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아기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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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아기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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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아기 늑대
2023.04.09.
혜윤의 붉은 눈가에 물기가 완벽히 사라진 건, 지호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와…… 감독님이 종영 선물 주시네.”
눈을 비비적거리며 그의 애정이 머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TV 속에는 <23센티미터> 스태프들의 이름이 마지막 자막으로 느릿느릿 올라가고 있었다. 두 주인공도 처음 보는 비하인드컷과 함께.
사진에는 드라마가 담지 못한 즐거움이 가득했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출연진들의 모습, 스태프를 도와 장비를 나르는 지호, 조연출과 함께 쏟아지는 비를 피하는 혜윤도 있었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끝난 뒤에 나타난 마지막 사진 한 장. 같은 곳을 보며 웃는 지호와 혜윤이었다. 어딜 보는지, 왜 웃는지는 두 사람 모두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촬영 내내 이런 행복을 수도 없이 누렸겠지 싶었다.
“너무 예쁘다.”
“예쁘다…….”
동시에 똑같이 터지는 감상. 겹치는 목소리를 따라 둘의 눈길 또한 서로를 향했다.
“이제 다 울었어요?”
지호는 TV 속 추억들을 눈에 담으면서도 그녀를 살피고 있었나 보다. 세상 제일가는 울보처럼 엉엉 울었으니 혜윤은 민망할 만도 했다. 괜스레 눈을 굴리던 순간 번쩍 떠오른 생각. 그녀가 쓱쓱 눈가를 닦으며 일어났다.
“응? 어디가?”
조금씩 얼굴 위로 민망함이 피어나더니 눈을 굴리고, 곧 몸을 일으키고.
그 귀여움을 지켜보던 지호가 시선으로 뒷모습을 쫓았다. 세수를 하려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혜윤은 챙겨 온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제게 돌아올 땐, 손에 반으로 접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몰래 살펴볼 필요도 없이 불쑥 내밀기도 했고.
“……이거.”
“응?”
“이건 내가 주는 종영 선물.”
목소리에 아직 슬픔이 남아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지호 역시 손을 뻗었다. 받아 놓고 보니 직접 만든 얇은 책이었다. 두꺼운 종이를 반으로 접어, 가운데를 스테이플러로 찍어둔 모양새.
몇 장이 채 안 돼 보이지만, 한 장씩 깔끔하게 펼쳐볼 수 있도록 나름 제본을 잘 흉내 낸 것 같았다.
하지만 잔뜩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시선을 온전히 사로잡는 표지 때문에. 표지 한 가운데엔 색연필로 예쁘게 그린 늑대 한 마리가 있었다. 가장자리에 알록달록 다른 동물들까지.
<아기 늑대>라는 제목에 살짝 웃었지만 곧 멈추기도 했다. 제목 옆에 작게 적어 둔 ‘글쓴이 장혜윤’이라는 글자가 너무 크게 와 닿아서.
장윤 말고 장혜윤을 적을 때 어떤 감정이었을까. 그 마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감동이었다. 뜨거워진 가슴이 혜윤을 바라보는 눈빛 속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랬기에 혜윤은 조금 더 수줍은 목소리를 냈다.
“조금 유치한 건 감안해요.”
“유치하기는.”
“원래 동화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거라서…….”
“장혜윤처럼?”
울었던 기억이 민망하고, 다가올 평가가 떨리고. 지호가 여리게 일렁이는 눈망울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그러고는 곧 책을 펼쳤다. 한 페이지마다 짧은 문장 두세 개와 색연필로 정성껏 칠한 그림이 담겨 있었다.
***
<아기 늑대>
초록 숲에 귀여운 아기 늑대가 살고 있었어요. 어느 날, 평화롭던 아기 늑대에게 무시무시한 바람이 찾아옵니다. 소중한 집이 바람에 날아가자 아기 늑대는 숲을 떠돌기 시작했어요.
불 켜진 집마다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났어요. 맛있는 냄새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늑대는 바라보기만 했답니다. 울타리 안의 꾹 닫힌 문이 너무 커 보였거든요.
그때였어요. 작은 나무집 문틈으로 늑대를 빼꼼히 바라보는 친구가 있었어요. 분홍 아기 돼지 한 마리가 늑대에게 손짓했어요.
