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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나를 찾은 당신에게 (92/110)


91. 나를 찾은 당신에게
2023.04.12.



 
혜윤은 냉큼 지호의 옆자리에 앉았다. 항상 제 이야기를 되돌려주는 것, 그때마다 상상도 못 한 감동을 안겨주는 것. 그는 늘 그래 왔기에 책을 펼치기 전부터 가슴이 뛰었다.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는 손끝이 설렘으로 붉게 물들었다. ‘아기 늑대는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난 혜윤의 동화는, 지호의 글씨로 계속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늑대는 듬직한 어른 늑대가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똑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열자, 하얗고 작은 토끼가 늑대를 보고 있었어요. 토끼는 엉엉 울고 왔는지 눈이 빨갰어요. 아마 초록 숲 1등 울보 같았어요.]


“우와아아! 나 진짜 진짜 잘 안 울거든요?”

“응. 어련하실까요.”

 
억울한 토끼가 발끈 목소리를 높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눈을 흘기는 혜윤이었지만 입꼬리는 곱게 올라가 있었다. 얼굴 위로 유유히 흐르는 행복은 지호 역시 다르지 않았다.

혜윤은 생긋 웃으며 다시 책을 들여다봤다. 검은색 펜으로 쓱쓱 그려놓은 토끼 얼굴. 제가 며칠을 공들여 그린 그림보다 훨씬 잘 그린 것 같아 놀라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들 또한, 제 이야기보다 감동적이었다.

[토끼가 자기소개를 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빠른 건 늑대였어요.

“기다리고 있었어.”

“나를?”

“응. 언젠가 네가 날 찾아올 거라 믿었거든.”

둘은 행복하게 웃었어요. 그리고 늑대는 망설이며 말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토끼를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이었어요.

“나와 함께 새로운 숲으로 떠나볼래?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늑대는 토끼가 거절할까 봐 얼른 선물부터 건넸어요. 그동안 숲을 지키면서 번 돈이 있었거든요. 야간 경비는 페이가 꽤 셌답니다.]


“큭큭. 무슨 동화가 이래요?”

 
코끝이 찡하게 울릴 때마다 사탕처럼 물려주는 웃음도 좋았다. 지호가 어깨를 으쓱인다.


“늑대도 나름 어필하는 거지. 어느 숲에 가도 너 하나는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다고?”

 
모퉁이에 적힌 ‘다음 장에 계속’을 따라 혜윤이 종이를 넘겼다. 그리고 뭔가 묵직하다 싶은 순간, 입술 새로 감탄이 터지고 말았다.


“우와…….”

 
뒷장에 테이프로 붙여 놓은 반지. 작고 투명한 보석들이 동그란 반지 모양을 따라 촘촘히 반짝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멍해진 눈이 지호를 봤다. 그는 오직 근사한 미소 하나만으로도 눈이 부셨고.

찬연히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여유롭게 눈짓했다. 아직 <아기 늑대>의 결말이 남아 있다면서.

[토끼는 대답했어요.]

아니, 결말을 만들어 달라면서.

그가 적어놓은 글씨는 여기까지였다. 그다음 줄에는 큰따옴표 사이에 텅 빈 공백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슥 밀려오는 펜 하나. 토끼의 대답은 그녀의 몫이었다.


“음…….”

 
콧소리를 타고 감동이 새어 나왔다. 다시 바라본 지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여유가 사라진 것 같았다. 토끼의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이 애틋했다. 그래서 혜윤 역시 똑같은 시선으로 그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슥슥- 슥슥-

잠시 후 거침없이 채워지는 토끼의 대답. 공백의 크기에 비해 글이 길어진다 싶은 순간, 혜윤이 꽃송이를 건네듯 책을 건넸다. 드디어, 미세하게 떨리는 검은 눈동자에 <아기 늑대>의 결말이 들어왔다.

[“좋아. 너와 함께라면.”

토끼가 손을 내밀자 늑대는 그 손을 꼭 잡고 집을 나섰어요. 돼지 가족들과 마을의 모든 동물들은 행복하게 손을 흔들었답니다.]

지호의 두 입술이 스르륵 벌어지고야 만다. 짧은 문장을 새길 듯이 읽고 또 읽고. 그러다 퍼뜩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다. 이런 감동을 받기만 할 순 없었으니까. 그의 손이 토끼의 대답 위에 붙여둔 반지를 떼어냈다.

