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여자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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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여자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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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여자의 마음
2023.04.19.
내일은 두 사람의 화보 촬영일. 유명 잡지사에서 주관하는 행사로, 작년 한 해 동안 가장 사랑받은 작품 10개를 선정해서 진행되는 화보였다.
1,000만 관객을 웃도는 영화와 순간 최고 시청률 30%에 육박하는 드라마. 그 많은 작품들 중 시청자들이 뽑은 1위의 화제작은 단연 <23센티미터>였다. 압도적인 1위 밑으로 쪼르륵 9개의 작품이 근소한 표차로 이어져 있었다.
모두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커플 화보라는 것, 이 행사의 수익금 전액이 결손가정과 조부모가정 아이들에게 지원될 예정이란 것. 모두 뜻깊고 감사했지만 지호는 단번에 거절했었다.
혼자였다면 당연히 했겠지만 혜윤과 함께라면 이야기가 달랐기에. 조금씩 꺼져가는 대중의 관심에 다시 불씨를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따로 기부금을 보태는 방식을 원했지만, 그의 확고한 생각을 단번에 뒤집어 버린 건 봉기였다.
3주 전, 화보 제안을 한 당일이었다.
‘기부야 지금 하는 것도 넘쳐. 솔직히 너만큼 기부하는 연예인이 어딨다고. 그동안 기부한 액수 알면 다들 까무라칠걸?’
‘많이 벌었으니까 하는 거지. 아무튼 화보는 힘들 것 같은데.’
거절의 뜻을 충분히 읽었음에도 봉기는 수긍하지 않았다. 지호의 마음을 알았지만 더 나아가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의 마음까지 알아버린 탓이었다. 봉기가 한 번 더 그를 설득했다.
‘그래도 작가님께 여쭤봐. 네 선에서 판단하지 말고. 괜히 하는 말 아니니까.’
‘……무슨 소리야?’
그리고 의미심장한 봉기의 한 마디를 지호가 놓칠 리 없었다. 되물으라고 건넨 말이었기에 봉기 역시 곧장 말을 풀어놓았다. 혜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맨얼굴에 댕강 묶어놓은 머리. 여배우를 떠나서, 어떤 여자가 그런 모습으로 온 국민에게 기억되고 싶겠냐는 것이었다. 수수한 모습이 사랑스러웠다는 건 우리 생각이고. 여자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니라면서.
‘화보야 예쁘게 사진만 찍는 거니까 크게 어렵지도 않고. 더군다나 화보 장인이 옆에 붙어서 챙겨 줄 텐데…… 네가 좀 잘하냐.’
‘……형 요즘 연애해? 여자 마음을 너무 잘 아네.’
‘은진이가 말해준 거야.’
봉기가 한쪽 입꼬리를 거만하게 올렸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지호의 귓가엔 언젠가 혜윤의 시무룩한 목소리가 울렸다. 첫 방송을 앞둔 예고편 속의 동글동글한 얼굴. 그 얼굴이 속상하다던.
우습지만 그 얼굴과 함께 지난 두 달 동안 먹었던 음식들도 떠올랐다. 하나같이 음식이라고는 믿기 힘든 아기자기함. 여자의 마음을 몰라줬던 건 음식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화보는 <23센티미터>와는 정반대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히 꾸민 모습이 그렇고, 정해진 대사나 포즈가 없다는 것도 그렇다.
추상적인 주제를 언어가 담아낼 수 없는 이미지로 구현해 내는 일마저도. 그렇지만 봉기의 말처럼 이건 제 전문 분야였다.
조금이 아니라, 매우 자신 있는.
예쁜 사진 몇 장쯤 추억으로 간직하면 좋겠지 싶었다. 그리고 생각할수록 그런 혜윤의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고.
지호의 입매가 부드럽게 휜다. 상상이 가져다준 은은한 행복에 고개가 작게 끄덕여질 무렵, 봉기의 말은 또 한 번 그 마음을 가로질렀다.
‘그런데 만약에 작가님이 이거 거절하잖아? 그러면…… 아니다, 은진이가 이건 말하지 말랬어.’
‘뭔데. 벌써 반은 말했잖아.’
벌름거리는 콧구멍은 말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눈치였다. 지호의 깃털 같은 한마디에 봉기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얄궂은 웃음이 함께였다.
‘만약에 작가님이 화보 촬영 싫다고 하면 나중 생각해서 그런 거래.’
‘나중 생각?’
