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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수상 소감 (82/110)


81. 수상 소감
2023.03.08.



 
또 다른 지인들과의 인사를 위해, 두 남자는 가벼운 대화를 끝으로 다음을 기약했다.


‘너무 오래 쉬지는 마. 그럼 돌아오는 길이 헷갈리더라고. 헷갈리면 꼭 돌아가야 하나 싶고, 결국엔 가기 싫고.’


‘……그렇군요.’


‘응. 지호 씨 집은 여기야. 내가 알아. 물론 집이라고 늘 좋을 수는 없지만?’


‘큭큭. 그렇죠.’


‘그래. 잘 쉬다가 와. 집주인이 집 오래 비우면…… 알지? 얼토당토않은 놈들이 자기 집인 줄 안다니까?’

 
지호는 조금 전 감독의 눈짓을 떠올렸다. 거드름을 피우며 걸어오는 신인 남배우를 흘기던 눈빛. 인자한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눈매에 피식 웃음이 났다.

‘시나리오는 편하실 때 보내주세요. 원래 여행 갈 때, 제일 아끼는 책 한 권은 챙기잖아요.’라는 끝인사에는 정말 잘 어울리는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너그럽고, 온온한.

곧 길 끝으로 문이 보였다. 저 문 너머의 큰 홀에서 2시간 동안 영화제가 진행될 것이다. 차분한 걸음이 천천히 문을 향했다.


“오우, 지호 씨! 오늘 아주 힘 제대로 줬네요. 상 받겠다는 의지?”

“안녕하세요.”

 
그때 맞은편에서 지호의 앞을 막은 중년의 남자. 지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잠깐 가만히 머리를 굴리기도 했다. 누구더라, 하고.

그리고 고개를 들 때쯤엔 대충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감독과의 대화를 곱씹게 하는 사람이었다. ‘얼토당토않은 놈들이 자기 집인 줄 안다니까?’의 그 얼토당토않은 쪽.

그 역시 감독이었다. 운 좋게 데뷔작이 인기를 끌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십여 년을 줄줄이 망한 건 운이 아니라 실력의 문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여기저기 잘 묻어가는 성격 탓이겠지. 친하지도 않은 제게 껄렁껄렁 말을 거는 것처럼.

누구를 진심으로 응원해 줄 성격 같지는 않았으니, 분명 대리 수상의 자격으로 참석한 듯싶었다. 미안하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영화제에서 볼일은 없는 사람 같아서.


“이번 영화 너무 잘 봤어요. 맞다, 나 요즘 드라마도 매주 봐. 뭐…… 워낙에 시작 전부터 시끌시끌했으니까. 다들 챙겨보겠지만?”

“감사합니다.”

 
거만스러운 말투만큼이나 시끄러운 목소리였다. 지호를 몰래 힐끔거리던 사람들에겐 반가울지도 몰랐다. 거슬린다는 듯 한 번 더 쳐다볼 수 있었으니까.

그 순간 감독이 지호의 뒤를 향해 고개를 까딱 숙였다. 봉기가 빠르게 다가오며 눈인사했다. 영화 인사들에게 예의를 보이고 이제야 지호와 합류하는 것이었다.


“지호야, 들어가야지.”

“응.”

“그럼 저희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매니저님. 오늘 좋은 결과 기대할게요.”

 
봉기가 지호보다 한발 앞서 그의 걸음을 이끌었다. 다시 한번 짧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봉기의 머릿속엔 떨떠름한 생각뿐이었다.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네.’

 
그래봤자 크게 볼 일은 없는 인물이었기에. 봉기도 그뿐이라 생각하고 말려던 참이었다. 봉기를 따라 지호가 감독의 옆을 스쳐 지날 때였다.


“아! 맞다!”

 
대뜸 큰 목청이 두 사람 발길을 잡아챈 것이.


“그런데 장혜윤 씨는 차기작 준비 안 하는 건가?”

 
익숙한 이름에 봉기와 지호 모두 몸의 방향을 틀어버린다. 지호의 얼굴엔 이렇다 할 감정이 없었다. 그저 바라만 볼 뿐. 오히려 봉기의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움찔댔다.

두 사람 모두 감독에게 시선을 줬지만, 감독은 한 사람의 눈길이면 충분한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이 지호와 얽힌다.


“데뷔야 지호 씨 버프 받았다고 쳐도, 남자친구 이름 파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안 그래요?”

 
봉기가 가증스러운 웃음을 지켜보다 빠르게 지호를 살폈다. 지호의 얼굴엔 희미하게 미소만 흐를 뿐이었다. 다시 감독을 보자 그의 콧구멍이 새 이야기들을 꺼낼 생각으로 벌름거리고 있었다.