“괜찮다면 이곳에서 함께 지내지 않을래?”
집 안에는 까만 아빠 돼지와 얼룩무늬 엄마 돼지도 함께였어요. 아기 늑대는 어색하게 집에 들어갔지만 금방 따뜻함을 느꼈어요.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어요. 이웃집 코뿔소와 사슴 친구들은 아기 늑대가 돼지들을 잡아먹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아기 늑대는 돼지 가족들을 든든하게 지켜주었으니까요.
더 이상 아기 늑대는 혼자가 아니었어요. 조금 다른 생김새여도 늑대를 사랑해 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생겼으니까요. 결국 마을의 모든 동물들은 아기 늑대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아기 늑대는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지호의 얼굴 위로 아득한 행복이 스몄다. 그림과 내용, 하물며 글씨체까지 온통 혜윤스러웠다. 귀엽고 따뜻했지만 깊은 속내도 느껴졌다. 아기 늑대에게, 몸집과 색이 다른 돼지 가족의 의미가 무얼지 알 것 같았으니까.
누구의 행복을 소원하며 아기 늑대에게 아름다운 결말을 선물했을지도.
짧은 동화는 여기까지였다. 이어지는 두 장은 텅 빈 백지였다. 그 하얀 종이 가운데에 거뭇거뭇 비치는 글씨 자국. 뒷장에 적은 글씨가 설핏 뚫고 나온 것이었다. 그가 얼른 마지막 장을 넘겼다.
제일 마지막에는 발행일에 오늘 날짜가, 지은이에 혜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 빨간 별표와 함께 ‘특별 한정판’이라는 글자까지. 작은 재치마저 묵직한 감동을 불러왔다.
“와…… 진짜 감동이다.”
지호의 손이 얇은 동화책을 어루만졌다. 다 끝나버린 이야기건만 쉽게 마음을 떼지 못했다. 손이 의식할 새도 없이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 움직임이 혜윤에게 큰 행복을 주는 건 당연했다.
아직은 붉은 기가 남은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기대보다 너무 좋아해 주네. 고맙게.”
“이걸 다 언제 만들었어요? 글에 그림까지…… 그동안 바빴잖아.”
말을 잇는 와중에도 손은 여전히 동화책을 쓰다듬는 지호였다.
“여행 오기 3일 전부터. 3일 동안은 <아기 늑대>만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귀한 노력의 시간 앞에서는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다음 날이 시작되는 또 다른 새벽까지.
그녀가 어른처럼 제 행복을 그릴 동안, 아이처럼 보고 싶다고 투정 부린 자신이 한심했다.
어디 투정만 부렸나. 더한 것도 했지. 아니, 더한 것만 했지.
지호의 혀끝이 입 안을 꾹꾹 찔렀다. 이런 반성을 모르는 혜윤은 여전히 수줍어할 뿐이었다.
“사실 천천히 준비해서 주려고 했는데. 여행 이야기 듣자마자 이날이다 싶어서.”
“…….”
“그림 너무 이상하죠? 큭큭. 그림은 나도 처음 그려봤거든요.”
“이상하기는. 너무 예쁘지.”
지호는 다시 <아기 늑대> 속 동물들을 눈에 담았다. 집을 잃은 늑대도, 무시무시한 늑대를 바라보는 돼지도, 하물며 늑대를 경계하는 코뿔소와 사슴마저도. 온통 따뜻한 얼굴이었다.
그림에 이름을 못 쓰니까 자기처럼 그려놨구나. 따뜻하고 안고 싶게.
혜윤은 그런 지호의 얼굴을 세세히 지켜봤다. 지금 그의 얼굴에 배인 그윽한 미소가 얼마나 멋진지, 스스로는 모를 게 분명하니까.
눈썹 한 올까지 전부 기억해뒀다가 알려주고 싶었다. 우스운 표현이었지만 그의 아름다움을 그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똑똑-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쪽으로 두 사람의 관심이 꽂혔다.
“……새댁, 자?”
주인 할머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혜윤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미닫이문이 완전히 열리기도 전에 또렷이 깨어 있는 목소리를 냈다.
“아니요! 안 자요.”
“응. 불이 켜져 있길래…… 고구마 다 쪄가는데 주고 싶어서.”
