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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외워두세요 (83/110)


82. 외워두세요
2023.03.12.



 
같은 시간, 혜윤 역시 TV 속 지호의 수상에 감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혜윤 씨께도 고맙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101걸음은 꼭 같이 걸었으면 해요.”

 
감격이 놀라움으로, 감동으로 번지는 속도는 참 빨랐다. 동그랗게 벌어진 입이 한동안 굳어 있었다. 뒤늦게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다시 또 스르륵. 입꼬리가 올라붙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축하 메시지를 보내려 핸드폰을 들자, 그곳엔 이미 민주의 메시지가 있었다.


[101걸음? 둘이 같이 산책해? (오후 9:10)]

 
그리고 이제 막 도착한 새 메시지까지.


[와, 인터넷 들어가 봐. 난리야. 101걸음 뜻 알아내려고. (오후 9:15)]

 
답장을 하려던 엄지손가락이 주춤. 일단 지호를 먼저 불러보기로 했다.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벅찬 마음을 빨리 전하고 싶었다.


[우와! 지호 씨, 정말 축하해요! (오후 9:15)]

 
쫑알쫑알, 하고 싶은 말이야 넘쳐났지만 다 털어내 버린다. 지금 제일 하고 싶은 한 마디를 보내놓고, 그의 답장이 오길 기다렸다. 아쉽게도 금방 오진 않았지만.

민주와의 이야기가 잠깐 멈춘 건, 20분 뒤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였다. 우준이었는데 방송이 아닌 기사 제목만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중계는 이미 끝난 뒤였기에.


[그 정도 걸어서는 운동 효과가 없어. 안지호 생각보다 체력이 약하네. (오후 9:40)]

 


“음…… 김우준답다.”

 
대충 키득거리는 답장을 한 뒤 다시 한번 지호에게 보낸 메시지를 열었다. 답을 바라기엔 아직 제 차례는 오지 않은 듯했다. 축하가 무수히 쏟아지고 있겠지.

끄덕여지는 고개와 함께 화면을 벗어나려던 때, 순간 눈앞에서 사라지는 메시지 앞 숫자.


“엇!”

 
Rrrr- Rrrr-

그리고 곧 반짝거리는 지호의 이름. 손안의 진동이 가슴마저 떨리게 했다. 손끝이 꽃잎이라도 된 듯 사뿐히 통화버튼에 내려앉았다.


“와…… 전화 왔다.”

 
목소리도 꽃을 흉내 내고 있었다. 꽃의 곱고 가녀린 떨림을.


-차에 핸드폰을 두고 내려서. 이제 봤어요.

“그렇구나.”

 
그리고 단지 흉내만 냈을 뿐인데 향기를 심어주는 남자였다. 제 차례가 늦어진 게 아니라, 늘 제일 먼저라면서. 혜윤의 콧소리에 기분 좋은 행복이 실렸다. 그리고는 퍼뜩 하고 싶었던 말을 떠올렸다.


“지호 씨, 축하해요! 오늘 정말 정말 진짜 진짜 멋있었어요! 와…… 너무, 응.”

-큭큭. 고마워요. 꾸민 보람이 있네.

 
핸드폰 너머의 다정한 목소리에 몸이 배배 꼬였다. 조금 전까지 TV 화면 속에 있던 지호의 모습을 떠올리면 더 그랬다. 정말 말도 안 되게 멋졌으니까. 그렇게나 눈부신 사람이 오늘 공개적으로 한 말을 생각하면.

그녀의 볼 위에 발그레한 열꽃이 피었다.


“수상 소감도 잘 들었어요. 나 이제 밖에 못 다니겠다…… 부끄러워서.”

-그럼 더 좋고? 내가 끼고 살아야지.

“으으, 그만 놀려요. 아무튼…… 고마워요, 정말.”

 
혜윤의 입꼬리가 자잘하게 떨렸다. 불현듯 조금 걱정스러웠다. 고맙다는 말이 너무 흔해서, 너무 짧아서, 제 진심을 다 담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물론 상대는 진심과 더불어 작은 걱정마저 읽어냈지만.


-아니 아니. 그거 말고.

“……응?”

 
그녀의 걱정 위로 은은한 장난이 톡 전해졌다. 무슨 말이지 싶다가, 많이 들어본 말인데 싶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크리스마스 아침에 그녀가 지호에게 했던 말이었다.

가득 차려진 음식에 미안함을 보이던 눈. 그 눈에게 보낸 말이었다. 미안한 것 말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며. ‘얼른얼른, 좋아해 줘!’라고 쫄랑쫄랑 눈짓했던 기억.

혜윤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때 지호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자신도 그대로 돌려줘야지 싶었다. 바로 떠오른 그의 대답에 상큼한 목청이 터졌다.


