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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그의 장난이란 건 (84/110)


83. 그의 장난이란 건
2023.03.15.



 
지호의 큰 보폭이 단번에 혜윤과 걸음을 나란히 했다.


“지금 근육 펌핑돼서 그래요. 오늘은 트레이너 형이 욕심을 내서, 조금 더 했거든.”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힐끔. 피식거리던 지호가 잡고 있던 혜윤의 손을 제 가슴 위에 올려놓는다. 손을 빼지 못하게 제 손으로 덮는 것도 동시였다.


“엄마야…….”

“뭘 그렇게 몰래 보기만 해? 궁금하면 만져보면 되지.”

 
여전히 웃는 지호를 향해 작은 입 모양이 뻐끔거린다. 그러면서도 정말 호기심이 일었는지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러보는 혜윤이었다. 언젠가처럼, 도저히 그녀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단단함에 주먹으로 팡팡 때려보기도 했다.

그래봤자 힘없는 손은 움직임만 요란할 뿐이다.


“그…… 음…….”

“그, 음?”

 
신나게 팡팡 두드려 볼 때는 언제고 다시 또 눈이 떼굴떼굴. 이번엔 변리사 민법개론 말고 어떤 책을 재밌어하려나 싶은데, 경찰 공무원 책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손짓만큼이나 수줍은 속내가 살금살금 새어 나왔다.


“옷태도 물론 좋지만, 옷이 몸매를 엄청 가린다고 생각했…… 는데 못 들은 걸로 해요.”

 
서둘러 책을 펼치고는 ‘경찰 공무원, 이름도 엄청 멋있다.’라는 혼잣말까지. 다짜고짜 펼치긴 했는데 자연스럽게 덮는 것까지는 무리인 것 같았다. 그래서 지호는 자신이 덮어주기로 했다.

마침 칭찬도 받았으니까 보답으로.


“아, 그런 것도 되는 거였나?”

“응? 뭐가요?”

 
책도 빼앗고, 시선도 빼앗고. 반짝 호기심이 빛나는 눈동자가 지호를 올려봤다. 지호 역시 한 손으로는 여유롭게 책을 덮으며, 그 눈빛을 한순간도 흘리지 않았다.


“그럼 지금 책이고 뭐고…….”

“…….”

“그냥 집에나 데려가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못 들은 걸로 해요.”

 
나긋나긋,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가 언제나처럼 부드러웠다. 혜윤이 수줍음에 작은 콧소리를 냈다. 늘 엉뚱한 곳에서 자라나는 호기심도, 그 많은 걸 함께 해놓고도 의아하게 등장하는 부끄러움도.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마다 올망졸망 조랑조랑. 빠르게 열리고 맺히는 무수한 감정들을 그저 예쁘다며 보듬어주는 지호가 고마웠다.


“……응. 둘 다 못 들은 걸로.”

 
혜윤이 그 고마움을 담아 조금 더 세게 끄덕였다. 지호는 이번에도, 그 고갯짓마저 사랑스럽게 지켜봤다. 맞잡은 손등을 느릿느릿 문질렀다.

몇 걸음을 옮긴 곳에서는 오히려 지호가 먼저 책을 펼쳤다. 대충 펼친 책장 속에는 에메랄드빛의 바다와 푸른 섬들이 찍혀 있었다. 혜윤도 그 푸름을 빼꼼 들여다봤다.


“맞다, 지호 씨 여행 간다고 했었죠? 언제 가요?”

“언제가 좋을까? 어디 가보고 싶은 곳 없어요?”

 
당연하다는 듯이 되묻는 눈빛. 혜윤은 잠시 그의 말을 곱씹었다.


“……저요?”

“응. 그럼 같이 안 가려고?”

 
당연을 넘어 황당하다는 듯이 되묻는 고개가 까딱 기울여진다.

지호와의 여행이라. 물론 시간만 맞으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여행이란 건, 글자만 봐도 너무 행복할 것 같으니까. 경험해본 적 없었으니까.

낭만은 너무나 충분했기에 잠시 현실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러자 곧장 창피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저 여행 친구로는 영 별로예요. 길치인데 지도까지 볼 줄 몰라서 항상 헤매고. 큭큭. 생각할수록 바보 같다.”

