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 옆에 내가 없는 거야 (77/110)


77. 옆에 내가 없는 거야
202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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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몸이 견뎌낸 피로가 상당했던 것 같다. 잠깐 눈만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어느새 차는 서울에 진입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한 도로, 익숙한 동네.

깨어난 뒤로 30분째, 지호는 말없이 창밖을 봤다. 잠을 부를 것만 같은 잔잔한 음악과 함께. 하지만 고요한 음악으로 마음이 편해진 사람은 차 안에 아무도 없었다.

딸깍딸깍. 이 소리와 함께 차가 우회전하면 최종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규칙적인 방향지시등 소리 밑으로, 제법 규칙적으로 떠올려댔던 어느 대화가 봉기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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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나 이번 작품까지만 하고 당분간은 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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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리 정말 쉬지도 않고 달려왔다. 몇 달은 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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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좀…… 더 오래. 계약이 올해까지였지?’

 
봉기가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며 시계를 힐끔댔다. 12월 24일 오전 3시 31분. 조금도 반갑지 않은 크리스마스이브 같았다.

슥-

천천히 차를 세우자 뒷좌석에서 짐을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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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다. 스케줄 다 꼬여서 이걸 어떻게 감당하나 싶었는데…… 결국 다 해냈네.”

 
봉기의 시선이 룸미러 속 지호를 향했다. 늘 이 많은 스케줄을 어떻게 소화할까 싶었어도, 정말 늘 다 해냈으니. 인사치레처럼 자주 해왔던 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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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은 형이 다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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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밖에 더 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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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고마워했다는 거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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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말을 해도 꼭!”

 
그러다 얕은 인사 말고 깊은 진심이 뛰쳐나가고야 만다. ‘그렇게 무섭게.’ 같은 뒷말은 겨우겨우 삼킨 그였다.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는 놈이 아니었으니, 조금 전 지호의 말에 뼈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지호가 봉기를 보며 어렴풋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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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광고 계약기간 남은 것도 그렇고, 작가님 일도 그렇고. 또…… 영화 개봉도 하나 남았고. 적어도 내년 초까지는 형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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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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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따로 부탁 좀 하고 싶은데. 비용은 최대한 많이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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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순간 울컥 치미는 서운함이 봉기의 몸을 잽싸게 돌려놓는다. 어설프게 벌어진 두 입술 사이로 눅눅한 속내가 터져나갔다. 절절한 마음을 담아본 적 없는 입이었기에, 늘 그렇듯 말투는 거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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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가 진짜…… 섭섭하게 이럴 거야?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계약서로 묶인 사이냐? 그깟 종이 쪼가리가 뭐라고.”

 
말만 거칠 뿐, 눈 속에서 부산의 파도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그 눈을 마주한 지호에게도 아련함이 옮아갔다. 버럭버럭하던 봉기가 다시 정면으로 몸을 돌린다. 부끄러운 속내를 말하자니 눈앞의 남자가 너무 잘생겨서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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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그냥 몇 달 쉬고 와. 아니, 몇 년 푹 쉬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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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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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허전해서 그랬던 건데…… 이제 가득 찼잖아. 내가 널 모르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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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지호의 입에서 작은 감동이 새어 나갔다. 왜 감동은 저쪽에서 했는데, 눈가는 이쪽이 뜨거워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봉기가 서둘러 뜨뜻해진 가슴을 달랬다.

진담이 가득 들어찬 공간에 가벼운 농담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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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 계속 배우 시킬 거야. 죽어서도 따라다닐 거니까 괜한 소리는 꺼내지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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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죽어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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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원이 뭔 줄 알아?”

 
그리고 조금만 뿌리려던 농담이 확 쏟아지기도 했다. 홱 뒤돌아 지호에게 꽂힌 눈빛에 번들번들한 뻔뻔함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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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면 꼭 여자로 태어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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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같은데.”

 
지호가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그 구불구불한 주름들에 흡족해진 봉기가 한 걸음을 더 나아갔다. 진짜 소원은 아직 안 나왔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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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너랑 꼭 부부로 엮일 거야. 절대 안 헤어지게. 법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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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감동 다 깨졌네.”

