰을 놓지 못했다. 망설이다가 지워버린 다섯 글자를 손끝이 여전히 기억하는 탓이었다. ‘보러 가도 돼?’
마지막까지 미련이 남은 손이 움찔대는데, 곧 답장이 왔다.
[응. 고생했어요. 내일 꼭 봐요. (오후 11:08)]
안 보내길 잘했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