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무서워?
(8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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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무서워?
2023.03.29.
혜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오감으로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평소의 지호가 아니었다. 아니, 처음 보는 남자 같았다. 그의 손이 제 턱을 움켜쥐는 순간, 의심은 확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저를 다루는 그에게서 처음 느껴보는 힘이었다. 턱을 꽉 잡힌 탓에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놀란 숨을 제대로 내쉬지도 못했다. 그 작은 호흡마저 빼앗기기 싫어하는 남자의 소유욕 때문이었다. 지호가 거칠게 작은 입술 새를 파고들었다.
“으음…….”
지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깊게 빨아들일수록 더 갈증이 났기에. 위압적으로 휘젓는 움직임이 끈적끈적, 색정적인 소리를 냈다.
애틋하게 스치는 살갗이 데일 듯이 뜨거웠다. 어느새 그의 손길은 가녀린 몸이 그려내는 유려한 곡선에 취해 있었다.
침실에 가까워질수록 모든 행위의 농도가 빠르고 깊어졌다. 젖은 신음을 흘린 혜윤이 몸을 뒤틀었다. 작은 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호흡은 달뜨고, 몸은 달아오르고.
“자, 잠깐만. 제발. 하아…….”
침실 문이 등에 닿자 혜윤이 온 힘을 다해 지호를 밀어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흥분으로 일렁이는 눈이 그를 올려봤다. 눈앞의 남자만이 줄 수 있는 아찔함에 젖어 들면서도, 빠르게 자라나는 또 하나의 감정이 있었기에.
지호가 그 눈을 바라보며 발그레한 뺨 위에 손을 올렸다. 손끝이 닿자마자 흠칫 떨리는 어깨.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물기로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무서워?”
새벽 1시에 지배당한 목소리였다. 검게 타오르는 눈동자 속에 지호는 없었다. 얕은 신음을 쌕쌕 뱉던 그녀가 덜덜 떨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다고. 많이 놀랐다고.
그 힘겨운 고갯짓에 잠시 지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익숙한 빛이 서서히 돌아오려는 눈동자. 혜윤은 습한 호흡을 내뱉으면서도 계속 지호를 바라봤다. 곧 볼을 타고 내려간 그의 손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지호의 가슴 언저리에서 빠르고 세찬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심장 소리만큼이나 지금 이 남자가 얼마나 거센 열기를 품고 있는지는 바짝 밀착된 몸으로 선연히 느낄 수 있었다.
슥- 슥-
그리고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 그 손길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원래 알고 있던 지호였다. 손이 스쳐 간 머리 위로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그의 노력이 길게 내려앉았다.
“후우…….”
뜨거운 호흡이 깊게 내쉬어지길 여러 번. 귓가에 왕왕 울리는 거센 심장 소리가 이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손길만큼이나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녹였다.
“무서우면 안 되지.”
이 목소리 역시 원래 알던 지호였다. 그때야 알 수 있었다. 지금 지호의 이성이 어렵게 본능을 누르고 있다는 걸. 본능에 완벽히 잡아먹힌 순간에도, 무섭다는 제 작은 고갯짓 한 번에 어떻게든 이성을 부여잡는 남자란 걸.
쓰다듬는 그의 손이 한 번씩 턱턱 멈추어 섰다. 여전히 두 개의 감정이 힘겹게 싸우는 것 같았다. 그래서 혜윤은 지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이젠 물가에 띄워진 꽃잎만큼만 힘을 줘도 물러나는 그였다.
가라앉지 않은 호흡은 그녀도 여전했다. 지호의 눈을 보는데 예상대로였다. 짙은 눈동자 속에 두 개의 거센 파도가 부딪히고 깨져나가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치솟는 본능을 이겨내려는 노력이 애틋했다.
그래서, 그녀 역시 본능대로 움직였다. 혜윤의 두 손이 지호의 볼을 감쌌다. 그러자 지호의 눈이 단번에 커진다. 가녀린 손길이 보드랍게 이끄는 곳으로 그가 고개를 숙였다.