 
천진한 얼굴 위에 보슬보슬 미소가 내렸다. 지호는 그 얼굴을 쭉 보고 있었다. 잠깐 낭만을 그리던 눈빛도 좋았고, 지금처럼 현실에 발을 디딘 모습도 좋았다.

실은 무엇이든 좋았다. 이 여자라면.


“너무 좋네. 길 잃어서 못 돌아오면…… 거기서 둘이 살면 되겠다.”

 
과장되게 떡 벌린 입 위로 큰 눈망울이 멀뚱멀뚱 그를 쳐다봤다. 지호만큼 매 순간을 읽어낼 수는 없었지만 혜윤도 그의 생각을 나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지호가 저런 이야기를 한다는 걸.

잠시 지나간 말들이 되울렸다. 가지 말라고 붙잡던 목소리와 끼고 살아야겠다던 장난. 당연히 장난이지만 이제는 잘 안다. 빈말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걸. 장난에 오롯이 장난만 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름 잠깐 기억을 더듬었다고 생각했는데 몇 초는 더 흐른 모양이었다. 제 머리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시 초점을 맞춘 곳에는 지호가 손길과도 같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르는 말투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 난 마음에도 없는 장난은 안 치는 편이니까.”

“으앗! 자꾸 내 생각 읽지 마요.”

 
내내 지켜보면서, 내내 모든 순간을 읽은 게 틀림없었다. 혜윤이 서둘러 이마를 가렸다. 이마 위에 제 감정이 글자로 적힐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 탓이었다.

지호가 그 귀여운 몸짓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결국 둘 다 웃고 말았지만 조용히 오고 간 눈의 대화는 명확했다. 더는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아무튼 여행은 천천히 생각해 봐요. 봄이나 여름에 가도 좋으니까. 어디든.”

 
책장을 덮는 지호의 손과 함께 혜윤 역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계산대로 향하는 길. 잠시 스쳐 간 베스트셀러 유아 부문에는 여전히 <선인장과 친구들>이 5위권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와.’ 지호가 소리 없는 감탄을 입으로 전하자 혜윤도 우쭐거리며 어깨를 한번 들먹였다.

혜윤에게는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책 자랑이었다. 가족과 민주, 우준에게도 축하받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게 전부였기에.

마주 잡은 손에 힘이 꾹 실리던 때, 대견하고 자랑스럽다는 눈빛이 저를 담은 순간, 경쾌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던 찰나. 혜윤은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제 오랜 비밀을 다른 누구도 아닌 지호에게 들키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다.

계산을 마친 책들은 자연스럽게 지호가 들었다. 반대편 손바닥 안으로 꼬물꼬물, 혜윤이 깍지를 끼려 하자 지호가 손가락 틈을 벌려주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몇 걸음을 걷던 지호가 불현듯 손바닥을 높인 건 그때였다.


“항상 느끼는데 손 진짜 작다.”

 
가슴까지 올린 손바닥 위에 혜윤의 작은 손이 얹어져 있었다. 지호는 잠시 그 손을 들여다봤다. 손가락이 작으니 손톱은 말도 못 하게 작아 보였다.


“여자들이 다 이런가? 평균적으로?”

“제가 조금 더 작은 편이에요. 골격이 작아서 키도 작고, 발도 작고. 음…… 그래서 키 큰 여자들 되게 부러워해요.”

“그렇구나…….”

 
한 번 더 가녀린 손가락들을 눈에 담고는 다시 깍지를 꼈다. 눈이 닿을 수 없는 대신 맞잡은 손으로 혜윤의 손가락들을 찬찬히 느끼고 있었다.


“참, 민우 선배가 이번 주는 결방이라던데.”

“네. 31일이라 다들 시상식 할 거예요. 나도 갈 것 같고.”

“엇! 지호 씨도 수상 후보예요?”

 
놀란 혜윤이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지호가 그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아니. 이번엔 시상자로 참석해요. 올해 드라마 찍은 것도 없고, 작년에 너무 큰 상을 주셔서.”

“큰 상이면…… 대상 받았어요? 혹시?”

“네.”

 
차를 몇 걸음 앞두고 뚝 멈춘 발.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던 지호처럼, 혜윤의 입 역시 ‘우와.’하며 소리 없는 감탄을 전했다.