그리고 혜윤의 손가락에 살살 반지를 끼웠다. 반지는 꼭 이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듯이 잘 맞았다. 그랬기에 지호는 안심했고, 혜윤은 꽤 놀란 눈치였다.


“다행이다. 딱 맞아서.”

“와, 내 사이즈 어떻게 알았어요?”

“큭큭. 어렵게 알았죠?”

 
그를 향해 있던 벅찬 눈망울이 손가락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작은 손을 쫙 펼치며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고. 시간이 지날수록 하얀 얼굴 위로 행복이 쌓여가는 게 선연했다. ‘정말 정말 예쁘다.’라는 감상에 ‘누가? 네가?’라는 장난을 칠 수 없어 아쉬운 지호였다.

대신 장난 말고 오래 묻어뒀던 마음을 들려주기로 했다. 가슴 제일 밑바닥에 있던 진심은 너무 오래돼서 잔뜩 뭉그러져 있었다. 꺼내 온 목소리에도 그 기운이 묻어날 만큼.


“……그래, 숲 같기도 했다.”

 
눅눅해진 목소리에 혜윤이 잠시 반짝임을 내려놓았다. 그 행동에 담긴 호기심을 그가 모를 리는 없었다. 서로의 시선이 겹치자 지호가 어슴푸레한 미소를 보였다.


“항상 우주를 떠도는 기분이었거든요. 어둡고, 고요하고.”

 
혜윤의 미간이 잠시 꿈틀댔다. 어떤 미소는 언어가 담지 못하는 슬픔을 안고 있었으니까. 잠시 그의 외로움을 상상했다.

그 안타까움이 갈색 눈동자에 들이차는 순간, 대뜸 고개를 젓는 지호였다.


“아니. 그렇진 않았어. 그냥 빛이 없고 소리가 없는 것뿐이었지.”

“…….”

“처음부터 없다고 생각하면 외롭지 않아요. 나름 지낼 만하고.”

 
몸짓마저 해석해내는 사람에게 눈빛을 읽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지호는 혜윤이 차마 표현하지 못한 마음마저 달래주었다.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선물을 받았으니까 그 역시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늘 하던 강한 척 말고, 아무에게도 못 했던 이야기를 해보기로.


“그런데 나도 남들처럼 꿈을 꾸긴 했어요. ‘언젠가, 누군가’ 같은 거. 언젠가, 누군가…… 나를 찾아내지 않을까. 빛을 보게 되지 않을까.”

 
말끝에 피식, 따끔거리는 헛웃음이 들렸다. 혜윤은 그 숨소리까지 꼭꼭 주워 담았다.


“아무도 안 올까 봐 무서웠겠다.”

“아니. 그 반대였어요.”

“반대?”

“응. ……누가 올까 봐 무서웠지.”

 
간절한 의문의 눈길이 그를 향했다. 그 의문이 애끓는 마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걸 잘 알았기에, 지호는 조금 더 웃어 보였다.


“빛도 소리도 모르는 나한테, 너무 쨍하게 다가오면…… 감당 못 할 것 같았거든.”

 
‘언젠가, 누군가 같은 건 정말 평생에 한 번뿐일 테니까.’ 같은 혼잣말은 너무 작아서, 너무 처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감당할 수 있게, 놀라지 않게 찾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

“너무 눈부시지 않게, 너무 소란스럽지 않게.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잡을 수 있게.”

 
혜윤의 눈가에 그렁그렁 물기가 차올랐다. 초록 숲 1등 울보가 또다시 등장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지호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면 충분했으니까. 그의 큰 손이 보송한 뺨을 어루만졌다.


 


“그런데 조용히 글로 찾아올 줄이야…… 어떻게 이렇게 완벽할 수 있을까.”

 
그러고는 손가락 하나로 혜윤의 코끝을 톡 쳤다.


“울지 마요. 나 지금 엄청 행복하다고 말한 거니까.”

“…….”

“또 울면 이제 주인 할아버지도 오신다. 우리 따로 재울걸? 그만 싸우라고.”

 
혜윤이 배시시 웃었다. 팔등으로 눈가를 빠르게 닦아내며 초록 숲 1등 울보가 아닌 척해보기도 했다. 지호는 조금 더 편히 눈물을 가릴 수 있도록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이 고구마 그릇을 바짝 당겼다. 옅게 남은 온기가 흐릿해진 김을 뿜고 있었다.


