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 네가 날 떠나지만 않으면 (96/110)


95. 네가 날 떠나지만 않으면
2023.04.26.


세 명의 남자는 모니터 속의 빼곡한 사진들을 응시했다. 10장에 한 번씩은 꼭 웃는 얼굴들이 섞여 있었는데, 그 얼굴은 대부분 옆모습이었다. 카메라를 보고 있지 않은.

서로를 마주할 때만 웃음이 터진 모양이었다. 웃음 같은 행복이.

감독이 사진 한 장을 확대했다. 사진 속에는 혜윤이 지호를 향해 방긋 웃고 있었다. 마치 흑백 사진을 비웃기라도 하는 양 알록달록한 생기가 느껴졌다. 다 비슷한 감상을 한 건지 스태프 한 명이 운을 띄운다.


“B컷이라고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데요.”

“그러게. 공개되면 이게 더 난리 나겠다.”

“독자들은 이런 걸 더 보고 싶어 할 거야.”

 
모니터 귀퉁이에 적힌 파일명엔 오늘 날짜와 함께 화보의 주제가 적혀 있었다. ‘겨울, 마침내 봄.’ 흑백을 뚫고 나오는 생기. 정말 마침내 봄 같은 여자였다.

아니, 언제나 봄 같은 여자 같기도 했고.

감독이 촬영 내내 안고 있었던 생각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그러고는 옆자리 사람들의 아쉬움을 다독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이 조건 걸고 시작한 촬영이라서.”

“네? 무슨 조건?”

 
모니터에 붙어 있던 두 개의 시선이 날쌔게 감독을 향했다.


“지호 씨 쪽에서 B컷 유포하지 말라고 했거든. 오늘 메이킹 찍는 영상팀도 안 왔잖아.”

“어? 그러네요? 앞에 9팀은 다 메이킹 찍었잖아요.”

 
스태프 두 명이 촬영장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봐도 카메라라고는 한 대가 전부였다. 뒤늦은 깨달음이 기가 막혀 두 사람은 벙벙해졌다.


“응. 딱 4컷만 공개하고 싶다고 해서. 화보에 실리는 사진만.”

“그렇구나…….”

“그런데 지호 씨도 보통 사람이더라. 연애하는 남자들 다 똑같아.”

“뭘요?”

 
두 명의 스태프가 의문스럽게 감독을 봤다. 조금도 보통 사람 같지 않은데 어딜 봐서. 강한 호기심이 두 남자의 눈 속에서 번뜩였다.


“오늘 찍은 사진은 B컷이고 뭐고, 싹 보내 달래.”

 
‘자기 여자니까 자기만 보겠다 이거지.’ 같은 키득거림. 감독은 모니터 속 봄 같은 여자를 눈에 담았다. 언제나 봄인 여자 앞에서, 그의 표정이 꼭 지호를 흉내 내는 듯 웃고 있었다.

***


 
촬영 장소는 직전과 같았다. 텅 빈 세트장 한가운데, 앉던 의자마저 빠져나간 곳. 그럼에도 분위기는 더 따뜻해져 있었다. 당장 소품용으로 쥐고 있는 꽃만 봐도 그랬다.

꽃을 들지 않은 반대편 손은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이 닿아 있다는 건, 지금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 같았다. 찰나에 피고 지는 긴장마저 느낄 수 있고, 그래서 달래줄 수 있었으니까. 지호가 얇게 틈을 벌리는 혜윤의 손바닥을 바싹 당겼다.

찰칵- 찰칵-

심장 소리처럼 규칙적인 셔터음이 적잖이 듣기 좋았다. 힐끗 본 혜윤에게서 어슴푸레한 미소가 보였다.


“이번엔 또 누구를 떠올리려나.”

“응?”

“형이 그렇게 예쁜 표정을 지었을 리는 없고.”

 
제가 단단히 헛짚었던 관능의 원천을 떠올리자 헛웃음이 났다. 혜윤도 잠시 따라쟁이 놀이를 했던 지난 촬영이 생각난 듯했다. 부끄러움에 달싹이던 입술이 느지막이 고운 소리를 냈다.


“……이번엔 진짜 내 생각 했어.”

 
무슨 생각인 건지 목소리마저 수줍어 보였다. 맞잡은 손으로 기분 좋은 힘을 전했다. 더 들려달라고.


“그냥…… 작년에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생각. 그날도 정말 신기했는데, 오늘도 여전히 신기해서. 이렇게 화보까지 찍게 될 줄이야.”

“그러게. 벌써 작년이네.”

 
혜윤의 손이 지호의 힘을 똑같이 되돌려주었다. 지금 제가 느끼는 신기한 감정이 그에게도 꼭 전해지길 바라며.

