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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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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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반지
2023.03.19.
“특별히 찾으시는 모델이 있나요? 아니면 원하시는 디자인도 좋고요.”
“아니요. 그런 건 없는데…….”
다음 날. 스타일리스트의 추천과 봉기의 예약으로 방문하게 된 파인쥬얼리 부티크. 지호는 쇼케이스 안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반짝임들을 훑고 있었다.
반지를 둘러보는 그의 눈길처럼, 이곳저곳에 서 있는 직원들 역시 지호를 감상하고 있었다. 직원들에게는 그가 보석이었다.
응대를 진행하는 여직원이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여자친구분께 선물하실 반지 보시는 거죠?”
“네.”
대답하는 와중에도 지호의 시선은 여전히 작은 반짝임들에 머물러 있었다. 크지 않은 게 깔끔한 것 같은데. 아닌가. 여자들 눈에는 크고 화려할수록 예뻐 보이려나.
생각할수록 어려운 질문들만 쌓이는 중이었다.
“참, 남우주연상 수상 축하드려요. 요즘 드라마도 항상 챙겨보고 있어요. 제가 정말…… 팬이라서요.”
“오, 감사합니다.”
그러다 잠시 수줍은 목소리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진심 어린 화답을 건네자 직원의 얼굴이 발그스름해지고 있었다.
‘나는 프로다. 나는 프로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오늘만 벌써 15번째 되뇌고 있는 말이었다. 지호를 응대하기 시작한 10분 전부터.
그녀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드라마로 본 게 전부지만, 여자친구분께서 조금 귀여운 이미지이신 것 같은데…….”
“네. 많이 귀엽죠.”
“아…… 그, 그렇죠.”
하지만 얼굴은 조금 더 붉어지고야 만다. 눈앞에서 조각 같은 사람이 빤히 자신을 쳐다봤기에.
지호 스스로는 크게 의식할 수 없었다. 혜윤이 귀여운 건 너무 당연한 거라서. 그래서 명료한 질문만큼이나 명쾌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왜 얼굴을 붉히나 싶어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드문드문 서 있는 직원들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지호는 가만히 시선을 낮췄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리고 처음부터 눈이 가던 반지를 가리켰다.
“저는 이런 게 예뻐 보이는데. 편할 것 같기도 하고.”
알알이 작은 반짝임으로 뒤덮인 반지. 다이아몬드가 손가락 전체를 감싸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지호가 천천히 직원의 반응을 살폈다. 여자 생각은 여자가 잘 알겠지 싶었다.
그리고 제 선택이 나쁘진 않았는지, 그녀에게 생기 있는 반응이 터졌다.
“와, 역시. 솔직히 어제 오신다는 연락 받았을 때부터, 제일 추천해드리고 싶은 반지가 그 모델이었어요.”
반가움을 보이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반지를 꺼내는 손은 한없이 신중했다. 장갑을 낀 손이 조심스럽게 반지를 내밀었다.
“2, 3캐럿대 다이아몬드에 비해서 작아 보일지 몰라도 최상급 다이아몬드들로 세팅해 놓은 모델이에요. 실은 총 캐럿 수도 2캐럿이 넘어요. 손이 움직일 때마다 영롱하게 반짝일 거예요.”
“그렇군요.”
“네. 여자친구분 이미지에도 너무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일상생활에서 착용하시기도 편하고요.”
지호는 제 앞에 놓인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직원의 설명 속에서 작고, 영롱하게 반짝인다는 표현들이 모두 혜윤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이걸로 할게요.”
작게 주억거리는 고개가 산뜻했다. 은은한 미소와 흡족함이 배인 얼굴이 어찌나 기막히게 멋있는지. ‘나는 프로다. 나는 프로다.’ 여직원의 되뇜은 벌써 21번째를 넘어서고 있었다.
잠시 목을 가다듬은 직원이 빳빳한 예약 증서를 쇼케이스 위로 올렸다.
“그런데 이 모델이 지금 보시는 샘플 하나만 남아 있어서…… 해외에서 오려면 적어도 2주는 걸리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아요.”
지호의 이름과 날짜, 모델명을 받아적는 손 또한 진정시켜야 했다. 사실 ‘눈부시고 영롱한’ 같은 표현을 하며 다이아몬드를 설명하는 내내 민망할 지경이었다. 눈앞의 남자가 제일 눈부시건만 대체 이 사람에게 뭘 소개하고 있는 건지.