“연애하는 즐거움도 오래 누리게 해 주고 싶긴 한데. 사실 갈수록 불안해.”

“……뭐가 불안해요?”

“말하자면 끝도 없죠. 혼자 밖에 나가는 거. 일 때문이라도 남자들 만나는 거. 만나서 웃고, 눈 마주치고, 말하고…….”

“으아, 말도 안 된다! 지호 씨만 저 예쁘게 보는 거예요. 남들 눈에는…… 응, 이렇게 보일걸요?”

 
혜윤은 언제 슬펐냐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오른손으로는 엉뚱하게도 고구마를 들어 보였다. 생각보다 뜨거웠는지 빠르게 내려놓으면서도 ‘이거 까줄까요?’라며 고운 마음을 보였다.

지호가 바짝 놀랐을 혜윤의 손가락을 톡톡 털어주었다. 더 식기 전에 먹여야지 싶어 살금살금 껍질을 벗겼다. 껍질 속에 숨어 있던 열기가 모락모락 김을 뿜어낼 때, 입 안에 감춰둔 그의 웃음 역시 솔솔 새어 나왔다.


“큭큭. 진짜 이 정도로 모르니 내가 불안하지.”

 
입바람으로는 반쯤 까진 고구마를 식히면서도, 부드러운 말로는 여자의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천천히 생각해봐요. 사계절 다 겪어 보는 것도 뭐…… 나쁘진 않지.”

 
사실 달래는 게 아니라 되새겨주고 있었다.

혜윤은 지호의 말속에 빠진 목적어가 무언지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걸 보면. 반지를 받고 이렇게나 좋은 걸 보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커진 걸까. 이렇게 대단한 사람과 내가, 정말 정말 같은 미래에 함께일 수 있는 걸까. 현실적인 생각을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런데 혜윤아.”

 
그 순간 지호가 고구마를 내밀었다. 제 이름을 부르는 또렷한 목소리만큼이나 뜻 모를 눈빛이 노골적이었다. 괜스레 두근.

혜윤이 눈을 굴렸다. 말로 답을 하면 더 떨릴 것 같았기에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호가 그 수줍음을 유심히 바라봤다. 정확히는 사랑스럽게.


“우리 이제 이름 부를까? 말도 놓고. 작품도 끝났잖아.”

 
감미로운 목소리에 고구마를 받아낸 손이 꽝꽝 얼어버리고 만다. 이미 말을 놓아버린 듯한 그의 말투엔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지호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붙었다. 온몸으로 당황을 표현하면서도 ‘먹어야지.’라는 말에는 또 깨작깨작 고구마를 괴롭히고 있으니. 심장이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싫어?”

“……좋아.”

 
그래서 거기까지만 해도 됐지만, 그리 급한 것도 아니었지만, 더 몰았다.


“이름도 불러줘야지.”

“노력…… 해볼게. ……지호야.”

“큭큭. 우리 혜윤이 또 구연동화 한다.”

“그런 말 하면 내가 더 못 하잖…… 아.”

“아…… 장난치고 싶다. 못되게 굴면 안 되는데.”

 
지호가 고개를 훅 숙여 혜윤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런 순간에 가까이 다가서면 얼마나 쑥스러워할지 알아서.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쁠지 잘 알아서.

역시나 흠칫 놀란 손이 고구마를 깨물듯이 쥔다.


“어색하면 어색하다고 해. 그래야 내가 그만하지.”

“응. 그러지 마…… 나 지금 말 놓는 것도 조금 힘들…… 어.”

“…….”

 
실긋 고개를 기울여가며 빤히 보다가. 정말 조금만 더 보고, 약속대로 그만하려다가.


“볼도 엄청 빨개지는 것 같…….”

 
결국엔 입을 맞췄다. 깨작이는 척하더니만 입 안에 고구마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단 걸 보면 그 이유는 단 하나겠지.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결국 참지 못한 진심이 터져 나왔다.


“사랑해.”

 
이렇게 눈을 보면서는 처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역시 직접 들어본 적은 없지 싶은 순간.


“나도 사랑해.”

 
늘 한 톨을 기대하면 한 움큼을 쥐여주는 여자라는 걸 깜빡했다.

다시 급하게 시작된 두 사람의 입맞춤은, 입맞춤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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