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재연
(8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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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재연
2023.03.05.
화요일 저녁 7시. 봉기는 운전하는 내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신호만 멈추면 눈이 룸미러로 척척 달라붙기 바빴다. 룸미러 속 뒷자리 남자의 얼굴에.
블랙수트 위에 작정하고 가꾼 지호의 얼굴은 경탄을 자아냈다.
‘미치겠네. 잘생겼다, 잘생겼다 하니까 아주…… 끝을 모르지?’
올라붙으려는 입꼬리를 애써 꾹꾹 눌렀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고 있을 뿐이다. 아마 저 얼굴로 수상소감을 말하기라도 한다면, 며칠 늦었지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것 같았다.
지호는 간간이 스타일리스트의 손길을 받으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대하는 봉기와 달리, 이미 그 선물을 받은 지호는 다시 한번 행복의 여운을 되새기고 있었다.
***
3일 전, 크리스마스는 이전의 동화와 거의 똑같이 재연됐다. 조금 달라져서, 조금 더 좋았지만.
그날의 기억은 화들짝 잠에서 깨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나 작았는데, 말도 안 되게 가까웠다. 귀에 입술을 꾹 붙이고 속삭였으니 그럴 수밖에.
고막으로 미세한 숨소리가 전해지자 머리카락까지 전부 꼿꼿하게 일어서는 느낌이었다.
‘지호야, 밥 먹자.’
‘와, 깜짝이야…….’
‘큭큭. 일어나야죠.’
번쩍 뜨인 눈앞에는 혜윤이 이제 막 상체를 들고 있었다. 제 머리맡에 걸터앉은 채로. 배시시 웃더니 손가락을 뻗어 그의 머릿결을 정리하기도 했다.
자신 만큼이나 혜윤도 아는 듯했다. 상대가 어디를 어떤 방식으로 다룰 때, 특별히 예민하게 구는지. 종종 귓속말을 즐길 것 같은 장난꾸러기의 표정이었다. 오히려 좋았다. 예민하게 만들면 뒷감당이야 같이하게 될 테니까.
대충 씻고 방문을 열었을 땐, 좀 더 크게 놀라기도 했다. 집 안에 꽉 들어찬 맛있는 냄새 때문에. 다이닝룸에 들어서자 식탁 위에 정갈하게 차려놓은 음식들이 눈길을 끌었다. 흰 쌀밥과 된장찌개, 생선구이, 김치와 또 다른 반찬들 여러 개.
그리고 제일 감동적인 건 당연히, 식탁 옆에 서 있는 여자의 눈빛이었다.
‘이걸 언제 다 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잠도 못 잤겠네. 이렇게까지 안 해 줘도 돼요. 나 음식에 까탈 안 떨어.’
‘아니 아니. 그거 말고.’
‘응?’
기대가 한껏 차오른 얼굴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했다. ‘얼른얼른, 좋아해 줘!’라고 온몸이 뿜어내는 명랑한 기운 또한.
‘진심으로 감동받았어요.’
‘그래서? 행복하고?’
‘말해 뭐 해. 너무 행복하지…….’
이 말이 듣고 싶었나 보다. 말이 끝나자마자 신나서 폴짝폴짝, 의자를 빼주는 혜윤이었다. 한 입을 뜰 때마다 초롱초롱 쏟아지는 집중. 묻기도 전에 맛있다고 했을 땐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보였다.
‘빨리 같이 먹어요.’라는 말에 잠깐 수저를 들다가도, 조금 이따가 보면 제 얼굴만 살피고 있었다. 진짜 맛있게 먹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만 보고, 얼른.’
‘응.’
대답만 잘하지. 2분 뒤엔 또다시 몰래몰래. 힐끔힐끔. 눈만 마주치면 안 본 척하며 잽싸게 밥그릇에 코를 박고 있었다.
저렇게 귀여운 속임수는 어디서 배웠을까.
물론 종일 웃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밥을 먹은 뒤 영화를 볼 땐, 살짝 화가 나기도 했다. 정확히는 질투가. 혜윤이 보겠다고 고른 영화가 전날부터 풀리기 시작한 차도혁의 새 영화였기에.
생각지도 못한 선택에 마음이 끓어올랐다.
