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 해석의 차이 (86/110)


85. 해석의 차이
2023.03.22.


새해 첫 아침. 혜윤은 살금살금 몸을 움직였다. 눈을 떴을 땐 혼자가 아니었다. 바로 옆자리에는 아침의 빛을 머금은 남자의 얼굴이 청아하게 잠들어 있었다. 지호는 많이 늦게 도착해서인지 저를 깨우지 않은 듯했다.

조심조심 이불을 들치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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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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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일어났어요?”

 
지호가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아침보다는 밤에 머무는 듯한 목소리에서 짙은 남자 내음이 느껴졌다. 어쩌면 벗은 상의 때문에 더 그리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스윽-

그의 팔이 이끄는 대로 넓은 가슴에 안기는 건, 여전히 설레는 행복이었다. 혜윤만큼이나 지호 또한 다르지 않았다. 아직 이불 속에 있는 몸을 끌어당기자 이 집에 무서우리만큼 흘러넘치는 혜윤의 향이 진하게 쏟아졌다.

두 사람의 얼굴 위에 나른한 미소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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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몇 시에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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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 조금 넘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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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왔구나…… 그래도 왔으면 나 깨우지.”

 
지호는 대답 없이 콧바람을 냈다. 손바닥으로 작은 뒤통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어젯밤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그래봤자 몇 시간 전이었지만.

새벽 2시.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연 순간, 처음 혜윤의 집을 방문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주고받았던 말과 감동마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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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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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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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아도 누구 집인지 알 것 같아서요.’

 
또렷이 기억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똑같은 감상이었으니까.

한 여자의 향기에 잠식된 듯한 집에서도, 본능은 조금 더 그 향이 선연한 곳을 찾아내고야 만다. 역시나 딱 한 번 들어가 봤던 그녀의 침실. 문을 열자 혜윤은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깊은 잠을 자는 것 같았다.

문틈으로 조금 더 보다가 샤워를 하고 방에 들어섰다. 살살 팔베개를 밀어주자 꼬물꼬물, 무의식적으로 제 쪽에 몸을 기대는 혜윤이었다. 품에 들어온 혜윤을 한참 들여다봤던 것 같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헷갈리기도 했다. 본 건지 취했던 건지. 그 정도로 그 시간이 황홀했기에. 완벽한 한 해의 끝, 새해의 시작이었다.

쓰다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지호를 향해 혜윤이 명랑한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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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인사해야지. 지호 씨,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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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혜윤 씨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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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큭. 올해도 제일 친하게 지내요.”

 
자신을 따라 한 호칭에 혜윤이 키득 웃었다.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지호의 맨 가슴을 손끝으로 슬근거려봤다. 며칠 새에 몸이 훨씬 좋아진 것도 알겠고, 생각보다 옷이 몸매를 훨씬 많이 가린다는 것도 잘 알겠고.

지호는 꼬물거리는 손놀림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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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윤 씨, 그럼 말 나온 김에 지금부터 제일 친해져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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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이그, 우리 지호 또 이러네. 새해 첫날 아침부터 굶는 건 안 돼요.”

 
혜윤은 문득 크리스마스이브를 떠올렸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강렬하기까지 한 그날의 기억은 모든 게 선명했다. 기억도, 달뜬 호흡과 벅찬 감각들도.

아침부터 또 그러면 안 되지. 혜윤이 도리도리 고개를 휘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단단한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밀어내자 지호는 순순히 웃으며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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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못 잤을 텐데 조금 더 쉬고 있어요. 내가 떡국 다 되면 깨우러 올게요.”

 
침대에 아빠다리로 앉아 두 눈을 비비적비비적. 잠을 지워내려는 작은 손의 움직임도 지호는 미소로 바라만 봤다. 그러다 겨우 밤을 이겨낸 눈이 지호와 마주친다. 혜윤 역시 지호를 따라 방긋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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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 왜 그렇게 봐요. 너무 못생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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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예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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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 또 모닝빵 같은가보다.”

