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라일락 향기에 취해
(99/110)
98. 라일락 향기에 취해
(99/110)
98. 라일락 향기에 취해
2023.05.07.
지호는 손바닥 위에 올려진 곰돌이 2마리를 봤다. 바로 옆 아기 역시 양손에 쥔 젤리를 조물조물하기 바빴다. 그런데 마지막 한 사람. 혜윤만 자못 심각한 표정이다.
혜윤은 여전히 젤리 봉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까 싶어 지호도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그 속에는 짝이 없어 홀로 남은 곰돌이 한 마리가 있었다. 아마 7개가 들어 있었나 보다.
지호가 그녀의 귀여운 걱정을 치워주기로 한다. 그의 손이 봉지 속의 남은 곰돌이를 꺼내더니, 쏙. 혜윤의 입술 새로 넣어버렸다.
“응?”
혜윤이 눈을 키웠다. 아기도 재미있는지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있었다. 입 안에서 몽글거리는 젤리를 굴릴수록, 아기 역시 자두만 한 손을 바쁘게 조물조물했다.
제법 붉은 기운이 가라앉은 청명한 눈동자. 그 호수에 비친 남자의 얼굴이 근사한 미소를 그렸다.
“원래 예쁜 사람은 하나 더 주는 거야. 알았지?”
아기는 지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듣는 척은. 지호가 그 맑은 얼굴에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지만 곧 제 앞에 다가오는 젤리 하나. 꼼지락거리던 아기의 손이 지호를 향해 쭉 뻗어 나왔다.
“큭큭. 지호야, 너 예쁜가 보다.”
혜윤이 아기와 지호를 번갈아 보며 키득거렸다. 통통한 팔이 절대 무를 생각이 없어 보여서 지호가 얼른 젤리를 받아먹었다. ‘고마워.’라는 말에 체리 같은 입술이 뻐끔뻐끔. 지호도 제 손에 있는 젤리 하나를 아기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그냥 삼키면 안 돼.”
“응. 꼭꼭 씹자. 이모처럼 해 봐. 냠냠냠.”
양쪽에서 쏟아지는 애정에 아기의 고개가 좌우로 바빴다. 결국 셋 중 누구도 제 손에 들고 있던 젤리를 제 입에 넣지는 않았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입 안이 달았다.
***
아기의 부모는 여러모로 행복한 눈치였다. 아기가 무사하다는 것도, 그 아기가 말도 안 되게 지호의 품에 있다는 것도. 허겁지겁 달려온 뒤에는 곧 황홀한 표정을 짓기도 했으니 말이다.
계속 신기하게 보는 지호에게 아기를 안긴 혜윤이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서질 거라 생각하는 걸까. 지호는 아기를 품에 안은 내내 몸이 굳어 있었다. 등을 감싸는 손마저도 어색함이 그득그득.
아기는 지호의 가슴에 얼굴을 문지르다가 똑 멈추기도 했다. 눈도 입술도. 지호를 올려보는 얼굴이 황당함으로 여기저기 동그라미를 그렸다.
아마 혜윤의 품과는 달리 딱딱한 게 신기한 듯했다. 신기한데 마음에 안 들고. 더 이상 도리도리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그저 지호의 가슴에 귀를 대고만 있었다.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듣기 좋았나 보다. 지호는 작은 생명을 신비롭게 보고, 아기는 제게 반응하는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이고.
혜윤은 그 아름다운 장면을 소중히 눈에 담았던 10분이었다.
“좋은 엄마가 될 것 같던데.”
“내가?”
“응. 친구 같은 엄마.”
나란히 걷는 벚꽃길. 지호도 조금 전 생각을 한 것 같았다. 혜윤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모자챙이 가로등 불빛을 다 막았다 해도 절대 어둠에 잠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눈부신 얼굴과 마음을 향해 방긋 미소를 띄워 올렸다.
“그냥 친구가 될 것 같지는 않고? 내 젤리랑 쿠키 네가 먹었지! 하면서.”
혜윤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엄마가 된다는 건 상상도 해본 적 없었기에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현실감은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단숨에 자라나기도 한다. 어떤 남자가 어떤 눈빛으로 보느냐에 따라.
모자 속 작은 어둠 속에서, 그윽한 눈빛이 한 여자를 향했다.
“그럼 난 그때마다 네 편 들어야지. 엄마 젤리는 건드리는 거 아니야, 하면서.”
