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 이 정도로 참을성이 없었나 (87/110)


86. 이 정도로 참을성이 없었나
2023.03.26.


혜윤의 연락은 이런 식이었다. 아침 6시쯤 메시지로 짧은 인사를 보낸 뒤 곧장 핸드폰의 전원을 꺼두는 식. 다음 연락은 자정 전후. 역시 잘 자라는 밤 인사였다.

첫날은 차단된 전원이 황당해서 밤 인사가 오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이건 너무 심하지 않냐며 장난 같은 진심을 전하려 했지만 차마 말할 수는 없었고.


‘우와, 지호 씨다…….’


‘이제 끝났어요?’


‘응…….’


‘……피곤하겠다. 얼른 자요.’

 
반가워하면서도 꾸역꾸역, 힘겹게 잠을 참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저 두 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이튿날도 같은 식으로 통화를 하다가 3일째부터는 그 역시 메시지로만 답을 보냈다.

그렇게 5일이 지난 지금. 꺼놓은 줄 알면서도 한 번씩 혜윤의 번호를 눌러보는 습관이 생기고야 말았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울컥울컥, 마음이 치밀었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이 정도로 참을성이 없었나. 스스로에 대한 실망만큼이나 지독한 갈증이 차츰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


 


“야, 근데 너는…….”

 
봉기가 대표실 소파에 앉아 있는 지호를 심각하게 훑었다. 양손 가득 올려진 종이 뭉치의 무게도 잊은 채 다가가던 걸음을 멈췄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볼수록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났다.

지호가 그 노골적인 눈빛에 뒤늦게 봉기를 올려봤다. 혜윤을 못 본 지 오늘로써 열흘. 주위 모든 자극엔 무뎌지고, 유일한 감정에만 신경이 곤두선 탓이었다.


“……어?”

“뭐, 운동 갔다가 오는 길이야?”

“응. 한동안 쉬었으니까 열심히 해야지.”

 
낙낙한 품의 니트를 입었음에도 지호의 성난 근육들이 옷감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 ‘그 얼굴에 그 몸매로 배우를 안 한다는 건, 조물주에 대한 모독 같지 않냐?’ 같은 빈정거림이 봉기의 눈빛에 여실했다.


“……그래. 열심히 하는 것 같네. 몸 보니까.”

 
부드럽게 순화시킨 말을 던지며 봉기 역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묵직한 종이 뭉치들이 테이블 위에 툭 올려진다.


“쉬는 게 낯설어서 그래?”

“뭐가?”

“얼굴 살아, 몸매도 살아. 그런데 표정은 죽어가는 것 같아서.”

 
함께한 시간만큼이나 지호의 기분을 쉽게 파악하는 봉기였다. 대답 없이 피식 웃고 마는 건 미약한 긍정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파고드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향도 모르지 않았고.

봉기가 주제를 바꾸려 턱 끝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 제법 수북한 책들을.


“쉬는 동안 그냥 봐. 독서한다 생각하고. 안 받겠다고 하는데도 주고 가는 걸 어쩌냐. 버릴 수도 없고.”

 
소파에서 등을 뗀 지호가 시나리오 위에 손을 올렸다. 제목들만 봐도 다양한 장르를 예상할 수 있었다. 표지마다 자신만큼이나 이름에 힘이 있는 감독들이 적혀 있었다.

지호가 현재 차기작이 없다는 소식은 이미 업계에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그래서 유독 많은 시나리오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조금 더 잔뼈가 굵은 사람들은 다른 소문을 공유하기도 했다.

연말에 계약기간이 끝났음에도 재계약을 안 했다는 것, 광고 연장을 지호 쪽에서 보류하고 있다는 것. 입소문이 빠른 곳이니 조만간 언론에서 떠들어댈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을 되감던 봉기가 넌지시 말을 보탰다.


“그리고 다른 광고는 모르겠는데 커피는 다시 생각해 봐. 브랜드 런칭 때부터 6년째 너만 쓰고 있는데…… 갑자기 그만하겠다고 하면 그쪽도 얼마나 놀라겠냐. 비상이지.”

“……그렇네.”

 
탁. 탁. 시나리오 위에 올려진 지호의 손가락이 깔끔한 소리를 냈다. 주억거리는 고개 또한 그 소리와 어울렸다. 그 긍정을 보며 봉기는 그간 정리해둔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영화 개봉이 5월 중순으로 잡혔으니까 그것도 4월 말부터는 홍보 돌아야 돼. 그전에 밑밥 깔려면 4월 초부터는 화보 촬영도 두세 번 해야 될거야.”