‘눈치 없는 놈은 또 저렇게 입만 놀리려 들지.’

 
지켜보는 봉기의 눈이 불안으로 흔들렸다.


“나 다음 달 초에 새 작품 들어가거든요. 여배우들 오디션 보려고 하는데.”

“……그러시구나.”

“네. 관심 있으면 시나리오 드릴까? 나이는 있어도…… 얼굴은 어려 보이던데? 은근 귀엽고.”

 
지호는 여전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러다 슬쩍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느리게 끄덕. 또 끄덕. 그건 분명 차가운 재촉이었다. ‘더 해 봐.’ 같은.


‘하지 마! 하지 마! 하란다고 하냐!’

 
내지를 수 없는 속마음이 봉기의 두 눈 속에서 버럭버럭 고함을 쳤다. 눈빛으로 그렇게도 애원했건만, 밉살스러운 입은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알아보니까 컨택을 안 받는다길래 재밌더라고요. 생판 신인 주제에 너무 지호 씨만 믿고 있는 거 아닌가?”

“…….”

“아, 기분 나빠하진 말고요.”

 
그리고 시치미를 뚝 떼며 발을 빼려던 감독을, 그제야 지호가 붙잡았다.


“……어떡하죠. 기분이 많이 나빠졌는데.”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어렴풋한 미소는 그대로인데 목소리가 냉정할 뿐이었다. 그 목소리가 더해지는 순간, 미소마저 달리 보이긴 했지만.

발끝에서부터 냉기가 기어 올라오는 느낌. 봉기와 감독은 비슷하게 놀랐고 주변 사람들 역시 걷는 둥 마는 둥 지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지호의 입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표현이 낯설었기에 더 그랬다.


“아…… 미안해요. 내가 말실수를 했네.”

 
감독이 바짝 얼어붙은 마음을 애써 감추려 들었다. 태연한 척 가볍게 사과의 말을 던졌다. 알 수 없는 공포가 일었지만 십여 명의 관심이 이곳에 꽂혀 있었기에, 자존심은 지켜야 했다.

그래서 대충 퇴장하려는데.


“나이는 있어도 생각은 어려 보이시네요.”

“네?”

 
지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막는다. 받기만 하면 예의가 아니니까.


“작품 하나 터진 버프 받았다고 쳐도, 십 년 넘게 그 작품명만 파는 것도 한두 번이지.”

“……뭐?”

“죄송해요. 저는 말실수가 아니라서.”

“하…… 참 나.”

 
이제 주변의 모든 사람은 작정한 듯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봉기는 그저 그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손짓했다. ‘가시면 됩니다.’ 같은 몸의 언어로.

지호를 말리면 더는 관심받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의미 없는 곳에 힘을 쏟고 싶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시작 안 하는 놈이 시작했을 땐, 끝내는 순간도 자기가 결정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예상과 맞아떨어지는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더 이상 누구의 눈에도 나긋해 보이지 않는 미소와 함께.


“하실 말씀 있으면 더 하세요. 새끼가 여자친구 얘기 좀 했다고 건방 떨더니만 쫄아서 자리 피하더라…… 이런 말은 안 나왔으면 싶어서요.”

“…….”

 
가볍게 찡긋거린 미간이 감독을 향한다. 조금 전과 같은 재촉이었다. ‘더 해 봐.’ 같은.

그리고 말 없는 시간이 10초쯤 지났다. 그 시간 동안 감독은 가볍게 일던 공포에 완벽히 압도당했다. 발밑에서 치근대던 냉기는 이제 정수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지호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5초가 더 지나고서야 감독의 눈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지호가 천천히 입을 연 것도 그때쯤이었다.


“없으면…… 먼저 가시고.”

 
그때쯤엔 지호의 얼굴에 어떤 미소도 없었다. 목소리 또한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서늘했다. 마지막은 늘 기억에 남아야 하는 법이라, 그래야 정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거니까. 본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멀리 사라지는 뒷모습. 답답한 척 구시렁대면서도 걸음이 꽤 빨랐다. 이 공간을 어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이. 그 모습이 완벽히 사라지고 나서야 주위 사람들도 관심을 거둬들였다.

봉기와 지호도 다시 발을 움직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에 먼저 말문을 연 건 봉기였다. 의외의 속내와 함께.


“잘했어. 뭣도 아닌 게 시건방이야…….”

“큭큭. 무슨 매니저가 이래.”

 
굳어 있던 지호의 표정이 단숨에 풀려버렸다.

두 사람은 웃으며 홀에 들어섰다. 자리로 향하는 건 지호 홀로였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이 발걸음 소리를 모두 삼켜버린 공간. 소리가 없는 곳엔 눈부신 조명, 그보다 더 눈부신 얼굴들만 가득했다.