 
호탕한 봉기의 웃음소리가 차 안의 우울함을 깨뜨렸다. 뒷좌석에서 헛웃음을 띠는 지호를 향해 ‘빈말 같지?’라며 장난을 한 스푼 더 먹이고야 만다. 우스운 말 사이에 가벼운 마음만 오간 게 아니라는 건,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근 십여 년의 시간이 그냥 흘러간 게 아니라고. 생각보다 서로를 꿰뚫고 있구나, 우리가 정말 ‘우리’에 걸맞은 사이였구나, 같은 깨달음을 공유한 새벽이었다.

바스락바스락. 지호가 짐가방 손잡이를 고쳐잡았다.

탁-

차에서 내린 얼굴이 운전석 쪽을 살폈다. 가벼운 눈인사를 하기에 봉기 역시 슬슬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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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천천히 생각해, 천천히. 우리 정말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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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다음 생에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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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인마! 어휴…… 그래 그것도 같이 생각해 보시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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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큭. 얼른 가서 쉬어.”

 
지호가 키득거리며 몸을 돌렸다. 홀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또 묵직한 생각에 발목 잡히지 말라는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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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화요일에 보자.”

 
봉기의 목소리가 남자다운 뒷모습을 향했다. 슬쩍 올라선 손이 흔들흔들. 가벼운 손 인사도 저렇게 멋스러움이 줄줄 흐르는데, 어디 배우를 그만두겠다고. 그가 고개를 저으며 차를 움직였다.

다음 주 화요일은 영화제가 있는 날이었다.

유력 남우주연상 후보였기에 잔뜩 치장할 준비가 끝난 상태. 지겨운 교복과 후줄근한 티셔츠 말고, 정말 작정하고 꾸미면 얼마나 굉장할지. 덤덤한 지호에 비해 오히려 들뜬 건 봉기였다. 꼭 아들 자랑할 생각에 신난 아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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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자신 있는 배우들은 그날 다 왔으면 좋겠다.”

 
‘한 번에 참교육시키게.’ 실실 웃는 그의 발끝에 기분 좋은 힘이 실렸다.

***

띠. 띠. 띠. 띠. 철커덕-

귀여운 비밀번호와 함께 묵직한 문이 열린다. 막힘없이 올라온 제일 꼭대기 층. 잠만 자다가 나가도 집이란 건지.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음이 편했다. 거의 한 달을 비운 집은, 어둠과 고요가 치열하게 싸우는 것 같았다.

서로 내가 이 집의 주인이라면서.

물론 둘 중 누가 이겨도 어색하지 않았다. 분명 그럴 것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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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쩌면 승자는 따로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 지호의 발이 중문 앞에서 뚝 멈췄다. 작디작은 신발 한 켤레 앞에서. 가지런히 놓인 운동화였다.

순간 피로를 걷어찬 발이 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다이닝룸, 서재. 온통 어둠뿐이었기에 점점 기대는 한 곳으로 좁혀지고 있었다. 그리고 침실 문을 열었을 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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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좋으면 감탄도 나오지 않나 보다. 침대의 이불이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문을 등진 뒷모습이 이불 속에서 동글동글. 배게 위에 스르륵 흩날린 갈색 머리카락.

지호가 침대 위에서 무릎으로 걸었다. 외투를 벗을 생각도 못 한 채 엉금엉금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비로소 하얀 얼굴이 보인다. 천사 같은 여자가.

쌔근쌔근. 작은 숨소리만으로도 큰 집을 점령한 무시무시한 어둠과 고요를 달래는 듯했다. 이 집의 주인은 빛이라고.

지호가 단번에 그 몸을 껴안았다. 푹. 이불 안에 갇혀 있던 향기가 그의 온몸으로 쏟아지는 순간, 혜윤에게도 찬 공기가 닿은 모양이었다. 겨우 들어 올린 눈꺼풀 밑으로 잠에 흠뻑 취한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을 순서 없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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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 자고 기다리려고…… 눈이 막…….”

 
웅얼웅얼. 선명하지 않은 말들이 무엇보다 선명한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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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게 해 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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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알아, 알아.”

 
지호의 얼굴에 미소가 둥둥 떠다녔다. 혜윤이 다시 잠으로 빠져들자 그 역시 몸을 일으켰다. 대충 샤워를 끝내고 얼른 돌아올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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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크리스마스 선물이네.”