‘나는 프로다. 나는 프로다.’ 22번째 되뇌는 말과 함께 그녀가 지호를 응시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사이즈는 어떻게 되시나요?”
“아…….”
그 순간, 지호가 말끝을 흐렸다. 몇천만 원짜리 반지는 쉽게 고르던 사람이 고작 사이즈라는 말 한마디에 어딘지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역시, 그 느낌과 어울리는 말이 들렸다. ‘그게 문제인데요.’ 같은.
여직원이 잠시 펜을 멈췄다.
“이 모델이 360도 올 다이아몬드 세팅이거든요. 그래서 사이즈가 굉장히 중요해요. 제작 이후엔 사이즈 조절이 안 된다고 보셔도 될 정도로.”
“……그렇군요.”
의자에 등을 밀던 지호가 팔짱을 꼈다. 그러쥔 턱 위로 미간에 불만족스러운 주름이 졌다. 광고에서나 볼 법한 농염한 남자의 표정. 코앞의 여직원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멀리 다른 여직원들 역시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순간 지호의 한 손이 쇼케이스 위에 자리했다. 탁. 탁. 손가락 끝이 규칙적으로 유리 표면을 두드렸다.
“그 대신 제가 손으로 기억하고 있거든요. 꽤 정확하게.”
“……손이요?”
그리고 의아하게 되묻는 여직원의 질문에 천천히 손바닥을 펼치고, 또 오므리길 반복하는 지호였다.
“혹시…… 여기 여직원분들 중에 체구가 많이 작으신 분 계신가요? 그분 손을 봤으면 좋겠어요.”
“음, 잠시만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제안이었지만 크게 어려울 게 없었다. 잠시 후, 작은 체구의 여직원 2명이 느릿느릿 지호 옆에 다가왔다. 지호도 서둘러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에서 보기만 해도 떨리는 남자가 눈을 맞추며 웃어주기까지 하고, 이제는 하다 하다.
“정말 실례인 줄 아는데…… 죄송하지만 손 한번 잡아봐도 될까요.”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때부터 샵 내부에는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지호의 겸연쩍은 얼굴과 부드럽게 휜 입꼬리를 보고 있자니 여직원들 모두 들뜬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하지만 지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표정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기에. 그저 직원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은 커서 포기는 못 하겠고.
“여기…….”
“감사합니다.”
잔뜩 긴장한 손이 덜덜 떨며 지호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물론 목표 의식이 확실한 그는 손이 주어지자 곧장 깍지를 껴볼 뿐이었다.
여직원은 황홀하고, 지호는 신중한 순간. 이제 샵에 있는 직원들은 옆 사람을 때려가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하물며 남직원까지, 모두가 들뜬 공간에서 지호만 유일하게 심각했다.
‘아…… 이것 보다는 훨씬 얇은데.’
그리고 그다음 여직원과의 손깍지에서도.
‘……이 느낌이 아닌데.’
큰일 났지 싶었다. 이대로라면 다른 반지를 고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나중에 사이즈 조절을 하면 될 것 같아서. 처음부터 눈에 띈 반지라 아쉽긴 해도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안타까운 고개가 패배를 인정할 무렵.
“아, 여기 한 명 더 있어요. 다른 근무 보다가 이제 와서. 체구도 작지만, 손이 아주 작은 친구예요.”
외투도 벗지 못한 채 그의 앞으로 쭈뼛쭈뼛 다가오는 여직원 한 명. 지호를 보자마자 놀란 기색이었지만 이 상황 자체를 알 수 없어 한껏 당황한 눈이었다. 지호가 왼손으로 제 입술을 슬근슬근 문질렀다. 그래도 민망함이 지워질 리 없었다.
“그럼 잠깐 손 좀 잡아볼게요. 초면에 큰 실례네요.”
그러고는 여유롭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양쪽에서 민망해하는 것보다야 한쪽이라도 여유롭게 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붉게 뺨이 익은 여직원이 푹 숙인 고개 밑으로 손을 내밀었다. 지호가 그 배려에 조심스럽게 손을 잡았다.
“와…….”
그리고 순식간에 새어나간 감탄.