 
못 믿겠다면서도 동글동글 광대 위로 떠 오른 해님의 모양을 보면 기분이 좋은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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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열고 나오면 바로 샤워실 보여요. 나중에 거기서 씻으면 돼요.”

 
침대 밖으로 다리를 뻗은 혜윤은 당부를 남기며 사뿐히 사라졌다. 지호는 그 뒷모습을 끝까지 가슴에 새긴 뒤에야 눈을 감았다.

폭폭. 제 움직임마다 이불이 머금은 공기가 터져 나올 때, 그때마다 진하게 스며있던 혜윤의 향기가 쏟아지는 통에 그저 눈을 감고만 싶었다. 이불이 꼭 그녀의 품 같아서 잠이 솔솔 불어왔다.

그렇게 1시간쯤을 더 잔 뒤에야 기분 좋게 몸을 일으켰다. 잔향 말고, 여전히 생생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을 여자를 찾아 방을 나섰다.

걸음마다 집 이곳저곳을 찬찬히 훑기도 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방문이었으니 제대로 집을 둘러보는 건 처음이었다.

의외로 혜윤의 집은 아기자기한 장식이 없었다. 침구처럼 벽도, 바닥도 온통 하얗고 깨끗했다. 그래서 넓은 공간이 더 넓어 보였는데, 그의 집과 비슷한 인테리어였다. 화려한 장식이 없는 깔끔함.

그런데도 차갑고 고요한 느낌의 제집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인 건, 집주인 때문이겠지. 거실에 도착해 창밖의 조경을 보니 더 확신이 갔다. 잎사귀를 모두 잃은 나뭇가지마저 이곳에서는 처연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끝이 아니라, 시작을 준비하는 것처럼 활기차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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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야, 밥 먹자!”

 
그 확신을 한 움큼 더해 주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맑은 얼굴 가득 장난기가 동동 떠 있었다. 신나 보이는 게 오늘은 레시피와 싸우지 않았나 보다.

슥슥. 슬리퍼 소리마저 따뜻한 집. 식탁엔 떡국과 몇 가지 나물 반찬이 올라와 있었다. 고소해 보이는 하얀 떡국 위에 샛노란 지단이 참 깜찍해 보였다. 한겨울에 핀 개나리 같기도 하고, 눈밭을 뛰노는 병아리 같기도 한데. 익숙한 것도 같고.

감사한 마음으로 앉아 떡국을 휘휘 저으면서도 계속 떠올렸던 의문. 그 의문은 떡국을 입에 머금고 고개를 들었을 때 단번에 풀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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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볼 아래 꽃받침을 한 채, 이쪽을 초롱초롱 바라보는 개나리. 하얀 옷을 입은 병아리. 그냥 눈앞에 있는 사람이었다. 저렇게 기대하는데 맛이 없을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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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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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말도 예쁘게 해요.”

 
그제야 꽃받침에서 내려온 꽃이 씽긋, 화사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함께 소박한 음식들을 즐겼다. 혜윤은 지호가 키와 체격만큼이나 음식을 많이, 잘 먹는다고 생각했고 지호는 혜윤이 음식을 조금씩 꼭꼭 씹어먹는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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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벌써 다 먹었어요? 조금 더 줄까?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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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직 반의반쯤 먹은 혜윤에 비해 한 그릇을 싹 비운 지호였으니, 둘의 생각과 느낌은 모두 정확했다. 새로 떡국을 담으려는 뒷모습을 보며 지호가 넌지시 운을 띄웠다. 한 그릇을 더 먹겠다는 말이 그녀에게 행복을 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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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음주 금요일에 뭐 해요? 그날 마지막 회잖아. 같이 보면 어떨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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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좋다. 지금은 딱히 계획 없어요.”

 
뱅그르르 돌아오는 걸음과 대답이 모두 산뜻했다. 지호는 턱을 괸 채 앞에 놓인 새 떡국을 바라봤다. 그 위에 삐약삐약 귀여운 노래를 부를 것 같은 지단 병아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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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날 마지막 회도 보고…… 내가 아는 바다도 보러 갈래요?”

