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23센티미터
(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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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23센티미터
2023.04.05.
방에 짐을 푼 두 사람은 다시 밖을 나섰다. 제일 처음 간 곳은 수산시장이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짜고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수산시장은 코앞이 부둣가였다.
줄을 세운 듯이 쫙 펼쳐 말리는 생선들과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 이곳 사람들에겐 일상인 것들이 혜윤에겐 너무나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지호에게도 이런 장면들은 익숙한 것들이었다.
12살 때까지 학교가 끝나면 이곳으로 달려왔으니까.
지호가 눌러쓴 모자를 벗고는 머리를 툴툴 털었다. 수산시장은 거의 문을 닫았고, 피부가 새까맣게 그을린 어부들도 고작 4명. 그마저도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석양이 타들어 가는 5시 반. 혜윤이 지호를 향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저무는 태양을 대신할 빛 같았다.
“중학생 때까지 여기서 지냈던 거예요?”
“아니요. 여기서는 12살 때까지. 중학생 때 살았던 곳은 배 타고 좀 더 들어가야 돼요.”
“아…… 섬인가 보다.”
“응. 지금은 학교도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다닐 때도 전교생 몇 명 없었으니까.”
부둣가를 따라 걸으면 곧 항구였다. 지호는 걷는 내내 바다를 보는 척, 어부들을 보고 있었다. 저들이 왜 그물 손질을 하는지, 그게 왜 여럿이 애쓸 만큼 중요한 일인지. 지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빠도 늘 그랬으니까.
너무 제 추억에 잠겨 있었나 싶어 그가 옆을 살폈다. 다행히 그녀 역시 바다에 빠져든 모습이었다. 맑은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컴컴한 바다이건만.
지호가 깍지 낀 손에 힘을 줬다.
“상상했던 바다랑 많이 다르죠? 어둡고, 무섭고.”
그 말에 혜윤이 지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손길만큼이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깊고 무게감 있는 게 지호 씨랑 비슷해요.”
“오, 좋게 생각해 주네.”
“응.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요. 그것도…… 지호 씨랑 비슷하고?”
“큭큭. 말도 참 예쁘게 해요.”
두 사람은 항구가 나온 뒤에도 계속 걸었다. 1시간 가까이 걷는 동안 마주친 몇몇 사람들은 모두 나이가 지긋했고,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이쪽을 빤히 바라봤다.
아는 얼굴을 떠올리려는 게 아니라 고운 외모가 마냥 신기한 것 같았다. 눈빛에 담긴 생각을 읽는 건 두 사람 모두가 가진 재주였기에, 지호는 계속 모자를 벗고 있었고 혜윤 역시 걱정하지 않았다.
걷는 동안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혜윤이 하나를 물어보면 지호가 두 개를 들려줬으니까.
‘그 중국집 아직도 있으려나 모르겠다. 아빠가 집에 오기로 한 날보다 하루 더 늦으면 짜장면을 사줬었거든요. 내가 생각보다 많이 삐쳤으면…… 탕수육도 사주고?’
‘으아, 귀여워. 탕수육 사주면 풀려요?’
‘큭큭. 당연하지. 아, 그 집 진짜 맛있었는데.’
‘내일 한번 가봐요.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한 사람만 궁금한 게 많은 건 아니었다.
‘음…… 고등학생 때는 딱 한 번 울었던 것 같은데.’
‘왜?’
‘정말 좋아했던 양호 선생님이 퇴직하셔서. 그날 엉엉 운 것 말고는 항상 즐겁게 다녔어요.’
‘말하는 것 보니까 진짜 엉엉 울었나 보다.’
‘큭큭. 조금? 그런데 나 의외로 잘 안 울어요.’
서로의 추억을 고맙게 주고받으면서도, 의심 가는 말에는 눈을 가늘게 뜨기도 했고.
‘진짜예요. 그래서 정말 정말 어쩌다 울면 다들 놀라요.’
‘그렇구나…….’
저녁을 먹고 9시가 다 되어 돌아온 민박집. 별채는 본채를 지나쳐야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할머니 옆에는 낮에 없었던 주인 할아버지도 함께였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들어가는 길.
“세상에…… 뭐 하는 사람들이래?”
등 뒤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꾸벅 고개를 숙일 땐 ‘그래요.’라는 머쓱한 대답뿐이었지만, 진짜 하고 싶었던 인사는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나 무슨 영화배우들 들어오는 줄 알았네. 저렇게 생긴 사람들 처음 봐.”
