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그 말은 하지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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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그 말은 하지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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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그 말은 하지 말지
2023.02.26.
도톰한 두 입술이 폭신하게 닿았다. 천천히 머금은 것 같지만 입 안에선 남자의 뜨거운 욕망이 연약한 살을 끈적하게 옭아맸다. 손 또한 다르지 않았다. 살살 쓰다듬는 듯 달래면서도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는 집요하게 굴기도 했다.
이젠 어디를 어떻게 매만졌을 때 그녀가 특별한 감상을 보이는지 알 것 같았기에. 역시나 예상대로, 찰나의 손길에 혜윤이 흠칫거리며 몸을 떨었다.
“하아…….”
곧장 작은 손이 단단한 가슴을 빠르게 밀어냈다. 살결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에 스스로도 많이 놀란 듯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선연한 건 갈색 눈망울에 서린 감정들이었다.
낯설지만 조금 더 가보고 싶은. 어쩌면, 반가운.
그래서 더 몰고야 만다. 쉴 틈 없이 달라붙은 입술처럼, 손끝의 움직임이 이전과는 달랐다. 사소한 자극에도 놀라고야 마는 곳들을 노골적으로 끈질기게 어루만졌다. 밀어내려 할수록 더. 몸의 떨림이 격해질수록 더. 더.
그러다 대뜸, 부드럽게 놓아주자 스르르 눈을 뜨는 혜윤이 보였다. 얇게 벌어진 입술 새로 쌕쌕. 작은 호흡이 그녀의 눈 만큼이나 촉촉해져 있었다. 빤히 올려다보는 시선이 참을 수 없이 요염했다.
지호가 제 티셔츠를 들쳤다. 신경질적으로 옷을 벗으려던 몸짓이 멈춘 건 혜윤 때문이었다. 가녀린 손과 흐물흐물 녹아내린 목소리 때문에.
“방에 가서.”
그가 대답 대신 혜윤을 서 있는 그대로 안아 들었다. 양손으로 가볍게 받쳐 들자 혜윤도 팔과 다리로 지호의 몸에 매달렸다. 걸음마다 농밀하게 바뀌는 입맞춤에 혜윤이 움찔거리며 그의 목을 더 꼭 껴안았다.
지호가 침실을 두 걸음 앞둔 곳에서 살짝 입술을 뗐다. 긴장한 게 너무 보여서 조금은 마음을 놓게 해 주고 싶었다. 옅은 장난을 비췄지만 열기에 휩싸인 남자의 눈빛이 뇌쇄적이었다. 눈빛만큼이나 목소리는 더욱.
“오늘은 그 말 안 하네?”
“……무슨 말?”
“우리 지호 큰일이라는 말.”
쌕쌕. 질문을 끝낸 입술이 닫힐 줄을 모르고 여린 호흡을 뱉어냈다. 그 작은 틈조차 참기 힘들지 싶은데, 순식간에 붉은 입술이 지호에게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귓가에. 말랑한 입술이 그의 귀에 쪽 붙자, 혜윤을 받쳐 든 손끝에 힘이 확 쏟아졌다.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도 그와 동시였다. 숨소리 같은 속삭임 때문에.
“……나도 빨리 안고 싶으니까.”
솜털이 전부 곤두서는 느낌. 그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그 틈으로 이젠 어찌할 수 없는 정염이 터졌다.
“아…… 그 말은 하지 말지.”
“응?”
“방금 진짜 큰일 난 것 같다.”
그러고는 빠르게 침실로 들어갔다. 혜윤은 그 말의 의미를 몸으로 헤아릴 수 있었다. 꽤나 오래. 해가 질 때까지.
***
지호가 제 품 안에 폭 들어와 있는 혜윤을 어루만졌다. 머릿결을 쓰다듬다가 천천히 그 끝에 닿은 살결로 손길이 번진다. 화가가 된 양 그림을 그리듯 움직였다. 손끝이 따뜻하고 조심스러웠다.
조금 전까지와는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슨하게 힘을 뺀 손가락이 곡선을 따라 보드랍게 움직였다. 그러다 보면 또 어느 결에서 혜윤의 가는 솜털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가 또 한 번 힘이 들어가려던 제 몸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방 한가득 드리운 어둠만 봐도 너무 욕심을 부렸지 싶었다. 그리고 그 정도 반성으로는 부족한 건지, 혜윤이 제 품에서 빼꼼 고개를 들었다.