“으앗, 괜히 부끄럽네.”
짧은 한마디에 샘솟는 부끄러움. 혜윤이 엄마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 깜찍한 힘이 여린 감정에서 왔다는 걸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지호가 비슷한 힘으로 그녀의 마음을 달랬다.
어릴 때 꿈꿨던 엄마의 모습을 조금 전 너에게서 봤다고. 그냥 지켜봤음에도 어린 시절의 내가 위로받은 느낌이었다고. 낯간지러운 진심은 전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보다 더 반가워할 법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다.
지호가 깍지 낀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참, 혜윤아. 나 다다음 주에 하루 스케줄 비는데. 그 전날도 일찍 끝날 것 같고. 가까운 데 가서 하루 놀다 올까?”
“우와, 좋다!”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 눈을 반짝이는 혜윤이다. 생글생글 입꼬리만 올린 채 꾹 문을 닫은 입술. 아마 그 틈으로 행복이 새어 나갈까, 꼭 붙이고 있는 모양이다. 마냥 주는 게 좋으면서도 이럴 땐 빼앗기기 싫은 거지.
그 사랑스러움을 향해 고개를 숙이려는데, 대뜸 혜윤이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다다음 주면…… 며칠?”
“23일.”
“아…….”
꾹 잠갔던 작은 입술이 스르륵 벌어지는 것도 동시였다. 그 틈으로 행복이 새어 나가는 게 분명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운 미간이 조금씩 구부러지고 있었다.
“왜? 그날 일 있어서?”
“응. 22일 저녁에. 대신 23일은 같이 지내자.”
“……그래. 그러자.”
지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룻밤을 온전히 함께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나름 괜찮았다. 늘 자신에게 맞춰주기만 하는데, 오히려 제가 맞춰줄 기회가 생긴 거니까.
일 끝나는 시간에 기분 좋게 데리러 가야지 싶었다.
“아니면…….”
그런데 그녀가 또 한 번 말꼬리를 붙잡았다. 갸웃 기울어진 고개를 따라 여전히 미간은 꼬불꼬불 주름을 쥐고 있었다. 무슨 고민을 저렇게 귀엽게 할까. 지호는 재촉 없이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내가 내일까지 말해줘도 돼? 엄마 아빠한테 여쭤보고 다른 날 만나자고 할게.”
“엄마 아빠?”
“응. 22일에 같이 밥 먹기로 했거든. 어버이날은 엄마 아빠가 약속 있다고 하고, 그 전 주는 내가 바쁘고. 그래서 당겨지다 보니까.”
“……그래.”
작은 긍정에 다시 두 사람의 발이 움직였다. 지호는 ‘어버이날.’을 작게 읊조렸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싶었다.
지호 역시 매해 챙기는 날이었다. 혜윤처럼 살갑지는 못했지만 용돈과 짧은 메시지로써. 직접 전하려 하면 무조건 손만 내저으셨기에 봉기의 도움이 필요했다. 반찬통을 돌려보낼 때 함께 전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꼭 어린이날쯤 새별의 메시지가 왔다. 어떤 해에는 예쁜 옷과 운동화를 신고, 어떤 해에는 플룻 같은 악기를 들고. 아마 제 용돈이 새별의 어린이날을 챙겨준 듯했다. 새별의 메시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엄마가 오빠가 선물해 준 거라고 소중히 쓰랬어요!’라는 아이의 고마움. 어린이날에는 항상 메시지를 보며 웃었던 기억이다.
보통 가족들은 다 같이 밥을 먹겠구나.
“지호야, 내 말 듣고 있어?”
“……아, 미안. 무슨 말 했어?”
10년치의 어버이날을 곱씹느라 지호는 조금 느리게 현실로 돌아왔다. 제 대답에 혜윤이 발을 멈췄다. 힐끔 옆을 보자 작정하고 서운함을 쏟아내려는 얼굴이 또렷이 이쪽을 향했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콧등이며 미간이며 팔자주름까지. 쪼글쪼글 이곳저곳에 고양이 주름을 만든 혜윤이었다.
네가 이렇게 예쁜데, 꽃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 지호의 큰 손이 혜윤의 볼을 어루만졌다. 엄지가 닿은 눈가를 슬슬 쓰다듬자, 닿지도 않은 미간의 주름들이 살살 펴지고 있었다.