‘진짜 그날…… 둘이 뭐 있구나?’
‘큭큭. 약속한 건 지켜야죠. 이번 영화 꼭 보겠다고 했거든요.’
‘……약속했다고?’
순간 혀끝이 한쪽 볼을 꾹 찔렀다. 이마에 핏줄이 솟는 느낌이었다. 되묻는 말투에 담긴 뜨거운 분노.
장난인 줄 알았는지 혜윤은 제 얼굴을 재미있게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또 눈 속엔 별이 반짝반짝. 소파를 탕탕 두드리는 손짓 위로 작은 몸은 또 새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얼른얼른, 나 안아줘야지!’ 같은.
속도 없이 바로 팔베개를 내어주고는 영화를 봤다. 아침 식사 때의 혜윤이 된 것처럼, 그 역시 영화 말고 혜윤의 얼굴만 살폈다. 어떤 감정으로 영화를 보는지 알고 싶어서. 그녀 또한 아침 식사 때의 지호처럼, 쉽게 눈치챘지만.
‘어어, 우리 지호 영화 안 보나 본데?
‘안 보긴. 잘 보고 있어요. 크리스마스에 여자친구가 고른…… 딴 놈 영화.’
그러자 품 안의 혜윤이 뒤돌아 눈을 맞췄다. 정말 삐친 건가 살펴보려는 눈이 그렁그렁했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어제처럼 입술을 쭉 내민다.
대충 애교로 넘어가겠다? 괘씸한 마음에 눈을 흘기자 그녀 역시 콧등에 쪼글쪼글한 주름을 만들었다. 조금 더 힘을 줘 한껏 내민 입술과 함께.
참 나, 저러는데 어떻게 이겨. 결국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꾹 눌렀다.
영화를 보다가, 잠시 낮잠을 자고. 그 뒤에 자신은 동화책을, 혜윤은 동화책 2권에 미리 남겨둔 감상평을 읽었다. 바람도 쐴 겸, 근처에서 맛있는 저녁을 포장해 올 땐 길거리며 도로며 인파가 한가득이었다.
시끌시끌. 근처에 서 있기만 해도 즐거움이 물들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다가갈 순 없었다. 유독 인기가 많아 보이는 음식점은 포장할 엄두도 못 냈고.
깍지 낀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남들 평범하게 다 하는걸, 못 해 주네.’
‘아닌데…… 다 할 거예요. 원래 맛집은 빨간 날에 가는 거 아니지. 평일 오전에 꼭 가요. 사람 없을 때.’
그녀 역시 제 손을 꽉 잡아준 순간은, 잠깐 봄이 왔던 것 같았다.
해는 빠르게 저물었고, 집에 돌아와 저녁도 다 먹은 시간. 부산에서 들려줬던 동화는 여기까지였다. 아, 몇 장면 더 넣을걸. 왜 이렇게 짧게 지어냈을까. 무거워진 아쉬움이 참고 참다 터지고야 말았다.
‘……하루 더 자고 가요.’
‘아…….’
‘내일 약속 있어요? 내가 데려다주면 되잖아.’
한 글자의 탄식에 편치 않은 마음이 느껴졌다. 순간, 저도 모르게 유리창 너머의 한강을 보는 뒷모습을 껴안았다. 얼굴을 타고 내린 달빛이 고여 있는 쇄골. 그곳에 입술을 묻은 것 역시 본능에 가까웠다.
‘가지 마, 응?’
더는 없는 대답과 움찔대는 어깨. 거절하기 미안하게 졸랐구나 싶었다. 내리 이틀을 이곳에서 잤으니, 하루 더는 무리일 수도 있겠지.
그래서, 그 마음을 알겠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려는데.
‘내가 준비한 요리는 두 끼였어요.’
‘……요리?’
‘응. 다른 건 연습 안 해봐서…… 오늘 자면 내일 아침은 라면밖에 못 해줘요.’
‘큭큭. 그것 때문이었어요?’
‘네. 아니면…… 비빔밥?’
자신 없는 목소리가 웅얼웅얼. 뒤에 어떤 말을 더 했던 것 같지만, 그 말들은 듣지 않고 먹어버렸다. 너무 예뻤으니까.