‘응. 헤어질 때 생각.’
‘와…….’
지호의 장난스런 원망이 터지자 봉기가 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니까 물어볼 때 반응 잘 살펴봐.’
‘반응은 무슨.’
‘치를 떨듯이 거절하면…… 아, 벚꽃 질 때쯤 헤어지겠구나 생각하고. 진짜 벚꽃엔딩이겠네.’
봉기가 측은한 얼굴을 절레절레 저었다. 그 표정에 기가 찬다는 듯 함께 키득거렸던 그였지만, 그날 밤.
‘……화보?’
‘응. 취지가 좋아서 어떨까 하고.’
혜윤의 집 앞, 차 안에서. 가볍게 묻는 척 오감을 쏟아부었던 지호였다.
‘음…….’
그래서 입술을 꾹 붙이고 내는 하나의 소리만으로도 혜윤의 감정을 바로 간파할 수 있었다. 자그마한 몸 위로 적잖은 망설임과 호기심, 기대감 같은 수줍고 여린 감성들이 하늘하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고 싶구나 싶은데. 그 아지랑이 사이로 몇 시간 전 봉기의 이야기도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만약에 작가님이 화보 촬영 싫다고 하면 나중 생각해서 그런 거래. 헤어질 때 생각.’
웅웅. 웅웅. 귓가에 거슬리는 ‘헤어질 때’ 같은 표현들. 그러자 혜윤이 대답할 차례를 빼앗아 버리고야 말았다.
‘하자. 응?’
‘……좋아. 대신 나 많이 서투르니까 잘 알려 줘.’
거의 빼앗다시피 받아낸 대답은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지호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매일 이 시간에 집을 나선 지 한 달 남짓. 점점 해가 고개를 드는 시간이 빨라지는 게 확연했다.
“내일은 작가님도 매니저랑 스타일리스트 붙여드릴 거야. 이건 따로 말씀드려 놨으니까 걱정할 것 없고.”
“응. 몇 컷 싣는다고 했지?”
“4컷. 1위라서 한 컷 더 준 거라더라.”
아직 오늘 일정은 시작도 안 했건만, 벌써 내일 생각뿐이었다.
***
다음 날. 혜윤은 매우 이른 하루를 시작했다.
집 앞에 도착한 차를 타고, 낯익은 지호의 스타일리스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큰 미용실에 도착해 의상을 제외한 모든 치장을 끝낼 때까지 힘든 건 없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여배우 놀이를 하는 기분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도 그중 하나였다.
“혜윤 씨, 정말 예뻐요! 어우, 드라마랑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 거울 좀 봐봐.”
오늘 아침 동안 벌써 10번은 더 들었을 법한 칭찬이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오늘이라면 이런 칭찬을 들어도 될 것 같았다. 그만큼 거울 속에는 다른 여자가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살짝살짝 고개를 돌릴 때마다 피부를 타고 반지르르 윤이 흘렀다. 어찌 한 건지 눈은 더욱 또렷하고 깊어져 있었고. 이곳에 혼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계속 거울을 들여다보고 싶은 혜윤이었다.
“지호 씨도 30분 안에 온다는 것 같은데. 만나서 같이 가요?”
부원장이 스타일리스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양손은 여전히 혜윤의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채였다.
“아니요. 저희는 미리 가서 의상 피팅하려고요.”
“그렇지. 여배우들이 원래 준비시간이 길어.”
가벼운 인사를 하며 미용실을 나서는 마지막까지. 혜윤은 무수한 시선을 받아내야만 했다. 어색한 기분에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갈 때쯤, 그 마음을 달래려는 인사가 반짝 화면을 밝혔다.
[준비하는 중? (오전 7:40)]
미용실 문을 나서기 직전. 혜윤은 다시 한번 거울 속의 매혹적인 여자를 마주했다.
제가 입꼬리에 힘을 주면 그 여자도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분명 자신인 것 같았다. 그러자 신난 손가락이 핸드폰 속 자음과 모음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응. 나 오늘 엄청 예뻐! (오전 7:41)]
직접 보내놓고도 조금 우스웠는데 상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몇 초 되지도 않아 키읔이 길게 늘어선 문장 하나가 답으로 왔다. 꼭 키드득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은 순간, 짧은 마지막 인사도 이어졌다.
[너무 기대된다. 금방 보자. (오전 7:42)]
보이지도 않을 텐데 혜윤은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답장했다. 그래서, 너무나 들떠버린 마음이었기에 쉬운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가 이만큼 가꿨다면 상대도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할 거란 걸.