“미안해. 다시 말해 줘.”
혜윤의 코끝에 보이지도 않은 라일락 향기가 스쳤다. 목소리만으로도 저만치의 봄을 불러오는 남자였다. 그러니 억지로 열심히 만든 서운함이 녹을 수밖에.
혜윤의 얼굴에 보드라운 미소가 퍼졌다.
“그냥 지호는 어버이날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고.”
말 사이사이에 행복한 콧소리가 섞였다. 다시 이어지는 걸음마다 여자의 부끄러운 마음이 꽃잎처럼 내려앉았다. 물론 그 옆에는 남자의 아쉬움도 함께였다.
“음…… 난 그냥 용돈이 전부였지. 지금 생각하니까 너무 무심했네.”
“에이, 지호는 엄청 바빴잖아. 열심히 사는 것 자체가 효도야.”
혜윤이 살짝 기운찬 목소리를 냈다. 의심 말고 확신을 주려는 목청이 청명했다. 그 사이로 ‘22일.’이라는 지호의 낮은 혼잣말이 섞이기도 했다. 그가 22일을 떠올릴 때, 그녀는 하루를 앞서가기도 했다.
23일에는 지호와 어떤 맛있는 집에 가볼까. 민주에게 물어봐야지 싶던 때, 지호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크지 않은 목소리가 큰 당황스러움을 던졌다.
“그럼 그날…… 다 같이 밥 먹을까?”
“다 같이?”
“응. 부모님들 모시고. 가족들끼리.”
“뭐?!”
혜윤이 화들짝 고개를 세웠다. 높게 치솟은 목소리였지만, 주변 사람들은 봄과 사랑하는 이에게 취한 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지호의 부모님을 만난다는 건, 엄마라는 단어만큼이나 상상한 적 없는 일이었다. 아기 주먹만큼 벌어진 입술이 쾅. 문을 닫아버린다. 꽉 닫힌 입술 위로 머리가 빠르게 거절의 말을 지어내고 있었다.
‘사실 부모님들은 밥보다는 용돈이야!’ 그럴싸한 문장을 만든 그녀가 얼른 말을 전하려던 때.
“그날 진짜 맛있는 거 먹자. 내가 알아볼게.”
그보다 빠른 건 지호였다.
은근한 기대를 보이는 그의 목소리에서 여전히 라일락 향기가 났다. 그 향기에 취한 혜윤이 어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장 난 듯 움직이는 고갯짓처럼, 머릿속에 잔뜩 당황한 아이가 콩. 콩. 벽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
2주 동안 지호만큼이나 혜윤도 바쁜 시간을 보냈다. 매주 모았던 ‘지호네 집’ 도장을 못 받아냈을 만큼. 대신 지난주에는 지호가 ‘혜윤이네 집’ 도장을 받아 갔다. 새벽 1시에 만나 5시 반에 헤어지는 짧은 만남.
그 짧은 시간 동안 혜윤은 마냥 신기했다. 보고 있음에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도, 그의 체력도. 지호는 순수하게 잠을 잤던 2시간을 제외하고는 평소처럼 굴었다. 보통 때 함께했던 새벽 1시처럼.
언젠가, 2살 어린 동생은 체력이 좋다던 그의 장난. 볼수록 장난이 아니었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혜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부끄러운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일단 제 생각부터 얼른 단속한 뒤에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제 생각 말고도 단속해야 할 게 많았다. 옆 사람에게 향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비장함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아빠, 내가 100번 넘게 말한 게 뭐였지?”
혜윤이 살짝 고개를 올려 본 곳엔 그녀와 비슷한 갈색 눈동자의 남자가 있었다. 처진 눈꺼풀이었지만, 촉촉하게 물기를 지닌 눈망울은 부녀가 똑같았다.
눈망울만큼이나 귀여운 비장함도.
“응. 신기해하지 않기! 한참 쳐다보지 않기!”
“그리고 또?”
“앞서가지 않기! 오늘은 그냥 밥 한 끼 먹는 자리!”
“그렇지!”
두 사람의 엉뚱한 다짐을 지켜보는 또 한 사람. 혜윤의 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어쩌면 부녀가 저리 똑같을까 싶어 헛웃음이 나다가도.
‘신기해하지 않기, 한참 쳐다보지 않기…….’
그녀 역시 조금 전 몇 개의 다짐들을 몰래 곱씹고 있었다.