“…….”

“우리 부산 일정 때문에 미뤄뒀던 해외 인터뷰들이 꽤 있어. 이것도 우리 쪽에서 일정 조율을 원했던 거니까, 웬만하면 하는 게 좋고…….”

 
놔두면 몇 시간이고 떠들 것 같은 목소리에 지호가 불쑥 끼어들고야 만다.


“이런 식이면 일을 쉬는 게 아니네.”

 
불평의 말이라기엔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돌았다.


“형은 뭐…… 더 바빠졌고. 작가님 일까지 봐주느라.”

 
지호가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유심히 본 봉기의 얼굴에 피로가 어른대고 있었다. 여전히 그는 제 발 앞에 카펫을 깔고 있었다. 이 위로만 걸으라고. 그게 퇴장하는 마지막 뒷모습일지라도.

미안한 마음이 눈빛 속에 들이치는데, 그 눈을 읽은 게 분명했다. 봉기가 덩치와 어울리지도 않는 가여운 목소리를 냈다.


“괜찮아…… 계속 더 열심히 할 거야. 묵묵하게 일하면서 불쌍한 척할 거야. 그래야 미안해서라도 다시 연기 하겠지…….”

“큭큭. 미치겠다.”

 
콜록콜록. 기침하는 시늉까지 더해지자 미안했던 마음이 훅 가라앉고야 만다. 지호가 한쪽 입꼬리를 씰룩 올렸다.


“안 그래도 그 말 하러 온 거야.”

“그 말? 왜, 아주 은퇴하겠다고 대못을 박으시려고?”

 
가여운 목소리를 내던 입이 빠르게 말대답을 쏘았다. 바짝 예민하게 구는 눈빛이 자못 독하게 번뜩인다. 그 엄청난 태세 전환에 지호가 웃음을 삼켰다.


“아니. 재계약하자고.”

“……어?”

 
그러다가 한순간 멍해지는 것까지도 빨랐다. 이렇게 감정선이 명확한 사람이었나.


“대신 전보다 일은 좀 줄이고 싶은데…… 형 의견도 중요하니까.”

“인마! 난 옛날부터 줄이고 싶었어! 솔직히 이게 말이 되는 스케줄이냐? 또, 또. 뭐 더 없어? 더 말해!”

 
신난 봉기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이야, 내가 어제 꿈이 기가 막혔어! 로또 살까 하다가 안 샀거든? 어휴, 다행이다.”

“큭큭. 뭐가 다행이야?”

“야, 로또 1등 되고 대신에 너 안 왔어봐라. 나 억울해서 어쩔뻔했냐.”

 
이젠 어깨마저 들썩들썩. 자꾸 뭔가를 더 말하라고 눈짓했지만, 지호는 더 이상 요구할 게 없었다. 그래도 저렇게 원하는데 굳이 생각해본다면야.

지호의 검지가 아랫입술을 쓱쓱 문질렀다.


“계약기간 중에…… 내 상황이 달라져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잖아.”

“상황이 달라져? 뭐가?”

“그냥 뭐. 예를 들면…… 결혼한다거나.”

 
그 순간, 춤을 추듯 움직이던 봉기가 쩡 굳어버린다. ‘만약에.’라는 말이 뒤따르긴 했지만 봉기는 여전히 ‘결혼’에 꽂힌 모양이었다. 흥분을 뱉던 입이 주춤주춤 지호를 의심했다.


“너…… 아니지?”

 
작은 의심이 큰 불안에 잡아먹히는 생생한 광경. 지호가 의문스럽게 봉기를 봤다. 고된 운동으로 빳빳해진 어깨를 꾹꾹 누르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뭐가 아니야?”

“갑자기 다시 일하겠다는 게…… 급하게 분유값 벌어야 돼서 그런 건…….”

“참 멀리도 가셨다.”

 
피식 웃고는 반대편 어깨를 꾹꾹 누르는 지호였다. 크게 안도하는 얼굴이 너무나 선명해서 조금 더 웃음이 커지기도 했다.


‘하긴, 그렇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냐. 육아용품 광고만 더 늘어나겠지.’

 
우스운 생각을 하던 봉기가 고개를 설설 저었다. 그리고 최고의 선물을 받은 하루였으니, 그에 걸맞은 즐거운 기억을 끄집어냈다.


“참, 3회 방송 난리 난 거 알지?”

 
봉기는 다시 어깨춤을 추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지호 역시 모르지 않았다. 주체가 안 될 만큼 쏟아지는 호평, 옆 채널의 시청률을 조금씩 잡아먹더니만 3회는 무려 17%를 찍고야 말았다. 1위 드라마와 고작 2% 차이. 매주 기적의 연속이었다.


