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당신이 머무는 곳에
(8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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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당신이 머무는 곳에
2023.04.02.
똑똑-
혜윤이 퍼뜩 정신을 차린 건 노크 소리 때문이었다. 잠시 손에 쥔 펜을 내려놓고 시계를 봤다. 오후 5시. 그러고는 문 쪽을 바라봤다.
달칵- 탁-
열린 문틈으로 종이 가방 하나가 바닥에 놓였다. 짧은 말 한마디 없이 방문이 닫히기에 몇 초 더 지켜보다 웃고 말았다. 몇 시간 만에 처음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문까지 향하는 발자국마다 행복이 묻어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행복 자국이 선명한 건 문 앞에서 멈춘 마지막 발자국이 아닐까 싶었다. 종이 가방을 들자마자 붙여 놓은 포스트잇을 똑 떼어낸다.
[작가님, 간식 좀 드시면서 하세요. 빨리 끝내고 나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번 봐서 익숙한 글씨체였다. 제일 설렘을 주는 글씨체이기도 하고.
“우와, 오는 길에 뭐 사 왔나 보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광대가 방긋방긋 볼 꼭대기로 떠올랐다. 자리에 돌아가 지호가 건넨 간식 봉투를 열어보았다. 알록달록한 마들렌 여러 개와 과일주스 2병. 혀끝에 닿은 마들렌에서 상큼하고 달콤한 레몬 맛이 터졌다.
동화든 현실이든. 어느 세상에서도 오후 5시에 자신만큼 달콤함을 누리는 이는 없을 거라 확신했다.
비슷한 확신을 한 번 더 갖게 된 건 오후 8시쯤이었다. 두 번째 노크 소리가 그때 들렸기에.
똑똑-
이번에 문틈으로 밀려 들어온 건 쟁반이었다. 달그락달그락, 정체를 드러내며 꼬물꼬물 걸어 들어오는 볶음밥과 친구들. 혜윤은 쟁반이 걸음을 멈추기도 전에 웃고 말았다.
“큭큭. 미치겠네, 정말!”
이번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지호 역시 웃음을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작게 한번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그뿐이었다. 여전히 말 한마디 없이 문은 닫혔고, 언제나처럼 쪽지가 붙어 있었다.
[작가님, 맛있게 드시고 빈 그릇은 문밖에 놔두세요. 12시까지 나오신다는 약속 꼭 지키세요. 제 인내심이 4시간 남았어요.]
겨우 글자를 읽어냈을 정도로 눈이 휘고야 만다. 크리스마스이브, 쫄쫄 굶은 배로 30분 남은 수명을 투덜거렸던 비슷한 기억. 그것까지 더해지자 행복으로 접힌 눈에 글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반찬도 참 예쁘게 담았네.”
볶음밥은 지호가 만든 듯 했고 반찬은 냉장고에 있던 걸 조금씩 담아낸 모양이었다. 며칠 내내 먹었던 반찬이 유독 더 고소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30분 뒤. 지호는 거실에 앉아 못 챙겨봤던 영화들을 보고 있었다. 낯선 외국 배우의 연기가 너무 좋아서 프로필을 찾아내려 할 무렵.
달칵-
혜윤의 서재 쪽에서 문이 열리고, 금세 또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함께.
‘다 먹고 내놨구나.’
잠시 영화를 멈춘 뒤, 웃으며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그 미소는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 크기를 키우고야 만다.
깨끗이 비워진 볶음밥과 얼마 안 남은 반찬들. 그리고 빈 그릇 옆에 익숙한 젤리 2봉지와 쪽지.
[요리사님,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11시까지 끝낼게요. 먼저 자고 있어도 돼요. 어차피 발로 뻥 차서 깨울 거니까.]
또 이걸 쓰면서 얼마나 키드득댔을까. 꾹꾹 눌러 쓴 글씨마저 개구쟁이 같았다. 돌려받은 그릇들을 깔끔하게 정리한 뒤에 200원의 행복을 까먹으며 소파로 갔다.
영화에 집중하느라 느릿느릿. 200원의 행복을 2시간이나 누릴 수 있었다. 텅 비어버린 곰돌이를 보며 어디 더 행복이 없을까 찾아볼 무렵.
달칵-
무려 30분이나 앞당겨 현실로 돌아온 혜윤은 최고의 행복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식사는 휴게소에서 하기로 하고 둘은 간단히 토스트로 허기를 달랬다. 혜윤이 짐을 챙기러 자리를 비운 사이, 지호는 줄곧 거실 창밖을 보고 있었다.