“어휴, 좀 작게 말해! 다 듣겠어! 신혼부부래.”
작게 말하라는 타박조차 너무나 커서 웃음을 참아야 했다.
***
<23센티미터> 김민우 PD “안지호, 회식비로 출연료 백 배는 썼을 듯”
김민우 PD “안지호 장혜윤, 최고의 호흡”
혜윤이 샤워하러 간 사이, 지호는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포털 사이트 상단에는 민우의 인터뷰들이 올라 있었다.
제작에 관한 뒷이야기들이 기사로 등장하는 걸 보니, 작품이 시청률 이상으로 반향을 일으켰다는 게 느껴졌다. 흥행에 성공해야만 뒷이야기도 들려줄 수 있는 법이라서.
제목은 온통 지호의 이름을 담고 있었지만 미끼일 뿐이었다. 읽어보면 전 스태프들의 호흡이 좋았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조금 더 읽다가 그도 샤워를 하고. 드라마가 시작될 무렵엔 바닥에 깔린 이불을 덮고 앉았다.
침대 없는 온돌방. 따끈따끈한 바닥의 온기가 이불 위로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마지막 회는 웃을 만한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 헤어짐으로 향하는 여정이었기에. 두 사람 역시 드라마에 깊게 빠져들어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가끔 ‘저 표정 너무 좋다.’거나 ‘호흡에도 감정이 섞였네.’ 같은 감동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결국 안 쓰기로 하셨구나.”
“……그러게요.”
이렇다 할 대화가 오고 간 건 마지막 회 후반부였다. 희수가 떠나기 전날, 잠든 종수에게 입 맞추는 장면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 장면은 기존의 대본대로 희수가 잠든 종수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진행됐다.
입맞춤으로 바꾸길 원했던 건 민우였기에, 이건 분명 여론을 의식한 것이었다. 잠잠해진 논란을 다시 일으키고 싶지 않았겠지.
지호가 잠시 곁눈으로 혜윤을 살폈다. 희수의 애틋함이 그대로 옮아 있었다. 그래서 살짝 장난을 쳤다.
“작가님 짜증 나겠다.”
“……네? 뭐가?”
“억지로 겨우 찍었는데 편집돼서.”
지호의 입꼬리가 섭섭함으로 축 처졌다. 입이 닿기는 커녕 가까워지기만 해도 NG를 내던 그날은, 서로에게 선명한 기억이었다. 과장된 표정에 혜윤이 곧장 발끈했다.
“우와아아! 그렇게 말할 거예요?”
“큭큭. 맞잖아. 얼마나 하기 싫은 티를 내던지.”
절레절레 흔드는 고갯짓이 여유로웠다. 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듯이. 그랬기에 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무례했고, 많이 미안했다. 말을 잃고 입술만 축이는데.
톡-
지호의 손가락 하나가 혜윤의 볼을 톡 스쳤다. 장난은 장난으로 받고 넘기라면서. 그래서 혜윤은 웃을 수 있었다.
드라마는 점점 끝을 향하고, 결국 헤어지는 날. 종수는 잽싸게 학교 소집일을 마치고 집으로 달려왔다. 벌컥 현관문을 열자 신발장에 보이는 희수의 운동화. 온 힘으로 뛰어와서 목구멍은 찢어질 듯 아팠지만, 얼굴엔 안도의 빛이 흘렀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짐 가방을 챙겨 나오는 아빠를 마주한다. 뒤 따라 나오는 희수와도. 할 일 없어 따라가는 척, 아빠의 차를 타고 세 사람은 터미널로 향한다. 조수석에 앉아 룸미러로 희수를 힐끔거리는 장면이 이어졌다.
그리고 다가온 이별.
“김종수, 누나한테 인사해야지.”
“…….”
“이놈이 섭섭한가 보네.”
서울행 고속버스 앞에서 종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방학 때 올게요.’라는 희수의 말이 거짓말이란 걸 알아서. 영원히 볼 수 없는 영원한 가족이 될 거란 걸 잘 알고 있어서.
“잘 지내.”
그리고 희수의 인사 같은 부탁.
“……누나도요.”
종수의 대답 같은 소망이 이어지면서 둘은 헤어진다.
