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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97/110)


96.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2023.04.30.



 
혜윤이 뒤늦게 벌어진 입을 닫았다. 얼른 입술을 맞붙이고는 괜한 어색함에 침을 꿀꺽 삼키기도 했다. 예쁘게 포장까지 끝마친 대답을 전해야지 싶은데, 그 가벼운 한마디가 선뜻 나오지 않았다.

입 안에서 잔뜩 뭉개진 ‘괜찮아.’라는 말. 이젠 괜찮지 않은 상태가 되어 축축 처져 있었다. 그 불편한 마음을 지호는 쭉 눈에 담고 있었다.


“하지 말까?”

 
성난 속내를 어루만지는 말투만큼 그의 미소가 따뜻했다.


“에이…….”

 
그래서 혜윤은 스스로가 미웠다. 기회가 한 번 더 왔음에도 준비한 대답을 못 들려주는 자신이 한심했다. 못난 투정을 들킨 기분을 지울 수 있었던 건, 지호가 제 손을 꼭 쥐었을 때였다.

잠시 손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그녀였다. 힘 같은 확신을 보내는 쪽으로 그녀의 시선이 올려진다. 그러자 지호가 기다렸다는 듯 마음을 전했다.


“네가 싫으면 나도 싫어.”

 
혜윤이 입 안을 꼭 깨물었다. 싫다는 말이 이렇게나 듣기 좋은 말일 줄이야. 저 말 뒤에 지워진 6글자가 마치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 같은.

사실 그녀는 싫은 게 아니었다. 자신이 없는 것이었다. 친구든 가족이든, 좋아하는 사람을 한 계절 가까이 못 보는 건 경험해본 적 없었기에. 상상도 해본 적 없었기에.


“촬영은 언제 하는데? 다음 달?”

“설마. 아직 한참 남았어. 하게 된다면 가을쯤.”

“……그렇구나.”

“응. 이따가…… 일 끝나고 집 앞으로 갈게. 그때까지 천천히 생각해 봐.”

 
소심해진 고갯짓이 많이 작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을 쨍하게 비추는 헤드라이트. 동시에 정면을 바라봤다. 몇 걸음 앞에 주차된 차가 둘을 비추고 있었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간 곳에서 봉기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화보만 찍지 뭘 또 영화까지 찍고 있어.”

 
코앞까지 와놓고 차에 타지 않는 둘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얄궂은 말을 하면서도 혜윤과 눈이 마주치자 엄지를 척 내미는 봉기다. 그러자 그녀의 머릿속엔 오늘 봉기에게 3번쯤 들은 말들이 되풀이됐다.

‘이야, 작가님 오늘 아주!’ 모든 게 생략됐음에도, 모든 게 느껴지는 감탄이었다.

봉기가 지호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다음 스케줄이 있었기에 지호 역시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순간 지호의 손아귀에서 스르륵 빠져나가는 온기. 시선을 돌렸을 땐 혜윤의 손이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일 끝나면 통화하자. 사실 지금 대답할 수 있는데…… 그냥 핑계 삼아 지호 목소리 들으면 좋으니까.”

 
지호가 텅 빈 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손에 남은 여린 온기를 느끼면서, 눈 또한 그 온기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꾸민 얼굴이 우아했지만 연갈색의 눈은 여전했다. 촉촉하게 차오른 게 물기인지 애틋함인 건지. 언제나처럼 저 눈은 마음을 동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아이처럼 맑은 눈으로, 누나처럼 굴려고 하면 더더욱.


“피곤할 텐데 오지 말고 전화해. 알았지?”

 
혜윤이 어른스러운 당부를 보탰다.

그래서 지호는 다시 한번 작은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잠든 아이를 깨워 놓으려고. 혼자 돌아가는 차 안에서 어른 놀이는 하지 말라고. 예뻐진 얼굴을 자랑하려던 조금 전의 아이를 얼른 데려와야지 싶었다.

지호의 목소리에 대뜸 억울함이 그득해져 있었다.


“나도 핑계 삼아 얼굴 보러 가는 건데. 이유 없이 찾아가면 잘 안 만나 주잖아…….”

“우와! 그런 표정으로 말하면 진짜 같잖아!”

 
제 눈을 흉내 내는 듯한 그렁그렁함에 혜윤의 입이 떡 벌어진다. 삐약삐약. 다시 아이같이 목청을 높이기에 지호도 연기를 멈췄다. 작은 손을 꼭 쥐던 큰 손은 어느 틈에 그녀의 머리 위에 얹어져 있었다.