생각해보면 정말 모든 게 신기했다. 어설프게 끄적여 놓은 <23센티미터>의 뼈대, 그곳에 조금씩 살이 붙을 때쯤 카페에 온 민우. ‘요즘은 잔잔한 게 끌려.’라며 제 글을 가져가더니만 몇 주 뒤에 온 연락.

‘혜윤아, 너 배우 안지호 알지?’라는 핸드폰 너머의 첫마디는 아직도 생생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연락을 받고, 그의 회사로 찾아가고, 결국 만나고. 만나기만 했나. 온갖 민폐를 다 부려가며 그를 괴롭혀댔지.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제일 소중한 사람이 되었고.

혜윤의 얼굴에 하얀 미소가 떠올랐다. 작은 콧바람 소리에 지호도 그녀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은 그였다.

찰칵- 찰칵-

이어지는 셔터음 사이로 두 사람이 비슷한 표정을 그렸다. 그리고 비슷함을 넘어 똑같았으면 싶은 마음이 소리를 낸다. 지호의 목소리가 잔잔히 가라앉아 있었다.


“내년에도 나랑 있어 줄 거야?”

 
지호가 조금은 느슨해진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더 큰 선물을 주듯 그의 손등을 어루만지는 혜윤이었다.


“응. 당연하지.”

“그럼 10년 뒤에는?”

“…….”

“그때도…… 같이 있어 줄 거고?”

 
가녀린 손의 움직임이 서서히 멈춘다. 혜윤은 촬영장에 울리는 경쾌한 음악이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씩 멀어지고 느려지더니, 끝내는 잘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귓가에 제 목소리만 되울렸다.

오롯이 진심만이.


“……그랬으면 좋겠어.”

 
잠시 그녀의 고개가 떨궈졌다. 그러다가 곧 카메라를 향한다. 그 작은 행동을 지호가 놓칠 리 없었다.

거짓말을 안 하는 여자는, 혹시라도 못 지키게 될 것 같은 약속조차 하지 않았다. 언젠가, 현실은 동화가 아니라던 혜윤의 말이 생각났다. 제일 아이처럼 굴었으면 싶을 때, 그녀는 꼭 어른스럽게 나왔다.

이럴 때야말로 ‘당연하지!’ 하면서 우쭐거리고, 허세 부리면 좋을 텐데.

결국 못 지키게 되더라도.

살펴본 혜윤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은 것 같았다. 괜히 먼 미래의 짐까지 짊어졌나 싶어 혜윤을 달래려 했지만, 이번엔 그녀가 더 빨랐다. 뻣뻣하게 굳은 얼굴에 설핏 장난이 감돌았다.


“10년 뒤에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빠른 대답만큼이나 벌써 10년 뒤로 훌쩍 뛰어가 있었다. 그래서 지호도 재빨리 그 10년을 따라잡았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대충 끓여도 내 김치찌개는 장인의 맛이 날 거야.”

“큭큭. 그게 대단한 사람이야?”

“응. 반찬 5개쯤은 뚝딱뚝딱 만드는 여자.”

 
또 이럴 땐 아이처럼 상상 놀이를 하지 싶을 때. 한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면, 후회하면서 살고 있진 않겠지?”

 
알 수 없는 말에 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 촬영을 잊은 듯한 눈길이 빤히 한 사람을 향했다. 그러자 혜윤이 맞잡은 손에 꾹. 꾹. 신호를 보냈다. 집중하라고.

차분한 목소리만큼이나 프로다운 행동이었다. 지호의 시선이 그제야 정면을 향했다. 찰칵거리는 소리 또한 다시금 규칙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무슨 말일까. 후회?”

 
그리고 모두가 안심했으니, 아직 풀리지 않은 궁금증을 향해 말을 거는 지호였다. 이어지는 혜윤의 목소리가 많이 작았다.


“그냥…… 그때도 요리를 잘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같은 후회.”

“……응?”

“이렇게 맛있는 걸 나 혼자만 먹게 되다니…… 같은 후회.”

 
지호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무슨 뜻인지 선명히 와닿았기에. 조금 전 혜윤처럼 그의 고개가 잠시 떨궈졌다. 고개를 들며 본 혜윤 또한 즐거워 보이진 않았다. 스스로의 상상이 제법 슬픈 모양이었다.

지호의 엄지손가락이 혜윤의 손등을 힘있게 문질렀다. 이 작은 손짓에 제 큰 바람이 전해지길 소원하면서.

애틋함을 감추려는 목소리가 산뜻했다.


“후회는 무슨. 그때도 시무룩하게 말하겠지. 지호야, 누가 김치찌개 하나에 밥을 3공기나 먹어…… 하면서.”