단지 내 조경 너머의 놀이터. 날이 쌀쌀할 텐데 아이 둘이 신나게 그네를 타고 있었다. 표정만 봐도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느 틈에 옆으로 다가온 혜윤이 아이들과 지호를 번갈아 봤다.
그리고 그 시선에 답하는 지호였다.
“이 집 정말 좋다. 꼭 높은 층만 좋은 게 아니네.”
지호는 여전히 그네 타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마음에 잔뜩 담은 뒤에야 혜윤 역시 놀이터를 바라봤다.
“집도 꼭 우리 같죠?”
“응?”
이번엔 지호가 그녀를 봤다. 조금 전 혜윤처럼, 고운 옆얼굴을 가슴에 꼭꼭 새기기도 했다. 놀이터 속 아이들은 어느덧 그네에서 폴짝 뛰어내려 모랫바닥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렇잖아요. 지호 씨는 늘 하늘에 떠 있고, 나는 땅을 밟고 있고.”
혜윤이 고개를 돌렸다. 제 말속에 담긴 마음을 헤아리려는 눈빛을 향해서. 겹친 시선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애틋함이 오고 가는 순간,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런데 난 높이 있는 지호 씨도 좋아요.”
“다행이다.”
“사실…… 뭐든 다 좋긴 해.”
그리고 어느 때보다 제일 눈부시게 웃기도 했다. 그 얼굴이 너무 예뻐서, 지호는 하려던 말을 잠시 잊었다. ‘아무렴 나만큼 좋을까?’ 같은 말이었다. 잊은 말을 대신하려는 눈빛이 다정하게 여울치자 그녀의 눈 또한 또렷이 빛났다.
“그렇게 구름 위에 올라가 있다가 가끔 내 옆으로 와서 산책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의 꽃은 땅에 뿌리 내린 채 자라야 했고, 그녀의 빛은 하늘에 떠 있는 게 어울렸다. 하지만 지호는 완벽히 동의할 수 없는 눈치였다. 꽃은 몰라도 빛은, 꼭 하늘에 떠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러다 그걸로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내려와서 같이 살고?”
“으아…….”
혜윤이 더욱 과장되게 입을 벌렸다. 그 동그랗게 벌어진 입이 귀여워 지호가 비슷하게 따라 해보기도 했다.
‘같이 살고…….’
몇 번은 들어서 익숙해진 말. 혜윤은 은연중에 이 글자들을 장면으로 그려 보기도 했다.
***
목포로 가는 길은 즐거웠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와 뻥 뚫린 도로. 그것도 물론 좋았지만, 혜윤이 제일 행복했던 건 휴게소에서 이것저것 많은 음식을 먹게 된 것이었다.
마치 최고의 부자가 된 것처럼.
세 가지를 먹고 싶은데, 다 먹을 자신은 없고. 지호는 메뉴판 앞에서 주눅 든 얼굴을 애정 있게 봤다. 빤히 그 눈이 오래 머물고 있는 글자들을 보다가.
‘우동, 돈가스, 순두부찌개?’
‘우와!’
‘큭큭. 거기에 쌈밥 정식 하나만 더 추가하자. 부족하니까.’
‘부족하다고요?’
어떻게 그 많은 걸 다 먹지 싶었는데 지호는 정말 깔끔하게 비웠다. 여러 가지 조금씩 먹고 싶은 제 소원을 이뤄준 그가 영웅 같았다.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먹고는 4개나 먹어봤다며 우쭐우쭐. 그 엉뚱한 허세를 귀여워해 주는 건 마냥 고마웠다.
그런데도 또 정신을 못 차렸지.
금세 또 호두과자와 타코야키 사이에서 고민하는 혜윤이었다. 그렁그렁한 눈빛이 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방황하는 어깨를 폭 감싸며 달래는 것 역시 그였다.
‘둘 다 사고 하나 더 골라요. 나도 먹을 거니까.’
‘우와……’
누가 보면 건물 3채 고르라고 한 줄 알겠네.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는 눈빛에 지호가 실실 웃었다.
휴게소 부자 놀이도 배 터지게 하고, 몇 시간 더 운전한 끝에 목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들어설수록 부산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당장 인적이 드문 것만 봐도 그랬다.
“와, 여긴 정말…… 변한 게 없네.”
속도를 낮춘 차가 유유히 해안도로를 누볐다. 창문을 열자 짠 내가 훅 들이쳤다. 맑고 푸른 바다가 아니라, 짙고 어두운 바다였다.
“예쁜 맛은 없죠?”
“응? 이대로가 예쁜 거죠. 분위기가 다를 뿐인 거지.”