“큭큭. 진심으로 감동받았어요.”

 
그리고 지호가 어떤 말을 이어 갈지도 다 알 것 같았다. 제 질문이었으니까.


-그래서? 행복하고?

“우와아아, 못 살겠네 정말! 기억력 엄청 좋아요, 지호 씨.”

-큭큭. 대답해야죠. 그래서…… 행복하고?

“……말해 뭐 해. 너무 행복하지.”

 
101걸음처럼 철저히 두 사람만 아는 추억. 똑같은 대화가 다시 한번 덧칠된 만큼 행복도 짙게 물들었다.

작은 웃음소리가 멈추자 잠시 조용했다. 혼자 집에 있는 혜윤과 먼저 차에 탄 지호. 서로의 귓가엔 그저 고요만 들렸다. 무슨 생각을 할까 싶어 먼저 정적을 깨려던 지호였지만, 혜윤이 조금 더 빨랐다.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못 하지만, 대신 한 사람한테만.”

-응?

 
그리고 가끔은, 그녀의 고요를 깨뜨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지호였다.


“나도 정말…… 사랑한다고요.”

-…….

“항상 외워둬요. 아직은 떨려서 자주 못 말하니까.”

 
보이지 않아도 서로의 표정을 알 것 같았다. 지금 나랑 똑같겠지.

조금 더 이어진 대화 속에서 둘은 다음 일정들을 공유했다. 지호는 쉽게 안 끝날 것 같은 오늘 밤 회식을, 혜윤은 생각만으로도 신나는 내일의 서점 방문을 들려줬다.

‘술 너무 많이 먹인다 싶으면 나 불러요. 내가 가서 대신 마셔줄게.’ 같은 허세가 너무 진심이라, 지호가 큰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


 


“저기…….”

“네?”

 
다음 날 오후. 익숙한 서점, 익숙한 동선을 따라 움직이던 혜윤에게 불쑥 낯선 남자가 등장했다. 남자다운 그림자와 목소리였지만 말투에는 숫기가 없었다.

혜윤은 제 눈치를 살피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러다 불쑥 긴장이 올라오기도 했다. <23센티미터>가 2주 넘게 방영된 지금까지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물론 밖에 많이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계속 눈이 가서요. 책 읽는 모습이 정말 예쁘셔서.”

“아…….”

 
아니구나.

안도와 함께 의외의 이야기가 신기했다. 이런 상황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보다 꽤 어려 보였기에. 혜윤은 끔뻑끔뻑, 그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괜찮으시면 연락처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아, 저 정말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요. 한국대학교 컴퓨터공학과 1학년이에요.”

 
남자 역시 혜윤의 집중력이 신기했다. 정확히는 신기할 만큼 예뻤다. 그래서 없는 용기로 어떻게든 자기소개부터 던지고 봤다. 당연히 그 순수한 호감을 혜윤이 모를 리는 없었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란 것도 너무 잘 보였고.

그래서 부드럽게 거절해야지 싶었다. 좋게 봐줘서 고맙다는 마음도 더할 참이었다.

꾸욱-

오른쪽 어깨를 꾹 감싸는 손 때문에 못 했지만.


“한국대면…… 공부 진짜 잘하시는 분이네요.”

 
제 오른쪽 어깨로 눈을 돌리려 했지만 그와 동시에 왼쪽 어깨엔 너른 품이 느껴졌다. 그래서 또 왼쪽으로 가려던 시선이었건만 머리 위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내렸다. 결국 목소리를 향해 턱을 들었다.

모자챙 아래에 말간 물빛이 어린 얼굴. 힐긋 눈을 낮춰 자신과 시선을 겹치고는 다시 맞은편 남자에게 관심을 쏟는 사람. 지호였다.


“아, 죄송합니다! 남자친구분 계신 줄 몰랐어요.”

 
여러모로 당황스러운 남자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뒤돌았다. 근처에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것도, 그 남자친구가 얼핏 봐도 지호인 것도, 그렇다면 저 여자가 한동안 시끄러웠던 여배우라는 것도.

빠른 걸음이 서둘러 어지러운 생각을 빠져나가려 들었다.

그리고 혜윤 역시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사람들은 주변이 아닌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음이 놓이자 1시간 전 지호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내가 데리러 갈까?’는 정말 가볍게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원래도 작게 내던 목소리가 더 속닥댔다.


“와, 어떻게 왔어요?”

“이럴까 봐 왔죠.”

 
목소리만큼이나 그윽한 반가움을 주고받는 눈빛들. 그중 혜윤의 눈이 먼저 시선을 돌린다. 저 멀리 작게 사라져가는 남자의 뒷모습 쪽으로.

지호가 그 움직임을 쭉 바라봤다.


“신기하다. 나보다 한참 어릴 텐데 예쁘다고 해 주다니…… 고맙게.”