두 입술이 닿고 부드럽게 그 문을 열고. 느릿느릿, 촉촉하게 뒤엉키는 모든 움직임을 지호는 그저 받아내기만 했다. 혜윤이 건넨 입맞춤은 찐득하게 녹아내리는 초콜릿 같았다. 어지러울 만큼 따뜻하고 달아서 꼭 꿈에 머무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떨어져 나가는 입술이 미칠 듯이 아쉬울 만큼.
“하아…….”
지호가 축축해진 숨을 내쉬며 혀로 입술을 쓱 핥았다. 자신을 달래려고 한 행동일지 모르지만 단단히 잘못된 것이었다. 가슴이 뻐근했다. 이건 달래는 게 아니라 부추기는 거니까.
밤새 이 여자를 힘들게 하고 싶다고, 엉망으로 흐트러뜨리고 싶다는 욕정이 그를 빠르게 헤집었다. 위험했다. 그나마 남은 정신이 있을 때 물러서야 했다. 정말 울리기 전에.
그래서 여전히 제 얼굴을 감싸고 있는 두 손을 떼어내려 했건만.
순간 혜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입맞춤처럼 어지러운 말과 함께.
“……이제 안 무서워.”
동시에 그녀의 한 손이 툭 떨어져 나갔다.
달칵-
그 손이 곧 침실 문을 열고야 만다. 입술은 또 한 번 포개지고 걸음은 자연스레 목적지를 향했다. 조금 전 그녀의 입맞춤을 흉내 내듯 느리고 부드럽게, 달고 촉촉하게.
하지만 두 몸이 침대 위에서 겹친 순간에는 단 1초도 흉내 낼 수 없었다. 본능이 꿈틀꿈틀 되살아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스스로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겨우 정신력으로 벌어낸 건 3초가 전부 같았다. 지호가 이성을 바로 세우듯, 팔로 상체를 지탱했다. 그 몸 아래 갇혀 있는 혜윤에게, 남자의 거친 숨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다시금 원래 알던 지호의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 금방 또 무서워질 것 같은데.”
정염에 휩싸인 목소리가 야릇했다. 까만 눈동자 속에 타오르는 욕망. 가느다란 손끝이 그 얼굴을 어루만졌다.
“응. 그래도 이제 안 무서워.”
너무 보고 싶어서, 너무 안고 싶어서. 그게 이유였단 걸 알아버린 이상 무서울 건 없었다. 그리고 곧장 두 입술은 농염하게 얽혔다.
긴 밤이 이어지는 내내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상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들을 집요하게 끝으로 모는 건, 지호만이 아니었다.
열심히도 애쓴 열흘을 칭찬해 주려는 듯이, 또는 그 마음을 빨리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듯이. 아니, 모든 걸 떠나서 흥분으로 얼룩진 당신의 얼굴이 내게도 똑같은 감정을 안겨준다는 듯이.
이날 밤을 더욱 달아오르게 만든 건, 어쩌면 혜윤이었다.
***
몇 시간 뒤, 먼저 잠에서 깬 건 지호였다. 5시 45분에 맞춰진 그녀의 알람을 빠르게 꺼버렸다. 지난 열흘 동안 6시쯤 오던 아침 인사는 이렇게 시작됐겠구나 싶었다. 그 귀여운 시작을 상상하다가 옆자리에 잠이 든 얼굴을 바라봤다.
그 얼굴을 따라 목선, 쇄골, 하얀 살결, 울긋불긋한 흔적이 하나, 둘, 셋…….
‘진짜 미친놈이 따로 없네.’
지호가 반성의 한숨을 삭혔다. 너무했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렁그렁 젖은 눈을 보다가 정말 여기서 더하면 미친 거지 싶은 순간들. 하지만 그때마다 혜윤이 깃털 같은 손을 뻗었다.
그 힘없는 손에 얼굴을 맡기면 어느새 입술이 닿아 있었다. 보드라운 입맞춤이 꼭 소름 끼치게 좋은 귓속말 같았다. ‘더 해도 돼.’라고 속삭이는 것 같은.
휘몰아치는 감각들을 버거워하는 게 보였는데도, 혜윤은 계속 저를 달랬다.
더 하라고. 더 가라고.
간밤은 현실이 아닌 느낌이었다. 눈앞에서 꽃처럼 흔들리는 여자가 어찌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서 더 그랬다.