쓰다듬는 손길이 떨어져 있을 몇 시간을 미리 위로했다.


“큭큭. 이따 보자.”

 
작은 감동을 주고받는 두 사람. 그리고 본의 아니게 이 대화에 동행해버린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못마땅한 속내를 드러냈다.


“……그만들 하라고.”

“으아, 죄송합니다.”

 
봉기가 이를 질끈 물며 말을 으깨고 있었다. 창문을 내린 이후로 둘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기에.

혜윤이 사뿐히 지호의 몸을 밀었다. 제 차 쪽으로 가는 마지막까지도 손으로 통화하는 시늉을 했다. 오지 말고 전화하라고. 지호가 그 귀여운 몸짓에 미소 지었다.

하지만 차에 타자마자 미소는 싹 지워져 있었다. 각자의 차 안에서 둘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같은 생각을.

***


 
밤 11시. 감독과의 미팅까지 모두 끝낸 지호가 제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제일 중요한 마지막 일정을 위해서.

도로 위에 내린 어둠처럼, 조각 같은 얼굴 위에 적막만 가득했다. 지호의 손이 작게 울리던 라디오마저 꺼버린다. 모든 게 정신없게 느껴진 탓이었다.


‘괜히 옛날에 했던 약속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지? 다음에 같이 하자는 말은 다들 생각 없이 해.’


‘설마요. 시나리오가 좋아서죠.’


‘지호 씨 성격을 잘 아니까 하는 소리지. 빈말이 없는 사람이잖아.’

 
차 안은 조용하고, 머릿속은 시끄러웠다. 저를 좋게 봐주던 고마운 이야기도 있었지만, 숨구멍을 턱턱 막는 말도 있었다.


‘요르단이 멀기도 하고, 지금 한 번에 가는 항공편도 없잖아. 들어가면 촬영 끝나야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렇군요.’

 
또한 제 마음을 꿰뚫는 말들도 있었다.

쉽게 눈치챘겠지 싶었다. 뻔히 알려준 일정을 한 번 더 곱씹고, 시차를 따지고. 해외 촬영에 익숙하면서도 예민하게 굴었으니까.

더군다나 이 나라에서 제 연애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많이 걸리나 보네.’


‘네?’


‘여자친구 말이야. 지호 씨 나이에 가족 때문은 아닐 거잖아.’


‘아…….’


‘응. 보기 좋다고. 이제야 좀 보통 사람 같다.’

 
주스로 목을 축일 때 들렸던 이야기는, 감독이 늘 제게 보였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들 같아서 그래.’ 같은 따스함.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에 걸려서, 일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싶은 거? 그거 지극히 평범한 거야. 정상적인 거고.’


‘큭큭. 다행이네요.’


‘응. 만약에 이 영화 하게 되면…… 지호 씨 많이 달라질 것 같다. 그래 보이네, 지금 보니까.’

 
마지막 한마디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뭐가 달라진다는 걸까 싶어 되물었지만 그는 웃기만 했다. ‘그냥 그런 게 있어.’라면서.

지호는 혜윤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이젠 제집만큼이나 익숙한 아파트.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곧장 메시지 앞의 숫자가 사라져버린다.

그 위로 마지막 혜윤의 메시지가 보였다. 30분 전에 온 답장이었다.


[말 진짜 안 듣네. (오후 10:51)]

 
집 앞으로 가겠다는 말에 보내온 답장이었다. 뾰로통한 글자만 봐도 웃음이 났다. 하지만 쉽게 사그라들고 만다.

혜윤이 어떤 대답을 할지는 짐작이 갔다. 단지 그 말에 들려줄 대답을 찾는 게 힘들었다.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이미 여러 번 해 온 말이 진심처럼 가 닿을까. 다음부터는 이런 식으로 오래 떨어져 있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약속은 정말 지킬 수 있는 걸까.

지호가 복잡해진 머리를 툴툴 털었다. 그 순간 저 멀리 혜윤이 걸어오고 있었다. 혜윤은 얇은 카디건을 입고 팔짱을 낀 모습이었다. 가까워질수록 차 안을 들여다보는 얼굴 위에 심통이 선연했다.

쪼글쪼글 주름 잡힌 콧등만 봐도 ‘오지 말랬지!’ 같은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조금 전의 많은 생각들이 맨 꼴찌로 밀리고야 만다. 언제라도 제일 1순위일 것 같은 여자 앞에서.

탁-

그리고 조수석 문이 열리는 순간, 행복한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오지 말랬지!”