 
아련한 눈망울과 참 잘 어울리는 목소리에는 픽, 콧바람이 새기도 했다.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이 꾹 실렸다.


“혜윤아, 좋아?”

“……조금? 큭큭. 그런데 지호 씨도 좋지 않아요? 여자친구가 다른 사람 눈에도 예뻐 보인다는 거니까.”

 
정말 좋지 않냐며 말긋말긋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에는 솔직한 답을 할 수 없었다. 좋을 리가 있나. 하다 하다 본 적도 없는 놈들까지 들이댄다는데.

여전히 또랑또랑한 눈을 보며 어떤 대답을 들려줘야 할까 고민했다. 그래서 싫다는 말 말고, 그녀 스스로도 싫어하게끔 만들어주기로 했다. 상상력 대장은 작은 조각만 던져줘도 빵빵 부풀려내니까.

그의 목소리에 혜윤은 눈치 못 챈 짓궂음이 흘렀다.


“아, 그럼…… 나도 어제 번호 물어본 여배우들 얘기 좀 해 줘야 하나? 작가님 기분 좋아지게?”

“우와아아.”

 
역시. 단숨에 반짝이던 갈색 눈동자에 불꽃이 튄다. 지호는 웃음을 참으며 혜윤의 책 3권을 빼앗아 들었다. 열심히 고른 책을 순순히 빼앗길 만큼, 이제 혜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카랑카랑한 분노가 느껴졌다.


“그래서, 줬어요? 또 엄청 인형 같았죠 다들? 누구예요? 몇 명이나? 씨이…….”

 
쫄래쫄래 따라오는 걸음마다 깜찍한 불씨가 똑똑 떨어졌다.


“큭큭.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

“아니, 지호 씨…….”

 
그러다가는 또 시무룩. 저렇게 순간마다 얼굴빛으로 말하는 건 어디서 배웠을까. 찰나의 감정도 허투루 사그라트리지 않는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알긴 할까.

지호가 그 감정을 흉내 내듯 눈썹을 실그러트렸다. 그제야 혜윤의 시무룩함이 쪼물쪼물 그를 향했다.


“어쩌다 관심받는 못난이랑 매일매일 관심받는 멋쟁이랑 비교하는 게 어딨어요…….”

 
댕댕 튀어나온 입술에 서운함이 통통하게 들어차 있었다. 지호의 손이 막을 틈도 없이 그 입술을 톡 건드렸다. 역시나 막을 수 없는 진심과 함께.


“무슨 못난이가 이렇게 예쁘대?”

 
그의 눈가에 넘치는 애정이 보이자 시무룩했던 마음이 단번에 풀리고야 만다. 민망한 혜윤이 괜히 코를 찡긋거렸다.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스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잡고는 서점을 둘러봤다. 작은 속삭임이 밤새 술에 시달렸을 지호를 걱정했다. 그 걱정이 지금 이 순간으로 옮는 건 금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요?”

“네. 왜 안 되지?”

“음…… 진짜 그렇네.”

“응. 여자친구랑 데이트 좀 하겠다는데.”

 
걱정을 행복으로 바꿔주는 건, 언제나처럼 그의 습관이었다.

지호는 지금 막 운동을 끝내고 오는 길이었다. 스케줄이 없을 땐 하루에 3시간 정도 운동을 했고, 일이 있는 날에는 한 시간이라도 틈을 내려고 했다. 요즘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느라 그 틈조차 나지 않았고.

한 달 만에 다시 시작한 운동. 그 즉각적인 결과는 바로 옆 사람의 눈에도 선명했다. 혜윤의 눈이 슬쩍슬쩍 지호의 몸을 힐끔댔다. 코트 안에 설핏 보이는 가슴 근육이 딴딴한 곡선을 만들었다.


“지호 씨, 그런데…….”

“응?”

“점점…… 몸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러더니 곧 뚫어지게 그의 가슴을 보기 시작했다. 단 며칠 새에 더 좋아진 몸이 신비로워, 의식도 못 한 채 빠져든 것이다. 지호가 노골적이고 귀여운 시선에 피식거렸다.

가만히 놔두자 어느 순간 티 나게 움찔. 눈망울을 또르르 굴려댔다. 이제야 깨달았구나 싶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나려나 싶은 순간, 다짜고짜 아무 책이나 쥐는 혜윤이었다.


“어! 이 책 엄청 재밌어 보인다.”

“변리사 민법개론이?”

“아…….”

 
곧 얌전히 내려놓는 손. 민들레 홀씨처럼 풀풀 떠오른 발끝이 어색하게 앞서나갔다. 부끄러운 얼굴을 감추려 한 걸음을 먼저 떼면서도 손은 절대 놓지 않는 게 기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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