그리고 다음 날에도 아침 식사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하루 더 자고 가면 안 되냐는 말을 참는 건 정말 힘들었다. 육체든 정신이든 참는 데에는 도가 텄건만, 고작 말 한마디를 삼키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 3일은 떠올리기만 해도 입 안에 단맛이 도는 것 같았다.
“야, 뭘 또 그런 표정까지 지어?”
“……어? 뭐라고 했어?”
깊은 행복에 심취해 있던 지호가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룸미러 속에는 자신 만큼이나 행복에 빠진 봉기의 얼굴이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니, 적당히 하라고. 무표정으로 있어도 난리 날 것 같은데 뭘 미소까지.”
“아…….”
지호가 작게 피식거렸다. 동시에 옆자리에 앉은 스타일리스트의 손이 애매한 움직임을 보였다. 주춤주춤, 올 듯 안 올 듯. 자리가 멀지도 않은데 불편한가 싶어, 지호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줬다.
“아, 아니야.”
말투마저 애매했다. 손을 설설 젓기에 지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봤다. 스타일리스트는 그 옆모습을 곰곰이 바라봤다.
‘꾸밀 데가 없는데 뭘 꾸미라는 거야.’ 같은 생각만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 뿐이었다. 사실상 봉기와 같은 감상이었다.
막히지 않은 도로 덕분에 지호는 예상보다 빠르게 영화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정된 좌석으로 가는 길 내내 낯익은 얼굴들을 향해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야, 지호 씨! 이게 얼마 만이에요!”
그리고 일면식을 넘어 언제나 고마움으로 기억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숙인다. 지호가 보폭의 크기를 키웠다.
“와, 감독님. 잘 지내셨죠?”
“응. 그럼 그럼. 이젠 너무 건강해. 그런데 지호 씨는…… 세상에, 그 얼굴에서 더 잘생겨질 수도 있는 거였어요?
“큭큭. 꾸며서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감독님, 말씀 낮추세요.”
18살. 어영부영 두 편의 드라마를 끝낸 뒤, 처음으로 영화판에 들어섰을 때 함께한 감독님이었다.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해서인지 어린 제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했던 고마운 사람.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이 비슷했던 기억이다. ‘아들 같아서 그래.’ 같은 따스한 말.
‘내가 장담하는데, 지호 씨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거야. 두고 봐라? 지금 인기는 진짜 별거 아녔구나, 싶은 날이 온다니까.’
호탕하게 웃으며 했던 그의 장담이 10년도 안 돼 모두 현실이 되어 있었다. 데뷔 영화 이후 다음을 기약했지만 성사되진 않았다. 건강이 안 좋아 한동안 일을 안 하셨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그가 5년 만에 만든 영화가 작품상 후보에 올라 있었다. 유력 수상 후보라는 소식에 지호 역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자신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조금 전의 큼지막한 웃음소리가 거짓말인 듯 감독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손등으로 입을 가리기에 지호도 함께 고개를 낮췄다.
“내가 볼 땐 오늘 남우주연상 무조건 지호 씨야. 적수가 없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후보 오른 것만 해도 충분해요.”
“월드 스타 됐어도 성격 여전하네, 지호 씨는.”
감독의 목소리에 뿌듯함이 들렸다. 지호를 찬찬히 훑는 눈 속에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벅찬 감정이 여실했다.
“참, 그런데…… 내가 지호 씨한테 보여주고 싶은 시나리오가 있거든.”
지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은 그 조용한 고갯짓을 눈에 담았다. 18살 때에도 나이에 맞지 않게 진중했던 지호였기에, 대답 하나도 허투루 뱉지 않는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대답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괜한 건 하나도 없는 사람.
쓱쓱. 코끝을 문지르는 손 아래로, 감독의 입가에 밴 웃음이 옅어져 간다.
“매니저님께 전하려고 했더니만, 안 받으시더라고. 당분간은 쉴 것 같다고.”
“…….”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한창일 때 일을 안 한다니까 걱정돼서. 그냥 매니저님이 둘러댄 소리였으면 좋겠네.”
감독의 눈 속에 부성애 같은 감정이 끓었다. 그 눈에 비친 지호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