문이 열리자 주인 할머니의 번뜩이는 눈이 보였다. 밤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옹골진 눈동자가 그녀를 유심히도 살피려 들었다. 정말 고구마가 목적이 맞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그 아리송함을 더하려는 고갯짓이 빼꼼 문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문틈 너머에 앉아 있는 지호의 얼굴을.
할머니의 행동이 심상치 않았지만 제 뒤엔 든든한 남자가 있으니까. 혜윤은 할머니의 호의에 입꼬리를 올렸다.
“저희야 감사하죠. 옷만 걸치고 갈게요.”
“그래요.”
할머니의 끄덕임에 서둘러 외투를 챙겨입은 혜윤이 지호를 바라봤다. ‘금방 다녀올게요.’라는 입 모양을 남겨두고 방을 나설 때까지, 지호의 눈 속엔 여전히 <아기 늑대>의 감동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삐걱- 삐걱-
두 여자의 걸음마다 나무 바닥이 정겨운 소리를 냈다. 한 발을 앞서 걷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그 사이로 섞여 들었다.
“저기…… 둘이 싸운 건 아니지? 표정들은 좋아 보이던데.”
“네? 싸우다니요. 그럴 리가요.”
뜬금없는 걱정에 혜윤의 걸음이 빨라졌다. 할머니의 옆에 나란히 서자 조금 전 탐정 같던 눈빛의 이유가 새어 나온다.
“아니, 혹시나 하고. 갑자기 엉엉 우는 소리가 들리길래 놀라서.”
“아…….”
나란히 했던 걸음이 다시 한발을 물러선다. 너무 창피해서 제 얼굴을 다 보이기 민망한 탓이었다.
본채의 대청마루에 도착하자 소복하게 쌓아놓은 고구마 2그릇이 보였다. 주인 할아버지의 손에는 김이 옮아 붙은 집게가 들려 있었다. 혜윤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할아버지의 끄덕이는 고갯짓 너머로 미미한 쑥스러움이 보였다.
할머니의 빠른 손놀림에 그녀 역시 얼른 그릇을 건네받았다.
“와,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진짜 맛있겠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정성 사이로 혜윤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 화사한 미소에 할머니가 제법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 눈이 부셔, 둘이.”
제 쪽을 향해 있는 노부부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할아버지의 쑥스러움은 모두 그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신랑은 또 얼마나 잘생겼는지. 색시가 이렇게 반짝거리니까, 신랑이 그 빛 받아서 더 눈부신가 봐.”
“으아, 신랑이라니…….”
“부끄러워하니까 더 예쁘네.”
고구마 접시를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신혼부부들은 밤에 시간 뺏으면 안 된다는 말까지 더해지자 더 그랬다. 어서 가보라는 손짓에 혜윤이 냉큼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부끄러운 걸음이 총총 빠른 속도를 냈다.
노부부는 멀어지는 뒷모습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고구마가 뭔 맛이나 느껴지려나. 둘이 붙어만 있어도 입 안이 달 텐데.”
할머니의 따스한 목소리에 불쑥 할아버지마저 끼어들고 만다.
“너무 곱다, 고와. 그런데…… 좀 전에 TV 나온 사람들이랑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어?”
“에이, 이 사람들이 훨씬 예쁘구만.”
할머니의 타박에 다시 TV를 향하는 눈. <23센티미터>가 끝난 자리엔 요란하고 화려한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긴가민가한 할아버지의 의문에 할머니의 확언이 또 한 번 더해진다.
“그리고 아까 드라마는 애들이었잖아. 고등학생들.”
“아, 그렇네.”
그제야 할아버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
드르륵-
혜윤은 문을 열자마자 자랑스럽게 고구마 접시를 내밀었다. 지호가 그 얼굴을 다정하게 바라봤다. 뭐든 주려는 생각만으로도 저리 설렐까 싶어서.
그래서 지호 역시 혜윤을 향해 쭉 손을 뻗었다. 정확히는 조금 전에 받았던 <아기 늑대> 동화책을. 혜윤이 되돌아온 동화책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동화책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지? 아무튼 씬 몇 개 추가됐다고.”
“응? 뭐지?”
온온하게 웃고 있는 지호의 옆에 펜 하나가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