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마침내 봄
(98/110)
97. 마침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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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마침내 봄
2023.05.03.
3월을 넘어 4월까지. 두 사람이 했던 약속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약속의 시작은 해외 촬영 일정을 이야기하던 밤이었다.
‘혜윤아, 우리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같이 지낼까?’
‘하루?’
‘응. 점점 바빠지니까 하루쯤은 정해 놓으려고. 당연히 더 볼 수 있으면 좋지만.’
그때도 일주일에 한 번쯤 얼굴을 보던 날들이었다. 그의 영화가 5월 개봉을 앞둔 시기, 앞으로 더 바빠질 게 뻔한 상황.
지호가 애끓는 마음으로 건넨 제안을 혜윤은 신나게 받아들였다. 꼭 약속을 지키면 도장을 받는 아이처럼, 혜윤의 캘린더에는 ‘지호네 집’이라는 일정이 차곡차곡 늘고 있었다.
물론 하루라기엔 하루 같지 않은 날들이 더 많았다. 지호가 새벽에 들어와 몇 시간 뒤에 나가는 날도 있었으니까. 그때마다 혜윤은 그보다 더 빨리 일어나 아침을 차려주었다.
지호는 미안했고, 혜윤은 그나마 제가 바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한 날들이었다.
그리고 4월. 시작부터 시끄러웠다. 커플 화보가 공개되며 또 한 번 인터넷을 달궜고, 지호의 새 영화 출연 소식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기에.
‘지호야, 나 너무 화가 나.’
‘응? 왜.’
이날은 혜윤이 4월의 두 번째 도장을 받는 날이었다. 포털 사이트 곳곳에 지호의 새 영화 출연 기사가 오르던 날.
SF를 가미한 액션영화, 요르단 올로케이션, 역대급 제작비. 그 화려한 수식어들보다 모두의 관심을 끈 건 감독의 말이었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배우를 원했고, 안지호 외에는 생각해 본 적 없다.’라는 한마디.
감독의 기대만큼 벌써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화려한 외모에 걸맞은 역할에 한껏 차오른 기대감들. 흥분으로 가득한 댓글들 사이에 혜윤의 마음을 덧나게 한 말은 아주 단순한 문장이었다.
‘안지호 쉬지 말고 일해라!’ 자주 보고 싶다는 재치 있는 표현이었다. 엄청난 공감 수를 보니, 아마 지구에서 그녀 한 사람 빼고는 모두가 원하는 눈치였다.
‘핸드폰 화면이랑 싸워? 얼굴 풀어야지.’
‘씨이…… 안 되겠다. 나 못 참겠어.’
지호가 혜윤의 뾰로통한 얼굴을 올려다봤다. 혜윤의 다리를 베고 누운 나른한 새벽. 통통거리며 인상을 쓰는 얼굴은 너무 귀엽고,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은 너무나 황홀하고.
혼자만 행복한 것 같아 미안한 순간, 혜윤이 제 핸드폰을 지호에게 보였다. 뭐 때문일까 싶어 잠시 피곤함도 무른 채 집중한 그였다. 금방 웃음이 터졌지만.
1,000개가 넘는 공감 수 옆에 선명하게 색칠된 비공감 하나. 유일하게 제 휴식을 바라는 사람의 소행이었다.
‘큭큭. 역시 장혜윤밖에 없네.’
‘안지호도 휴식이 필요해요! 매일 3시간도 못 자는데! 라고 쓰면…… 너무 나인 거 티 나겠지?’
‘그냥 안녕하세요, 장혜윤입니다. 하면서 시작하지 그래.’
‘하아…….’
지호가 웃으며 혜윤의 몸쪽으로 얼굴을 묻었다. 피곤함과 행복함에 취한듯이 몽롱한 기분이었다.
여전히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사이로 ‘조금 더 자.’ 같은 속삭임은 꼭 폭신한 구름이 내는 소리 같았다.
***
“와, 종류가 이렇게나 많구나…….”
사각- 사각-
만질만질한 종이가 한 장씩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혜윤은 서점에서 잡지를 훑어보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오던 서점이었지만, 잡지 코너에 온 적은 거의 없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본 곳엔 품절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지호를 포함한 유명 연예인들 10팀의 화보가 실렸다는 것과 수익금이 모두 좋은 곳에 쓰인다는 것도. 찍어내는 속도가 인기를 못 따라잡는 것 같았다.