 
이미 들은 것 같은 말과 함께 그녀의 향기가 훅 들이쳤다. 지호가 인사도 잊은 채 실실거렸다. 그러자 말간 얼굴 위에 의아함이 동동 떠오른다. 오전에 보았던 농염한 여자는 싹 씻겨나간 얼굴이었다.


“보고 싶어서. 친구들은 잘 만났어?”

“그럼 그럼.”

“큭큭. 다들 예쁘다고 해?”

“응. 엄청 놀란 것 같아서 뿌듯했어.”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고갯짓이 경쾌했다. 그러다 뒤늦은 의문이 지호를 덮친다.


“친구들…… 다 여자 맞지?”

 
가파르게 구겨진 미간이 마땅찮은 남자의 본심을 드러냈다. 혜윤이 절레절레 눈을 흘기자 지호의 미간이 살살 풀어졌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오늘따라 귀여웠다. 그래서 손을 뻗으려는데.


“……다녀와.”

 
혜윤의 대답이 훨씬 빨랐다. 손은 뻗을 새도 없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따뜻한 목소리에 잠시 정신이 아득했지만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는 모를 수 없었다. 지호의 눈이 또렷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가을, 겨울이면…… 작년엔 온종일 붙어 있었던 계절들이잖아.”

“…….”

“떨어져 있어도 떠올릴 추억이 잔뜩이니까. 이것도 또 추억이 되겠지? 괜찮을 거야. 나름…… 재밌을지도 몰라.”

 
작은 얼굴 위로 다정함이 감돌았다. 되묻는 말투였지만 질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가녀린 목소리가 은근히 손짓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고 제 확신으로 기대라고.

가라앉은 그의 목이 어렵게 소리를 냈다.


“……미안.”

 
지호가 잠시 입술을 맞물었다. 줄 수 있는 게 미안하다는 말뿐이라서, 이 사과를 받지 않고 돌려보낼 것 같아서 더 미안했다.

하지만 의외로 돌려보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사과할 걸 뻔히 알고 있었나 보다.


“정말 미안해?”

“……응.”

 
새초롬하게 묻는 말투 위로 깜찍한 두 눈이 깜빡깜빡.

불현듯 뻐근한 열기를 일게 할 만큼 황홀했다. 이런 상황에 달뜨는 놈이라는 게 기막혔다. 고작 제 몸 하나도 못 다스리는 놈이었나 싶다가도. 저렇게 예쁘게 들여다보는데, 오히려 이게 평범하고 정상적인 것 아닌가 싶은 순간.

배시시 웃던 입술이 살포시 열린다.


“그럼…… 오늘 자고 가.”

 
정말 미치게 하려고 작정했구나.

지호가 빠르게 시동을 껐다. 무를 수 없도록.


“잘못했는데 상을 주네.”

“그냥. 내일 아침 먹이고 싶어서. 바쁠수록 잘 챙겨 먹어야지.”

 
탁-

차에서 내리자 맞은편에 선 혜윤이 제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까딱 기울이는 얼굴 위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얼른얼른, 나 감싸줘야지!’ 같은 눈짓이 사랑스러웠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는 길. 화보 촬영을 끝내고 걷던 2분의 산책이 떠올랐다. 같은 사람과 똑같이 짧은 길을 걷고 있었지만 감정은 정반대였다. 감정만큼이나 꼭 붙어 있는 몸도, 대화 내용도. 모든 게 그랬다.

품 안에서 조곤조곤 속닥이는 목소리가 지호의 가슴을 녹였다.


“조금 전에 캐모마일 우려 놨어. 그거 한잔 마시고 푹 자자.”

“나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뭐가?”

“그게 진짜 심신 안정에 도움이 돼? 오히려 흥분시키는 건 아니고?”

“으앗! 캐모마일에 누가 그런 표현을!”

 
혜윤이 발끈하며 걸음을 똑 멈췄다. 한껏 크기를 키운 눈이 또랑또랑 지호를 향했다. 지호가 키드득거리며 제 가슴 앞으로 그녀를 당겨 세웠다. 한 몸처럼 겹친 채 느린 걸음을 이어갔다.


“그렇잖아. 난 그거 마셔봤자…… 전혀 진정이 안 되던데.”

 
‘안달만 더 나지.’ 지호의 작은 대답이 호흡처럼 그녀의 쇄골에 박혔다. 습한 호흡이 간지러워 어깨를 좁힌 혜윤이었지만 머릿속엔 엉뚱한 생각도 함께였다.


‘진짜 캐모마일이 문제인가?’

 
오늘은 한 입도 주지 말아야지 싶은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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