***
촬영장은 그리 크지 않은 스튜디오였다. 아직 쌀쌀한 바깥 날씨에 코트를 입고 온 게 무색할 만큼, 화보 의상은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튜브톱 드레스였다.
고급스러움이 흐르는 블랙 실크 드레스. 어색한 마음에 쭈뼛쭈뼛 옷을 입고 나오자 스타일리스트는 작게 손뼉을 쳤다. 오늘 20번쯤은 들었으면서도 ‘정말 예쁘다.’라는 칭찬은 여전히 부끄러웠다.
스타일리스트의 손이 빠르게 혜윤의 등으로 향했다. 몸의 라인을 따라 드레스에 핀을 꽂는 손짓이 매우 능숙했다.
그녀의 손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몸의 곡선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가슴과 골반은 더욱 볼록하게, 허리는 더더욱 잘록하게.
“와, 혜윤 씨…….”
“네?”
“몸매 진짜 예쁘다. 선이 고울 거라고 예상은 했었거든요? 그런데 볼륨감까지 있을 줄이야.”
“으아, 말도 안 돼.”
“너무 잘 어울린다. 야한 느낌이 전혀 없어서 더 예쁘네.”
가벼운 손놀림이 별일 아니라는 듯 가슴 주위를 매만졌다. 어깨끈이 없는 드레스였지만 그녀의 말처럼 야하거나 휑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스타일리스트가 뭉뚝하고 부드러운 브러쉬로 쇄골 근처를 살살 쓸기 시작했다.
슥슥- 슥슥-
브러쉬가 스쳐 가는 자리마다 고운 입자들이 뽀얀 피부를 밝혔다.
“민우 PD님이 혜윤 씨한테 사과해야 돼. 이렇게 예쁜 사람을 제대로 담아주질 못했네.”
“에이, 그런데 이거…… 안 흘러내려요?”
혜윤의 시선이 제 가슴 쪽으로 똑 떨어졌다. 브러쉬를 따라 작은 반짝임을 바라보다가 가슴께의 옷을 살짝 잡아당기기도 했다. 충분히 안정적이었지만 괜한 걱정 탓이었다.
“아, 붙이는 속옷은 처음인가 보다. 격하게 움직이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불안해서?”
“네. 조금.”
“큭큭. 불편하거나 떨어지는 느낌 들면 바로 말해요. 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손놀림만큼이나 가벼운 말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 번씩 턱으로 전신거울을 가리키는 스타일리스트를 따라 혜윤은 제 모습을 힐끔거렸다. ‘지호도 이제 도착했대요.’ 같은 말은 작은 가슴에 큰 두근거림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10분. 모든 점검을 끝낸 뒤 오늘 입게 될 2벌의 의상을 더 둘러보았다. 우아한 드레스 옆에 나란히 놓인 화이트 수트는 지호의 의상이라고 했다. 혜윤은 잠시 그 옷 위에 그림 같은 얼굴을 상상했다. 그러던 때.
“지호야! 혜윤 씨 좀 봐.”
제 옆에서 감격에 젖은 소리를 내지르는 스타일리스트였다. 혜윤은 퍼뜩 고개를 올렸다. 그러고는 곧 그 목소리가 가리키는 쪽으로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순간 눈앞에 번쩍 들이치는 빛.
길고 매끈한 몸 위에 그림 같은 얼굴. 지호가 제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살며시 벌어진 그의 입술이 소리도 없이 감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은 기어이 소리를 내고야 만다.
“우와…….”
블랙 수트 차림의 지호는 정말 그 자체로 빛이었다. 오늘만큼은 우아하고 예쁜 모습만 보이고 싶었지만 격해진 마음은 언제나처럼 감동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그 탄식이 절대 바보 같은 게 아니었다며 위로해주는 건 스타일리스트였다.
“혜윤 씨…… 지호 좀 봐요.”
양쪽을 번갈아 보던 스타일리스트는 ‘둘 다 난리네.’라는 혼잣말을 할 뿐이었다.
지호가 천천히 혜윤의 곁으로 걸어왔다. 예쁘다며 명랑하게 자랑할 땐 언제고. 완벽한 남자의 모습에 넋이 나간 혜윤은 눈만 또록또록 굴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정신이 번뜩 든 건 한순간이었다.
한 걸음을 사이에 둔 지호가 불쑥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