스르륵-
그 때 혜윤이 몸을 움직였다. 작게 이불을 뒤척이더니만, 대뜸 믿기지 않게 번쩍 눈을 떴다.
“어?”
작은 기척 뒤엔 빠르게 또록또록 눈을 굴리고 있었다. 아마 몸이 습관처럼 이 시간을 기억하는 듯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키려는데, 보송한 얼굴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으아…….”
온몸이 말을 안 듣는 모양이었다. 지호가 가만히 그 얼굴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헝클어진 머릿결을 살살 어루만지자 그녀 역시 그를 빤히 바라봤다.
지호는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턱대고 달려든 밤이 너무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 스스로에게 욕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말아 물 뿐이었다. 마주한 눈빛 속에 그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래서 혜윤은 찡그린 미간을 살살 풀며 배시시 웃었다. 붉게 부푼 입술이 작게 운을 띄운다. 밤의 흔적이 남은 목소리 또한 힘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어제 너무 굉장했다.”
결국 둘 다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 웃음으로 미안하고 괜찮다는 인사를 대신하기도 했다. 지호의 손이 여전히 긴 머릿결을 빗겼다. 살금살금 조심스러운 손길이 몇 시간 전과는 딴판이었다.
“오늘도 집에서 일하는 거?”
편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보통 때의 지호였다. 혜윤이 익숙한 그의 말투에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히 마음을 놓은 고갯짓이 산뜻했다. 그 긍정을 비슷하게 따라 하던 지호가 말 하나를 더 보탰다.
계속 그 끄덕임을 유지해 주길 바라면서.
“얌전히 있으면 안 내쫓고?”
가벼운 장난 속에 진심을 담은 질문이었다. 질문처럼 물어놓고는 눈빛은 애원을 하고 있었다. 통통하게 부은 입술이 짧게 키득대며 움직였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꼭 숨소리 같았다.
“내쫓으면…… 순순히 가고?”
“아니. 절대 못 가지.”
능청스러운 대답에 혜윤이 입매를 휜 순간,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지호의 입술이 닿자마자 움찔거리는 어깨. 그녀의 몸은 몇시간 전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말 가벼운 입맞춤일 뿐이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시선 사이엔 한 뼘 남짓한 공간뿐이었다. 그 공간을 채우는 건 따뜻한 눈빛과 애틋함이었다.
“안 보면 죽게 생겼는데.”
그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혜윤이 눈을 곱게 접었다. 그 눈짓이 입술까지는 허락이라는 것 같아 지호 또한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
세 시간 뒤. 겨우 몸을 일으킨 두 사람은 서로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운동을 갔다 온다고요?’
‘네. 대충 집에 들러서 여행 가방도 챙길 겸. 옷 몇 벌이 전부겠지만.’
‘아니 아니. 오늘 운동을 할 수 있다고요?’
‘그렇게 많이 안 해요. 딱 세 시간만 할 거니까.’
이렇게 깨어나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며 스스로를 칭찬한 혜윤이건만, 지호는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운동 다녀와서 이 집 다 써요, 서재 빼고. 난 서재에서 딱 12시까지만 있다가 나올게요.’
‘와…… 오늘도 일하겠다고? 한집에 나도 있는데?’
‘큭큭. 오늘까지 하기로 했잖아요.’
지호의 입장에서야, 몸도 못 가누면서 다시 동화 속 세상으로 들어가겠다는 혜윤이 더 대단해 보였고.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헤어졌다. 늦은 아침을 먹고 헤어진 뒤, 혜윤은 다시 일에 빠져들었다. 몸이 축축 늘어지고 얼얼하리만큼 욱신거렸지만 반드시 오늘까지 끝내기로 마음먹은 일이었다.
열흘 내내 해 온 것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빠져들었다.
그 시간 동안 지호는 운동도 하고, 볼일도 보고. 집에 들러 간단히 짐도 챙겨 나왔다. 트레이너에게 근처의 유명한 베이커리를 소개받은 지호가 핸드폰을 들었다. 어떤 빵을 좋아하는지 물어보기라도 하려고.
-전원이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큭큭. 잊고 있었네.”
어제까지만 해도 이성을 갉아먹던 기계음에 이젠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