4월이 하루씩 늘어갈수록 혜윤도 조금씩 바빠지고 있었다. 갑작스레 어린이날에 공개될 초단편 동화 작업이 늘어난 이유였다.
지호와 혜윤의 일상은 정반대였다. 이걸 한 사람이 해낼 수 있나 싶을 정도의 몰아치는 스케줄, 그리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휴식. 지호의 삶이 가파른 절벽처럼 극단적이었다면, 혜윤의 삶은 차곡차곡 오르는 산처럼 규칙적이었다.
일주일 중 5일은 바쁘게, 2일은 여유롭게.
지금까지는 지호의 휴식에 제 일정을 맞춰왔지만, 만약에 그럴 수 없게 된다면.
혜윤은 요즘 들어 이 문장을 곱씹어댔다. ‘만약에’라는 글자 뒤에는 늘 유쾌하지 않은 상상이 붙었다. 점차 제 일도 늘어나고 있었기에.
혜윤이 대뜸 좌우로 머리를 흔들었다. 쓸데없이 걱정을 당겨올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고는 다시 잡지로 시선을 낮춘다. 지호의 새 영화는 다음 달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잡지에 지호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요즘 서점에 올 때면 잡지를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긴 그녀였다. 지호가 표지를 장식하지 않은 잡지에서도 그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으니까. 오늘도 우연한 발견을 기대하며 잡지 한 권을 넘기고 있었다.
“와…… 엄청 예쁘다.”
그녀가 넘겨보던 잡지 속에는 낯익은 여배우가 제 머리를 헝클이며 매력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이번 영화, 지호의 상대 배우였다. 지호만큼이나 개봉 준비로 바쁘겠지 싶었다. 온온한 생각과 함께 한 장을 넘기던 때.
어떤 글씨는, 깨알처럼 작아도 바위처럼 눈에 가득 들어올 때가 있다. 앞뒤 내용도 모른 채 그녀의 인터뷰 한 문장이 혜윤의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이상형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지. 하하.]
“응?”
혜윤의 손이 천천히 종이 한 장을 되돌렸다. 앞 장의 내용은 예상대로 지호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를 향한 칭찬들.
[순간 몰입도와 집중력이 대단한 배우야. 타고난 천재가 노력까지 하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싶었지.]
무게감 있는 칭찬이었지만 인터뷰를 옮겨놓은 말투가 상큼하고 시원했다. 자만하지 않는 모습, 인간적인 태도들이 이상형을 바꿔 놓았다는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종이를 넘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글씨들을 좀 더 집중해서 읽기 시작했다.
[이상형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지. 하하.
오, 안지호와는 동갑 아닌가? 맞다. 그런데 정말 예의가 바른편이라 말을 놓지 않더라. 과묵한 편이기도 했고. 그래서 아쉬운 기억.
앞으로 홍보 기간도 남아 있을 텐데? 안 그래도 이 기간 동안 친해지려고 한다. 노리고 있는 중.
평소에도 이렇게 적극적인 성격? 그런 편이다. 망설이고 재다가는 좋은 기회 다 놓치지. 좋은 사람도 마찬가지고.]
“와…… 예쁜 여자들은 다 이런가 봐.”
혜윤이 작게 투덜거리며 잡지를 덮었다. 아직 못 본 인터뷰가 한 장 더 있던데. 손이 구매를 망설였지만 마음을 달래며 서점을 빠져나왔다.
더 보고 싶은 마음보다는 현실이 중요했다. 산책을 앞둔 오늘 같은 날, 무거운 잡지는 짐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서점 밖으로는 벚꽃잎에 실린 봄이 폴폴 날아다니고 있었다.
오늘은 일주일 만에 지호를 만나는 날이었다. 집 밖에서의 데이트는 거의 두 달 만이었다.
***
밤에 가까운 저녁. 지호는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벚꽃이 만개한 길을 걷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봄을 구경나온 사람들이 길에 가득했다. 이렇게 인파가 많은 곳을 걷는 게 오랜만이었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각자의 봄을 누리느라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사람도, 찍히는 사람도. 누가 더 행복한지 경쟁하는 듯 웃고 있었다.
‘이쯤인 것 같은데…….’