“작가님 찾는 연락이 너무 많아졌어. 지금은 내가 직접 받고 있는데, 더 늘어난다 싶으면 회사 시스템대로 하려고.”

“그렇구나.”

“응. 작가로서도 그렇고, 배우로서도 그렇고.”

 
지호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 세상이 장혜윤이란 보석에 대해서 떠드는데 혜윤은 이 세상에 없었으니까. 동화 속 세상에 빠져, 이 세상 이야기는커녕 제 이야기조차 들려줄 틈이 없었다.


“작가님은 잘 지내시지?”

“……응.”

 
그 역시 알 수 없었으니 대답 또한 시원찮았다. 그저 봉기가 ‘작가님’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귓가에선 기계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전원이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같은.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봉기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아이고…… 마냥 착하고 해맑으셔서는. 길에서 조그만 강아지들 보면 작가님 생각나더라.”

“…….”

“똘망똘망 작고 귀엽잖아.”

 
지호가 입술을 짓이겼다. 이쪽은 조그만 강아지를 볼 때가 아니라, 정신만 붙어 있으면 생각나는 지경이었기에. 이제 딱 이틀. 두 번의 밤이 지나면 마지막 회 방송일이었다.

딱 이틀. 딱 이틀만 참자 싶건만.


“아, 이렇게 말하다 보니까 조금…… 보고 싶네. 장 작가님.”

“…….”

 
의식적으로 눌러놓은 4글자가 봉기의 입을 통해 되살아났다.


 

***

그날 밤. 지호는 늦은 시간까지 봉기에게 전해 받은 시나리오들을 읽었다. 인물과 배경에 집중해서 작품에 깊게 빠지다가도 불현듯.

숨통을 끊어놓을 듯 날카롭게 치미는 감정.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정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열흘째 했던 반성을 또 한 번 반복했다. 이 정도로 참을성이 없었나. 조금씩 갉아 먹히던 이성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계속 밤은 깊어지고. 그러다 보면 정말 새까만 겨울밤 속엔 오직.


‘안고 싶다…… 안고 싶다…….’

 
남자의 본능만 남고야 만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 시간쯤이면.

띠리링-


[나 오늘 작업 끝! 벌써 12시 넘었네. 지호 씨, 잘 자요. (오전 0:21)]

 
지호가 곧장 통화버튼을 눌렀다. 딱 이틀만 참으면 되는데,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면서, 피곤할 텐데, 같은 어른스러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신호음이 이렇게나 소중한 거였구나 싶은 순간. 작은 목소리에 온 신경이 터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엇, 나 지금 막 메시지 보냈는…….

“지금 갈게요.”

-응?

 
야금야금 먹혀들던 이성이 완벽히 사라진 순간이었다.

***

두 집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금방이었다. 뻥 뚫린 도로를 막힘 없이 밟아댔으니, 지호는 15분 만에 혜윤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띠. 띠. 띠. 띠. 철커덕-

그리고 빠르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건,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향기가 본능에 불을 지폈다.


“하아…….”

 
지호가 어지러울 정도로 황홀한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중문 앞에 놓인 슬리퍼를 신고 슥슥. 안으로 들어섰다.

혜윤은 그새 잠이 들었는지 집 안은 온통 깜깜했다. 침실로 향하는 걸음마다 한 주 내내 셀 수 없이 했던 반성을 거듭했다.

이 정도로 참을성이 없었나.

훅-

그 순간 등에 딱 달라붙은 온기. 지호의 두 발이 뚝 멈췄다. 제 몸을 꼭 끌어 안은 등 뒤로 키득거리는 웃음이 울렸다.


“큭큭. 빨리 와서 다행이다. 놀라게 해 주려고 불 끄고 있었는데, 엄청 무서웠…….”

 
지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혜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랬기에 혜윤 역시 서서히 웃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무표정으로 그저 저를 내려보는 눈빛. 반짝 마음을 졸인 혜윤이 지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찬 공기가 스민 뺨을 손바닥으로 살짝 쓸어줬다. 그리고 그 손이 닿은 순간, 지호 역시 입을 열었다.


“있지, 그럼.”

“…….”

“안고 싶어서 눈이 뒤집혔으니까.”

 
이 정도로 참을성이 없는 게 아니었다. 무려 이만큼이나 참을성이 있어서 열흘을 버틴 것이었다. 또한 지금처럼, 이 시간 이후의 일들에 대해 예고도 할 수 있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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