“큭큭.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혜윤이 기분 좋은 콧소리를 냈다.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금은 떠오른 것 같았다. 그래서 지호의 손에도 큰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응. 꼭 그렇게 될 거야.”

 
찰칵- 찰칵-

시끄럽게 터지는 셔터음 사이로, 지호의 마지막 말은 묻히고야 말았다.


‘네가 날 떠나지만 않으면.’

 
짧은 한마디가 허공에서 쓸쓸히 흩어졌다.

***



“집으로 가? 거기까지라도 한차 타고 가자.”

 
모든 촬영이 끝난 시간. 지호는 옷을 갈아입은 혜윤을 아쉽게 바라봤다. 그 역시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익숙한 복장 위에 여전히 빛이 나는 얼굴들. 온종일 붙어 있었지만 카메라를 보느라 마음 편히 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호는 이어지는 스케줄이 2개나 더 있었다.

저렇게 예쁜데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니.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본인이 오늘 얼마나 예쁜지 잘 아는 목소리까지 들려주고 있으니.


“아니! 나 오늘 약속 있어. 예쁘게 꾸몄는데 집에 가긴 아깝잖아.”

 
남자의 아쉬움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저리 즐거워 한다면 다행이지 싶었다. 요즘 들어 챙겨주기는커녕 가끔 얼굴 보는 게 전부였기에. 미안함이 쌓여가고 있었다.

촬영장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각자의 차가 주차된 장소까지는 고작 걸어서 2분 거리였다. 짧아도 너무 짧은 산책. 지호는 걸음마다 발이 무거웠다.


“점점 바빠지는 것 같아.”

“그러게. 전보다 일을 줄인 건데도 이러네.”

 
지호의 대답 사이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생각 없이 건넨 말이건만, 오히려 그 감정에 놀란 건 혜윤이었다. 그래서 그의 팔 쪽으로 몸을 바짝 달라 붙였다.


“한 달 넘게 거의 붙어 있었잖아. 그때도 좋았지만 지금도 좋아. 가끔 봐서 애틋한 거.”

 
고개를 잔뜩 기울이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일부러 더 생글생글 웃으며 아쉬움을 빼앗으려 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평소의 지호라면 지금쯤 비슷하게 웃어줬을 텐데.

지호의 표정이 어색했다. 뒤늦게 보이는 미소 역시.


“나 오늘 스케줄 하나 더 끝나면, 저녁에 감독님 뵙거든. 데뷔 영화 함께했던.”

“그렇구나.”

“응. 연말에 시나리오를 주셨는데 좋더라고. 감독님도 꼭 같이 해줬으면 하는 눈치고.”

 
느린 걸음을 따라 조금은 긴 이야기들이 함께했다. 작게 끄덕이는 고갯짓으로 호응하던 혜윤이 불현듯 눈에 힘을 줬다. 힘껏 째려보며 그를 못마땅하게 훑었다. 도도한 새침데기를 열심히도 흉내 내고 있었다.

기분 좀 풀라고.


“어떤 영화야? 또 엄청 야한 거야?”

 
삐약삐약. 성을 내는 목소리에 결국 지호가 키득거렸다.


“큭큭. 아니. 액션 영화야. 로맨스는 하나도 없는.”

“음…… 너무 좋은데?”

 
액션 영화라는 말보다는 지호의 웃음소리에 마음이 놓인 혜윤이다. 하지만 그 다행스러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가볍게 한 발을 떼는 순간, 그의 걸음이 뚝 멈추고야 말았으니까.

잡힌 손 탓에 덩달아 멈춘 혜윤이 뒤를 돌았다. 멈춘 걸음처럼 지호의 보기 좋던 미소 역시 멎어 있었다. 헷갈리는 행동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호의 혀끝이 잠시 입술을 축였다. 그때쯤 애매한 곳에 머물던 초점이 혜윤을 찾기도 했다. 차까지는 몇 걸음 안 남은 곳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완벽하게 겹쳤다.


“그런데 영화가 해외 올로케야.”

 
짧은 산책 내내 낯설게 굴던 이유가 들렸다.


“얼마나?”

 
잠깐 놀란 마음이 손에 힘을 꾹 싣기도 했지만, 곧 지호의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되묻는 말투 역시 손짓처럼 온온했다.


‘어른스럽게 굴자. 투정 부리지 말고.’

 
혜윤은 지호의 대답을 기다리며 하나의 문장을 되감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 놀란 아이 또한 심호흡을 내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아이 역시 ‘웃으면서 괜찮다고 대답해 주자.’ 같은 해맑은 다짐을 하고 있었다.

작은 몸속에서 둘씩이나 다짐했으니까, 웃어줄 수 있겠지 싶은 순간.


“……3개월. 조금 더 길어질 수도 있고.”

“아…….”

 
동그랗게 벌어진 입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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