 
그리고 그 눈을 진짜 병아리 쪽으로 돌렸다. 혜윤이 나물을 집던 젓가락질을 똑 멈추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지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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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바다처럼 예쁘지는 않을 거예요. 진짜 조업만 나가는 바다니까. 관광지도 아니라 주변에 괜찮은 호텔도 없을 것 같긴 한데…….”

 
희미한 미소만큼이나 목소리 역시 고요했다. 그래서 혜윤은 그 고요한 마음을 댕강 잘라버렸다. 잘라서 빼앗아 버리고는 대신 그곳에 상큼한 대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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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아니면 어때요. 민박도 좋고, 정 안되면 차에서 자도 되고. 엄청 기대된다!”

 
삐약삐약. 삐약삐약. 일부러 들뜬 아이처럼 높은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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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바다는 이렇지 않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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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 씨가 아는 바다는…… 어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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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거칠고 어둡고. 다들 하루하루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고…… 뭐, 그랬어요.’

 
지호의 바다라는 건 그리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고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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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조금 걱정스럽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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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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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이 바라보는 세상은 이런 바다 같은데, 내가 보는 세상은 다른 바다라서.’

 
바다를 보여준다는 건, 그의 세상을 보여주고픈 마음이란 걸 알 것 같았기에.

지금 지호의 제안은 그 혼자만 알고 있던 세상으로의 초대장이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쫑알거렸다. 물론 그 배려를 지호가 모를 리 없었다. 그윽하게 접히는 눈가에 작은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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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마지막 회는 둘이 보기로. 목포니까, 금요일에 가서 하루나 이틀 자고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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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운전은 번갈아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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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니고.”

 
고마워도 아닌 건 곧 죽어도 아닌 거였고. 신나게 쫑알거리던 병아리 역시 금세 시무룩해지고야 말았다.

무시당하는 기분이 드는 건지, 항상 걱정되는 모든 것들을 막아서면 저런 표정이었다. 저 반응이 귀여워서 자꾸 더 하는 건데, 평생 모르겠지.

평생 몰랐으면 좋겠네.

지호가 엉뚱한 생각과 함께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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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면…….”

 
그때 혜윤이 다시 지호의 관심을 불렀다. 살짝 기울어진 머리가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호는 끄덕이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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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나는 일 좀 해야겠다. 놀러 가기 전에 끝내면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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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요.”

 
생각보다 평범한 이야기. 지호는 쉽게 수긍하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그가 빠르게 한 입을 삼킬 때까지 혜윤은 젓가락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이어야 할 말이 더 있었나 보다. 아니, 이게 진짜 하고 싶은 말이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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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 시작하면 조금 바쁠지도 몰라요. 지금처럼 연락 잘 안 될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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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이 왜?”

 
‘연락’이라는 단어에 그제야 지호도 수저를 멈췄다. 멈춘 움직임만큼이나 집중한 미간 역시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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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내가 일하는 방식이 그래요. 구상은 어디서든 여유롭게 하는데, 본격적으로 작업할 때는 집중하는 편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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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지호가 느릿느릿 고개를 움직였다. ‘알았어요. 방해하면 안 되지.’라는 덤덤한 대답에 미미한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그 대답에 안심한 혜윤이 천천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그리고 지호는 다음 날부터 이 덤덤한 대답을 하루에도 몇 번씩 곱씹었다.

몇 번씩 곱씹고, 몇백 번쯤 후회했다.

***

-전원이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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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5일째, 하루에 네댓 번씩 저 기계음을 들을 때마다 환청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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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요. 방해하면 안 되지.’

 
그러다 보면 혜윤의 목소리까지 함께인 장면마저 떠오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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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 시작하면 조금 바쁠지도 몰라요. 지금처럼 연락 잘 안 될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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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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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내가 일하는 방식이 그래요. 구상은 어디서든 여유롭게 하는데, 본격적으로 작업할 때는 집중하는 편이라서.’

 
모든 게 다 잘못된 설명이었다. 연락이 잘 안 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됐고, 집중하는 편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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