조심스러움이 반가움으로 바뀌며 힘이 확 실리는 건 단숨이었다. 헛웃음과 함께 깍지 낀 손을 살살 굴려봤다. 여직원의 얼굴이 터질 듯이 새빨개질수록 지호의 얼굴에 핀 웃음꽃도 선명해졌다.
그 흡족함이 목소리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잡은 손에 더해진 힘만큼이나.
“딱 이 직원분 사이즈로 맞추면 될 것 같아요. 이것보다 살짝 얇은 정도긴 한데…… 진짜 비슷하다.”
의식도 못 하고 계속 손을 잡고 있다가 뒤늦게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로 옆에서 제게 손을 잡힌 직원이 고개를 못 들고 있었다.
지호가 서둘러 그 손을 놓았다. 실례라고 사과할 땐 언제고, 끝도 없이 무례했지 싶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오늘 손 안 씻어야겠다.”
다행히 실례도, 무례도 아닌 것 같았지만.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마무리됐다. 제품이 도착하면 연락받기로 하고, 직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와 사인을 건네고. 지호가 떠난 뒤, 마지막으로 손깍지를 꼈던 여직원은 부티크 내 모든 직원과 돌아가며 악수해야만 했다.
***
한 해의 마지막 날. 지호는 방송사 연기대상에 도착해 있었다. 전년도 수상자였기에 시상만 하는 간단한 행사였지만 그 상이 대상인 것이 문제였다. 제일 큰 상은 제일 마지막에 시상하게 될 테니까.
“자, 올해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그러게요. 이렇게 시청자 여러분들과 한 해를 마무리 지을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대기실의 큰 TV에서는 시상식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사회자의 명랑한 목청에 시계를 들여다보자 11시 58분. 정말 새해를 2분 앞두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12월 31일은 거의 이렇게 보낸 것 같았다. 시상식장에서 함께 박수를 치며 새해를 맞이했던 기억. 시상식이 끝나면 가족들에게 온 메시지에 답을 보낸 뒤, 집에 돌아가 잠을 자고.
그렇게 거의 십여 년의 반복이었다. 그게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해가 바뀌는 것에 큰 감흥이 없었으니까.
띠리링-
지호가 귀여운 알림 소리에 핸드폰을 밝혔다. 그리고 곧 눈이 가늘게 휘고 만다.
[정말 행복한 한 해를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내년에도 제일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오후 11:59)]
지나가는 해가 애틋하고, 다가올 해를 기대하게 만들어 준 여자였다.
“……3, 2, 1!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원 생중계를 통해 보신각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종소리마다 지난해의 잊지 못할 장면 장면을 가슴에 새겼다. 그렇게 33장면을 담아놓고 보니 한 사람의 얼굴만 가득 차고야 마는 신비로운 경험.
“보고 싶다…….”
지호가 핸드폰 속의 마지막 메시지를 보며 작게 읊조렸다. 절로 터져버린 진심처럼 손가락 역시 멋대로 움직였다.
[끝나고 보러 가도 돼? (오전 0:01)]
보내자마자 확인한 메시지, 바로 돌아오지 않는 답. 그 순간 지호는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 치미는 감정이 앞서나간 탓에 시간 계산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시상식이 끝나면 적어도 새벽 1시. 혜윤의 집에 도착할 때쯤엔 2시가 다 될 것 같았다. 그 새벽에 자다가 깨서 문을 열어주고, 또 왔으니 챙겨줘야 하고.
아, 너무 생각이 짧았네. 그가 서둘러 문장을 적었다.
‘아니다. 깨지 말고 푹 자요. 내일 보러…….’ 까지만 적은 문장은 잠시 뒤에 슥슥 지워내야 했다. 혜윤의 답장이 더 빨랐기에.
[집 비밀번호는 부산에서 나 사준 아이스크림 값. (오전 0:03)]
아랫입술을 꾹 깨물어도 행복이 눌러지지 않았다.
[왔는데 자고 있으면 꼭 깨워요. 발로 뻥 차도 돼요. 데굴데굴 굴려서 깨워도 되고. (오전 0:03)]
드라마는 안 봐도 만화는 많이 보는 것 같아서 더 귀여웠다.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이 귓가에 남은 종소리처럼 마음속에 계속 번져가고 있었다.
빨리, 자주, 사실은 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