혜윤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그랬다. 그렇게 조금 더 이어지는 장면. 지금부터는 그녀 역시 처음 보는 장면들이었다. 마지막 10분은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였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빠는 집 앞에 종수를 내려주고는 다시 일터로 떠난다. 표정을 잃은 얼굴만큼이나 기운 없는 발이 터덜터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집 현관문을 여는 순간.
종수는 한 발짝도 들어서지 못한 채 굳어버린다. 공허한 눈이 텅 비어버린 신발장을 물끄러미 보다가.
울컥.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더니 결국 눈가가 붉어지고야 만다. 팔등으로 눈을 가려보지만 끅끅, 서러운 마음을 못 멈추는 장면이 이어졌다. 종수의 가슴 속에 23센티미터의 구멍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남겨진 사람은 떠난 사람이 두고 간 마음마저 주워 담는다는 걸, 지호는 종수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희수의 몫까지 우는 종수는 작가인 혜윤도 상상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지호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린 종수가 측은해져 혼잣말이 나왔다.
“안타깝…… 응?”
그 순간 옆자리에서 들리는 훌쩍임. 그리고 가까이 들여다볼 틈도 없이 와락, 울음소리가 쏟아졌다.
“왜!”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혜윤이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울고 있었다. 잔뜩 찡그려진 눈매를 따라 투명한 눈물 줄기가 하나, 둘. 종수를 따라하듯 서둘러 팔등으로 눈을 가렸지만, 막지 못한 입으로 흐느끼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지호가 서둘러 혜윤을 안았다. 그 역시 드라마에 빠져 있었기에, 그녀의 감정이 어쩌다 저 깊은 곳까지 흘러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아, 놀라라. 왜 그러는데. 울지 마요.”
쉽게 진정되지 않는 슬픔이 품 안에서 들썩였다. 혜윤은 점점 격해지는 감정으로 말 한마디도 매끄럽게 이어가지 못했다.
“종수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러고는 곧 엉엉. 지호는 혜윤이 제 품 안에 안겨 있는 게 다행스러웠다. 이렇게나 온 힘을 다해 우는데, 웃는 걸 들키면 큰일이니까.
미안하지만 자꾸 웃음이 났다. 우는 몸짓이 귀여운 탓도 있었지만, 아마 몇 시간 전의 말이 떠올라서 더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나 의외로 잘 안 울어요. 진짜예요. 그래서 정말 정말 어쩌다 울면 다들 놀라요.’
지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다들 놀랐는지 너무 알겠네. 이렇게 만화처럼 우는데 어떻게 안 놀라.
늘 스스로를 미워할 틈을 안 주던 여자는, 슬픔을 떠안을 순간마저 앗아가고 만다. 겨우 웃음을 삼킨 지호가 혜윤을 토닥였다. 몇 분이 지나도 눈물이 주체가 안 되는 듯했다.
“이거 작가님 글이잖아요. 누가 보면 남이 쓴 이야기인 줄 알겠네.”
“난 저렇게…… 슬프게 연기할 줄…… 몰랐지…….”
지호가 작은 어깨를 품에서 살짝 떼어냈다. 어깨에서 떨어진 두 손이 혜윤의 양 볼을 감싸 올린다. 그러자 때마침 흐른 눈물이 그의 손끝으로 이어졌다.
엄지손가락이 고운 눈가를 훔쳤다. 손이 닿을 수 없는 마음에게는 목소리를 들려줬다.
“당연히 슬프지.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도 못 했는데 떠났잖아.”
검은 눈동자 속에 애틋한 마음이 절절 끓고 있었다. 물기가 가득한 눈을 마주하자 지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흘렀다.
“다시는 못 볼 걸…… 너무 잘 아니까.”
“…….”
주르륵. 또다시 흐르는 눈물. 딸꾹질하는 아이처럼 그녀의 몸이 여리게 들썩였다. 이쯤이면 진정이 된 걸까 싶어, 지호 역시 말을 맺으려던 참이었다. 그가 상상한 마지막 회 이후의 종수를 들려주면서.
“평생 텅 빈 신발장의 모습을 안고 살겠죠, 종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벌어지는 입. 단숨에 커지는 울음에 지호 역시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큭큭. 미치겠네. 혜윤아, 뚝!”
‘소중하게 안고 사는 거지.’라며 우는 아이를 달랬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참지 못한 웃음처럼 혜윤 역시 십여 분을 참지 않고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