그중에도 압도적인 빛의 등장이었으니, 모두의 시선이 지호의 걸음과 함께 움직였다.


“지호 선배님, 안녕하세요. 실제로 처음 뵙는 것 같아요.”

 
그 많은 시선과 지호의 걸음이 동시에 멈춘 건, 어느 여배우의 등장 때문이었다. 육감적인 몸매가 한껏 드러난 드레스. 그 위에 얼핏 봐도 어린 티가 나는 곱상한 외모였다.

지호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몇 분 전에 했던 똑같은 행동, 똑같은 생각이었다. 누구더라, 같은. 대신 이번에는 고개를 들 때까지도 알아낼 수 없었다. 어린 티가 나는 것도 그렇고, 아마 신인 여배우겠거니 했다.

그리고 예의를 보인 뒤, 다시 걸음을 이으려 했지만.


“혹시…… 연락처 알 수 있을까요? 돌려 말하는 것 보다 그냥.”

“죄송합니다.”

“아…… 나중에 작품으로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꼭 사적인 것만이 아니더라도.”

 
지호는 다시 한번 고개를 까딱 숙였다. 그러고는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거절할 확률이 높다는 건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민망한 모양이었다. 여배우가 재빨리 자리를 옮기고야 만다.


“이야, 나 오늘 안지호한테 저러는 애들 여럿 본다?”

“쟤 말고 또 있어요?”

 
그리고 조금 더 먼 곳에서 두 여배우가 흥미롭다는 듯 속삭임을 이었다. 위아래로 깊게 파인 드레스 때문에 살짝 고개를 숙이고, 은근히 다리를 꼬는 모든 행동이 관능적이었다.


“응. 아까 복도에서 한 명, 복도 들어서는 입구에서 한 명. 안지호 별명 모르나?”

“요즘은 어떤 줄 아세요? 어차피 ‘죄송합니다’는 무조건이니까. 몇 초 만에 나오는지를 따진다니까요? 3초 넘기면 자기들끼리 인정해 준대요. 부러워하고.”

 
두 여배우가 작게 키드득거렸다. 또 새롭게 홀에 들어서는 배우를 훑으며 ‘저 드레스 내가 깐 건데.’라거나 ‘가슴 너무 모았네.’ 같은 평가도 이어졌다.

그러다 힐긋 보게 된 지호의 뒷모습. 남배우들이야 거의 블랙수트였기에 비슷비슷했지만, 지호는 예외였다.

‘운동을 얼마나 하면 어깨가 저렇게 넓지?’, 같은 감탄이 절로 터졌다. 아차 싶어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자, 옆 사람도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쪽으로 눈이 가는 건, 남자든 여자든 본능이었다.


“그런데 장혜윤은…… 뭐 알려진 게 하나도 없던데요?”

“내가 들은 게 있지. 이게 안지호 회사에서, 하다못해 칭찬 기사도 다 막는 거래. 방어가 장난 아니야.”

“왜 좋은 기사도 막아요? 무슨 생각이지? 연기 안 할 생각인가?”

“확실한 건 아닌데…… 아, 아니다.”

“아, 뭔데! 궁금해요.”

 
지호를 담던 눈이 빠르게 옆자리로 향한다. 가녀린 두 몸이 바짝 붙은 뒤에야 말이 들렸다. 자칫 옆 사람도 안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얼핏 듣기로는…… 둘이 적당한 때 봐서 결별 기사 낼 거래. 애초에 사귀는 것도 아니었고.”

“진짜?”

“응. 그래서 장혜윤은 언론 전부 차단, 안지호는 장혜윤 언급 일절 사절. 이런 거라고.”

 
비밀이라며 속닥속닥. 두 여배우는 비장하게 결의했지만 그 약속은 2시간 만에 사라지고야 만다.

***



“뭐예요. 완전 사귀는 사이구만.”

“……그러게. 최 기자가 고급 정보라고 알려준 건데. 고급 좋아하네.”

 
2시간 뒤. 그녀들의 약속이 허무하게 사라진 순간에 SNS를 도배한 단어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영화제, 안지호, 안지호 수트핏, 안지호 남우주연상, 안지호 수상소감.

지호의 수상이 막 끝났을 때였기에, 인터넷에는 그의 수상소감 영상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항상 응원해 주시는 우리 가족들과 가족이나 다름없는 봉기 형에게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장혜윤 씨께도 고맙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관심을 받은 단어는 3개였다. 장혜윤, 안지호 장혜윤, 마지막으로.


“앞으로…… 101걸음은 꼭 같이 걸었으면 해요.”

 
‘안지호 장혜윤 101걸음’이었다.

전 국민이 101걸음의 의미를 알아내려 애썼지만, 오직 두 사람만 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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