뭘 저렇게까지 간절하게 보나 싶었다. 저렇게까지 예쁠 일인가도 싶었는데.
“나…… 배고파요.”
너무나 순수한 본능 앞에서 웃음이 터졌다.
“큭큭. 배고프면 안 되지. 이제 진짜 밥 먹자.”
“응. 그런데…… 요리할 힘이 없다.”
“내가 할게. 아까 뭐 보면서 만들던데, 줘 봐요.”
“핸드폰, 고기 옆에 있을 텐데.”
방긋 웃을 힘도 없을 만큼 허기진 것 같았다. 시무룩한 표정이 귀여워 조금 더 말을 걸었지만 몇 마디가 전부였다. 지호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빨리 맛있는 걸 먹여야지 싶었다.
“쉬고 있어요. 다 되면 부를 테니까.”
세워진 그의 상체를 따라 이불이 스르륵 떨어진다. 혜윤은 옆자리에 누워 지호를 올려봤다. 완만하고 넓은 호선, 그 낮은 언덕 같은 근육들을 쭉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움푹 그림자가 그어놓은 근육의 경계들이 선명했다.
역시 보면서도 믿기 힘든 몸매였다. 부끄럽지만 너무 붙어 있어서 오히려 볼 틈이 없었다. 제게 등을 지고 옷을 챙겨입는 뒷모습도 탄탄함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러다 눈에 띈 어깨맡의 손톱자국. 정말 정말 상처 남기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손톱으로 할퀴어진 붉은 선 두 개에 신경이 꽂혔다.
그 흔적들이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기도 했다. 이렇게 멋진 남자와 오늘 온종일 무얼 했는지. 선처럼 선명한 통증과 붉은 자국처럼 번진 흥분들. 떠오르는 장면마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작 진짜 목소리를 내는 지호의 질문도 듣지 못한 채, 혜윤의 귓가엔 그런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눅진하게 땀이 밴 몸들이 부딪히는.
“핸드폰 잠겨 있어요?”
“으앗!”
혜윤이 베개에 얼굴을 콩 파묻는다. 얼굴이 새빨갛게 익을 것 같았다. 대답 없는 뒤통수를 향해 지호가 실긋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나른한 웃음이 피어나는 건 참 빨랐다.
뒤통수에도 표정이 있는 여자였기에. ‘나 지금 엄청 부끄러워요!’가 너무 잘 읽혀서.
“큭큭. 또 뭔데. 이상한 생각 했구나?”
“…….”
“대답 안 하는 거 보니까 맞네.”
잘 읽히는데 거짓말도 안 한다. 베개에 묻어놓은 얼굴은 꿈쩍하지도 않은 채 살며시 든 손을 휘휘 저을 뿐이었다. 어서 가라고.
이렇게까지 귀여울 필요는 없는데.
옷을 다 챙겨입은 그가 부끄러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응. 그런 생각 자주 좀 해요. 난 좋으니까.”
아쉬움이 남은 손이 ‘딱 한 번만 더.’를 두 번 반복하고 나서야 작은 머리에서 손을 뗐다.
“핸드폰 잠겨 있으면 레시피 못 보는데.”
“비밀번호 0100.”
안 부끄러운 질문은 또 이렇게 대답이 빠르니, 더 귀엽고.
“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번호네.”
지호가 기분 좋게 방을 나섰다.
다이닝룸에 도착해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조리대 위에 놓인 고기의 양이 상당했기에. 손은 눈송이처럼 작고 가녀리면서, 항상 누구 줄 생각만 하면 들뜬 손가락 끝이 폴폴 날아다니나 보다.
핸드폰에 쪼르르 적어둔 레시피를 따라 그 역시 착실하게 움직였다. 고기에 올리브유를 넉넉히 부어 앞뒤로 골고루 발라주고.
“시즈닝 역시 넉넉하게 뿌린 뒤 한나절 정도 숙성해 주시면…….”
그리고 오늘 오전, 혜윤이 막혔던 부분에서 지호 역시 읊조림을 멈췄다. 물론 이유는 달랐다. 혜윤은 ‘넉넉하게’라는 표현이 주는 애매함이 문제였고, 그는.
“방에 들어가기 전에 했어야 됐네.”
‘한나절’이라는 시간 때문이었다. ‘바로 구워도 되지만…….’ 같은 뒤 문장이 이어지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손을 움직였다. 마늘과 아스파라거스, 파프리카, 양송이버섯을 큼직하게 잘라서 팬에 올리고, 기름을 두르고.