지호가 곁눈으로 혜윤을 살폈다. 옆자리에서 숨을 깊게 들이쉬며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야말로 정말 예뻤다.
***
“이 방이에요. 하루 재미나게 지내기엔 좋아. 도시랑은 다르니까.”
“오, 정말 좋네요.”
지호가 운전하는 동안 혜윤이 알아낸 숙소는 한옥으로 된 민박집이었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이었는데 오래됐지만 깔끔하게 관리된 게 눈에 보였다.
삐걱삐걱. 걸을 때마다 나무 바닥을 타고 운치 있는 소리가 났다.
“감사합니다. 잘 놀다 갈게요.”
지호가 주인 할머니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때야 혜윤의 눈에 긴가민가했던 것들이 확실히 들어왔다. 그녀는 처음부터 주인 할머니가 신경 쓰였다. 자꾸 두 사람을 힐끔거리고, 눈이 마주치는 여러 번을 내리 피했기 때문이다.
지호의 인사에도 또 그러기에 혜윤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꾹. 꾹. 할머니가 알아본 것 같다는 눈치를 줬다.
“그런데…….”
그때 주인 할머니가 처음으로 둘을 똑바로 봤다. 말끝을 흐리는 모양새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었다. 혜윤이 조금 더 손에 힘을 주자 지호가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네. 말씀하세요.”
동시에 두 여자의 마음을 달래주는 그였다.
“아니…… 어쩜 이렇게들 예뻐. 이렇게 예쁜 사람들 처음 봤어. 젊은이들 쳐다보는 거 싫어한다고 해서 안 봐야지, 하는데도 자꾸 눈이 가. 결혼한 지는 얼마나 됐어?”
그리고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이유가 빠르게 쏟아지고야 만다. 조금 전의 부끄러워했던 할머니가 맞나 싶을 정도의 속도였다. 아마 참고 참다 터진 게 분명했다.
혜윤은 단단히 헛짚었다는 반성보다 당황이 더 컸다. 결혼이라는 단어 때문에. 주인 할머니의 눈빛이 또랑또랑 자신을 보고 있는 건, 제 눈의 크기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아…… 그게…….”
그녀가 대답을 망설였다. 어르신들은 결혼도 안 했는데 같이 여행 왔다고 하면 안 좋게 보실까 싶기도 하고.
그 순간 손등을 어루만지며 지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얼마 안 됐어요.”
“그렇지? 그래, 신혼일 줄 알았어. 그냥 멀리서 봐도 깨가 후두둑 쏟아지니깐.”
혜윤이 큰 눈을 옆으로 슬쩍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지호는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왜?’라며, 천연덕스럽게.
지호는 태연하고, 그녀는 당황스럽고. 주인 할머니는 마냥 신나 보였다.
“애는? 아직 없어?”
“네.”
“그래. 신혼 알콩달콩 즐기다가 낳아도 되지. 얼마나 이쁠까. 한 놈만 낳으면 외로워. 많이 낳아.”
“제 생각도 그래서 와이프 설득하려고요.”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정말 꽉꽉 눌러 쥐었다. 제발 그만하라고. 하지만 상대에겐 가닿지 않았나 보다. 아닌가, 오히려 자극한 건가.
“왜, 색시는 하나만 낳고 싶어 해?”
“자기야, 진짜 그래?”
두 사람 모두에게서 쏟아지는 시선. 혜윤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3분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하나로도 벅찬 단어들이 연달아 쏟아지고 있었다.
‘결혼, 아이, 자기라니…… 맙소사.’
그녀의 원망 섞인 눈이 지호를 올려 봤다. 그러고는 주인 할머니를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할 수 있는 답이 그게 전부 같아서.
“아이고, 수줍어하는 것도 예뻐라!”
이제 막 결혼한 새댁의 부끄러움쯤으로 보인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질문도 멈추고, 할머니도 방을 떠나고. 두 사람만 남겨진 방, 조금 전 부끄럼쟁이 새댁의 눈에선 불꽃이 튀었다. 다시 또 태연하게 방을 들러보는 지호를 열심히도 째려봤다.
“와, 한옥 민박도 있구나. 너무 좋네.”
“지호 씨,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해요? 그런 거 어디서 배웠대?”
등 뒤에 꽂히는 앙칼진 목소리에 지호가 뒤를 돌았다. 얼굴에 황당한 감정이 빼곡했다.
“혜윤아…… 나 배우잖아.”
“아…….”
바짝 화를 내고는 금세 수긍. 그 순진한 반응에 지호가 피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