‘진짜 드라마 안 보는구나? 꽤 잘됐는데.’ 같은 말로 그녀의 감탄을 멈추려 했지만, 동그랗게 커진 입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감동이든 실망이든. 그녀를 감정의 호수가 아닌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지호는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 드라마예요, 작년에 지나랑 찍었던. 모레 가면 지나도 보겠네.”

 
쾅! 단번에 벌어진 입이 다물린다. 감탄이 질투로 바뀌며 그렁그렁하던 눈빛이 이글이글. 지호가 싱긋 웃으며 그 얼굴을 내려봤다. 키 큰 여자를 부러워한다더니 지나가 그중 한 명인 것 같았다.

조금씩 짙어지는 질투의 기운. 아, 내가 이런 감정일 때 상대가 어떻게 했었더라. 지호는 빠르게 혜윤의 모든 장면을 필름처럼 돌려 보았다. 그리고는 씨익.


‘이랬었지, 아마?’

 
모은 입술을 쑥 내밀어본다. 대충 애교로 넘어가기는 요즘 혜윤이 즐기는 특기였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어떻게 나오려나. 그래도 쉬운 여자 아니라면서 조금 버텨보려나 싶은데.

그럴 리가. 전혀 아니었다. 내민 입술을 보더니 얼른 제 두 볼을 감싸고 있었다. 곧장 발뒤꿈치를 높이 세우고는.

쪽-

그리고 그 민첩함에 눈이 커진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더 꾸욱.


“큭큭. 으앗, 너무 꾹 눌렀다.”

 
다시 원래의 키로 돌아간 장난꾸러기 아이가 배시시 웃는다. 턱을 치켜들고는 여린 손끝이 살금살금 지호의 입술을 지우고 있었다.


“안 되겠다. 빨리 차 타요.”

“응?”

“집에 가야겠다.”

 
지호가 키득거리는 혜윤의 웃음을 애정 있게 눈에 담았다. 혜윤의 다음 일정이 있었기에 짧은 데이트는 여기까지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점으로 오지 말라고 했던 혜윤이었지만, 잠깐이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온 것이었다.

함께 차를 타고 주차장을 벗어나고. 혜윤의 다음 약속 장소는 생각보다 너무 가까웠다. 평일 한낮의 서울은 도로조차 막히지 않았고.


“여기서 내려주면 돼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아쉽다…….”

 
차는 멈췄는데 지호는 쉽게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실긋 기울여진 시선이 보드랍게 혜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웬만해서는 보이지 않는 투정과 함께. 그랬기에 혜윤 역시 그 애정을 소중하게 눈에 담았다.


“31일에는 뭐 해요? 아, 시상식 있다고 했지.”

“응. 대신 1월 1일은 같이 보내자. 약속 있어요?”

 
보송한 얼굴이 양쪽으로 도리도리했다. 새해 첫날을 함께 보내게 된 기쁨도 잠시, 혜윤의 핸드폰이 빠르게 움직여댔다. 아마 이 차에서 내리면 만나게 될 사람인 것 같았다.


“진짜 갈게요. 그럼 1월 1일에 보기로. 운전 조심해요.”

 
꼭 잡은 힘을 풀어주자 혜윤이 살살 손을 뺐다.

탁-

내린 뒤에도 창문 밖에서 산뜻한 손이 흔들흔들. 총총걸음으로 멀어지던 몸이 어느 건물 속으로 완벽히 사라지고야 말았다.

지호는 그 잔상을 눈에 새기고는 다시 제 손을 내려봤다. 아직도 손안에 남아 있는 온기. 주먹을 꽉 쥐면 그 온기를 조금 더 누릴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펼친 손바닥 위에 혜윤의 손가락들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스타일리스트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새벽까지 이어진 회식 때문에 사실상 오늘 아침까지도 본 얼굴이었다. 그래서 가벼운 인사만 주고받은 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누나, 여자들은…… 어떤 브랜드를 좋아해?”

 
핸드폰 너머의 여자가 오히려 질문을 되돌려 보냈나 보다. 지호가 그 말에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혜윤이도 맞고, 반지도 맞고.”

 
그의 눈이 여전히 제 손바닥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 더는 없지만, 완벽히 그려낼 수 있는 작은 손가락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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