 
외투를 벗는 지호의 얼굴에 애정이 만연했다.

***

햇살이 빼곡한 방. 천천히 떠진 지호의 눈이 시계에 닿았다. 12시가 다 된 시간. 모처럼 깊은 잠을 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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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그 기분 좋은 나른함이 와작 부서진 건 찰나였다. 손을 뻗은 옆자리에 아무도 없었기에. 눈마저 텅 빈 침대를 확인하자 몸이 번쩍 일으켜졌다. 샤워실에서도 아무 소리가 없으니 뭘까 싶은데.

문득 떠오른 크리스마스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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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아침에 눈을 딱 떴는데, 옆에 내가 없는 거야. 분명 둘 다 늦잠 자고 일어나기로 했는데.]’

 
지호가 천천히 방을 나섰다. 오늘은 이브지만, 작은 여자는 항상 기대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쥐여주려고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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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갔지? 놀라서 거실로 나가보니까 요리 중인 거죠. 대충 말고, 지호 씨 따뜻한 음식 먹이고 싶어서.]

 
슥슥. 슬리퍼가 내는 소리에도 설렘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다이닝룸 앞에서 멈추고야 만다. 어여쁜 뒷모습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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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는 맛없기 힘들지.”

 
지호는 빤히 그 뒷모습을 지켜봤다. 요리하는 여자를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이전에 제 옷과는 달리 몸에 꼭 맞는 잠옷이 앙증맞았다. 조그마한 혼잣말로 스스로를 격려하는 얼굴은 안 봐도 훤했다.

말도 못 하게 귀엽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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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오일을 넉넉하게 부어…… 넉넉하게? 얼마나 넉넉하게?”

 
그러다 살짝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지호가 바로 입술을 맞물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혜윤은 핸드폰에 적힌 레시피와 슬슬 싸울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 얼굴 역시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얼마나 입술이 볼록 튀어나와 있을지.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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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닝 역시 넉넉하게…… 또 넉넉하게? 우와, 이분 넉넉한 거 되게 좋아하신다.”

 
그랬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슥슥. 슬리퍼 소리가 점점 혜윤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기척에 혜윤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며칠 만에 마주한 지호는 언제나처럼 멋있었다. 매번 멋있는데, 매번 익숙해지지 못해 두근거렸다. 많이 반갑고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보송보송한 얼굴 곳곳에 보드랍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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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잘 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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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싱긋 웃은 혜윤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녀의 손이 올리브오일을 쥐는 것과 동시에 지호 역시 귀여운 뒷모습을 꼭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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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나 있어서 놀랐죠? 그런데 자정 넘었으니까 내일 맞잖…….”

 
맑은 목소리가 뚝. 동시에 올리브오일을 기울이던 손도 멈춘다.

혜윤이 눈을 크게 키웠다. 큰 손이 빠르게 옷 속으로 파고들었기에. 그와 동시에 목뒤로 부드럽고 말캉한 살이 느껴졌다.

배를 간지럽히는 손과 함께 뜨거운 숨결이 점점 앞으로. 앞으로. 쇄골 쪽을 향하고 있었다.

입술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습하고 야릇한 감각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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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이러면 아침 못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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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중에 먹으면 안 되나? 나 되게 오래 참았는데.”

 
배 위를 지분거리던 손끝에 힘이 훅 실린다. 혜윤은 등 뒤로 바짝 밀착되는 몸에서, 아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손은 쉬지 않고 움직여댔다. 조금씩 조금씩. 위로. 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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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방에서 이제 나왔으면서…… 다시 들어가자고요?”

 
혜윤이 서둘러 올리브오일을 내려놓았다. 이상한 감각이 몰아치는 통에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기에. 그러고는 빠르게 지호를 마주했다. 몸을 돌리면 어쨌든 손을 멈출 테니까.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발그스름하게 물든 뺨을 보인 것이. 여리여리하게 일렁인 눈빛을 들킨 것이. 지호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고개를 기울였다. 가까워진 두 입술 사이에 1cm의 틈. 그 틈으로 남자의 욕망이 느물느물 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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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기도 괜찮고.”

 
습기로 진득한 목소리가 곧 혜윤의 입술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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