제대로 온 게 맞나 싶을 때쯤 혜윤을 찾을 수 있었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잎 사이로 보이는 옆모습. 벤치에 앉아 있는 얼굴이 애틋했다. 일주일 만에 봤으니 더 그럴 수밖에.
하지만 가깝게 다가갈수록 지호의 미소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혜윤과 함께 있는 또 다른 사람 때문에. 그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이 아기는 누구야?”
불쑥 드리우는 긴 그림자와 듣기 좋은 목소리. 혜윤이 얼른 고개를 올렸다. 반가움에 생글거리는 얼굴을 보니 어쩐지 여럿에게 미안한 지호였다. 봄을 지배한 건 꽃도 바람도 아닌, 이 여자 같아서.
간지러운 생각을 하다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혜윤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아기를 들여다봤다. 그녀와 마주 앉아 있는 아기는 딱 혜윤의 상체만 했다. 아기에 대해 전혀 모르니 몇 살인지도 모르겠고.
흡사 인형 같았다. 신발을 신겨놓긴 했는데 저 조그만 발이 걸을 수는 있는 걸까. 지호는 가까이 다가가서 정말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귀엽지? 엄마 찾으면서 울길래 내가 데리고 있는 거야.”
“사람 맞구나…….”
“응?”
“아, 아니야.”
그제야 지호가 혜윤의 옆자리에 앉았다. 바짝 가까워지자 남자 아기가 빼꼼 그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기의 시뻘건 눈가만 봐도 얼마나 울었을지 짐작이 됐다. 속눈썹이 군데군데 뭉쳐 있는 게 아직도 물기가 남아 있었다.
호기심과 경계심이 가득한 눈이 끔뻑끔뻑 지호를 봤다. 들썩들썩. 서러운 숨소리가 작은 몸을 쉽게 넘어서기도 했다.
자두만 한 손이 겨우겨우 혜윤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응. 괜찮아. 삼촌도 엄청 착한 사람이야.”
토닥토닥. 아기를 달래는 나긋나긋한 말투에 지호가 슬쩍 미소를 보였다. 등을 토닥이던 혜윤의 손이 살며시 아기의 손 하나를 잡았다. 그 자두만 한 손바닥을 데리고 지호의 팔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거 봐. 삼촌 피부 되게 부드럽다. 딴딴한 점토 같지?”
“……응.”
살근살근. 지호의 눈이 아기의 손을 겹쳐 잡고 있는 혜윤의 손을 봤다. 제가 선물한 반지가 끼워진 손은 이렇게 예쁜 손짓만 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팔도 간지럽고, 가슴도 간지럽고. 그 와중에 남자 아기는 여전히 경계를 못 풀고.
“경찰서에 데려다줘야 하나?”
“아니. 목걸이에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어서 연락드렸어. 곧 오실 거야.”
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아기를 들여다봤다. 자세히 보니 정말 목 근처에 금빛 선이 반짝이고 있었다. 연락처를 적으려면 목걸이가 몸통만 한 걸까. 좀처럼 알 수 없는 아기들의 세계에 잠시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는데, 대뜸 혜윤의 가슴으로 얼굴을 파묻는 아기였다. 비비적비비적, 깊숙이도 파고드는 얼굴만큼이나 혜윤을 감싼 한 손에도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순간 지호의 입에서 헛웃음이 났다. 아기를 질투하는 게 스스로도 우스웠다.
“지호야, 나 가방에 젤리 있다? 그거 꺼내서 셋이 나눠 먹자.”
혜윤이 턱으로 가리킨 곳에는 그녀의 가방이 있었다. 하나라도 나눠주고 싶어 하는 건, 길잃은 아기에게도 절대 예외일 리 없었다. 아기는 보드랍고 따뜻한 건지 여전히 도리도리 얼굴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은 100원으로 3명이나 행복할 수 있겠네.’
지호가 피식거리며 젤리를 뜯었다. 혜윤에게 슬쩍 눈짓하자 품 안에 쏙 숨어버린 아기의 얼굴을 깨우는 혜윤이었다.
“이모랑 삼촌이랑 젤리 나눠 먹자. 다 먹을 때쯤에 엄마랑 아빠도 도착하실 거야.”
‘어때? 좋지?’라며 되묻는 다정함. 부드러움에 취한 건지 끄덕이는 아기의 얼굴에 배시시 미소가 보였다. 지호 역시 비슷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