인덕션에 뜨거운 열을 지피려던 순간, 등 뒤로 누군가가 찰싹 달라붙었다. 꿀처럼.
턱을 낮추자 배 위에서 열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가슴을 간지럽히려 들었다. 앙증맞은 재촉과 함께.
“……나 수명이 30분 남았어요.”
“큭큭. 그 안에 끝나. 조금만 기다려요.”
쓰러질 것 같이 작은 목소리를 내더니 금세 또 키드득키드득. 등을 타고 전해지는 웃음이 좋았다. 달궈진 팬이 지글지글 소리를 냈다. 고소한 냄새와 야채 익는 소리가 식욕을 자극할 때, 지호가 꼬물거리는 열 손가락을 한 손으로 덮는다.
“기름 튀겠다. 뜨거우면 손 뒤로 빼요.”
혜윤은 바로 지금, 이 한마디에 담긴 사랑이 크리스마스 선물 같았다.
***
혜윤이 빵빵하게 채워진 몸을 소파에 털썩 기댔다. 샤워까지 끝낸 몸 위에 몸살 같은 피로가 쿵쿵 내려앉았다. 가슴이 느끼는 행복만큼 피곤함의 크기도 컸다.
‘와,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드라마 방송을 해요?’
‘그러게. 안 밀렸네. 아마 다음 주에 불방될까 봐 그런 것 같아요.’
‘다음 주?’
‘응. 말일에는 다들 시상식 하니까. 드라마 안 하지.’
지호는 또 다른 샤워실에서 아직인 듯했다. 드라마 시작이 10분도 더 남아 있었기에, 그녀의 손이 옆 채널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어느 채널에서 멈춰버린 이유는 하나다.
누군지 몰라도 참 예뻐 보여서.
TV 속에서는 예쁜 여자가 예쁜 목소리로 인터뷰에 한창이었다. 그 목소리가 안 반가운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지만.
“희율 씨가 오래전부터 한 남자만 바라보셨다고 들었어요. 안지호 배우가 이상형이시라고.”
“네! 저 정말…….”
“어머! 뭐예요. 진정하세요. 질문 하나 드렸을 뿐인데, 너무 좋아하신다.”
진심을 전하는 얼굴은 누구라도 빛을 뿜는다. 원래도 고운 얼굴이 지호의 이름만으로 반짝거렸다. 조금 더 보고 싶기도 한데, 지호가 함께 보는 걸 상상하면 샘나고.
얼굴을 찡그리던 혜윤이 채널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흠, 누구지?”
샤워를 끝낸 지호가 화면을 기웃댔다. 그가 소파 옆자리에 앉자, 똑같은 바디워시 향이 팡 터져 나왔다. 더불어 TV 속 여자에게 똑같은 관심까지 보이며.
혜윤의 턱이 천천히 올라갔다. 못마땅한 얼굴로 하얗게 눈을 흘기는 것에 온 힘을 쏟는 듯했다. 가만 놔두면, 아마 스테이크로 늘어난 수명을 여기에 다 써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누군지 안 가르쳐 줄 거예요.”
“작가님도 모르는 것 같은데?”
잠깐 흔들리기도 한다.
“……맞아요.”
“그럼 둘 다 모르면 되겠다.”
키득거리던 지호가 리모컨을 빼앗아 들었다. 옆 채널에서는 <23센티미터>가 시작을 위해 긴 광고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소리를 키우는데 뺨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눈빛. 곁눈으로 본 혜윤이 아주 흡족한 얼굴로 저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래서 또 한 번 웃음이 났다. 지호는 지난 3년 동안, 이 집에서 이렇게나 많이 웃어본 적이 없던 것 같았다.
드라마가 시작되자 두 사람은 넓은 소파에 누웠다. 지호는 홀로 연기하는 혜윤을 눈에 담았다.
지금 제 팔을 베고 누워 있는 여자는 화면 속 희수와는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더더군다나 연기를 업으로 해왔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목소리에 좋고 싫은 속내가 비등비등 섞여 있었다.
“배우 할 생각은 없어요? 글도 잘 쓰지만 연기도 잘하는 것 같아서.”
“네. 전혀.”
그리고 재빠르게 이어진 답에는 오롯이 기분 좋은 진심만 가득했다.
“단호해서 좋다.”
“큭큭. 이런 대답 기다린 거죠?”
“응. 싫으니까.”
지호가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며 웃는 몸을 가볍게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